[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황신덕
친일청산을 반대하는 세력은 ‘다 지나간 일’이라는 논리를 내세운다. 강제징용과 위안부 피해배상을 거부하는 일본 정부나 전범기업들과 똑같은 말을 그들도 한다.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의해 배상 문제가 다 끝났다며 거짓말 하고 있지만, 친일청산 반대 세력은 종결 시점에 대한 거론도 없이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 1945년 해방에 의해 다 끝났다는 건지, 1949년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몰락에 의해 다 끝났다는 건지 확실히 하지 않은 채, 다 지나간 옛날 일을 왜 자꾸 거론하느냐고 한다.
정말로 다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까지 격렬히 반대할 필요는 없다. 다 끝난 일이라 어떻게 처리되든 관계없다면, 해방 80년이 되도록 그토록 일관되게 친일청산을 훼방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는 ‘다 지나간 일’이라며 친일청산을 방해하는 세력이 실제로는 이 문제를 현재진행형으로 보고 있음을 뜻한다.
친일파들은 1945년 해방 이후에도 국가기관은 물론이고 사립학교·기업·종교 등을 기반으로 영향력을 유지했고 자산을 유족이나 계승자에게 넘겨줬다. 친일청산 반대세력이 말로는 ‘다 지나간 일’이라면서도 이 문제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핵심 이유는 여기에 있다. 친일파들이 남긴 자산과 영향력을 수중에 놓아두려는 욕망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해방 80년이 다 되도록 친일청산이 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를 설명해준다. 친일파들이 물려준 재산과 영향력이 친일청산 반대 세력을 강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막는 핵심 요소다.
친일파 생명력을 강인하게 만든 인물
친일행위로 확보한 재산을 8·15 해방 뒤에도 계속 유지해 자신은 물론이고 친일세력 전체를 강하게 만든 친일파 중 하나로 추계 황신덕을 들 수 있다. 서울(경성부) 서대문구에 경성가정여숙을 창립한 황신덕은 한국 친일파의 생명력을 강인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소재한 중앙여자고등학교의 홈페이지에서 ‘중앙 80년 역사자료’라는 학교 연표를 읽어보면, 황신덕이 친일행위 중에 확보한 재산이 해방 이후에 어떻게 변모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 연표는 1940년 10월 10일 창립자 황신덕이 교장으로 취임한 경성가정여숙이 1945년 1월 1일 중앙녀자상과학교가 되고, 미군정 하인 1946년에 중앙고등녀학교를 거쳐 중앙녀자중학교가 됐다고 설명한다.
뒤이어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4월 28일 재단법인 추계학원이 설립되고, 전쟁 중인 1951년 8월 31일 중앙녀자중학교가 중앙녀자고등학교로 개편됐으며, 1964년 1월 24일 재단법인 추계학원이 학교법인 추계학원으로 변경됐다고 알려준다. 그런 뒤 “1983. 11. 22 창립자 추계 황신덕 선생 영면”이라는 중요 대목을 설명한다. 황신덕과 이 학교의 긴밀한 연계를 알 수 있다.
황신덕은 1898년 11월 6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국권이 침탈된 1910년에 평양 정진소학교를 졸업하고, 5년 뒤 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유치원 보모로 일했던 그는 20세 때인 1918년에 일본 유학을 떠났다. 지요다 고등여학교와 와세다대학을 거쳐 28세 때인 1926년 니혼여자대학을 졸업했다.
1926년 귀국해 <시대일보> <중외일보> <동아일보> 기자 생활 외에도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었다. 여학교 교사로도 일했고 보육학원 경영도 겸했다. 민족주의 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에도 참여했다.
그가 참여한 ‘다양한 분야’ 속에 친일행위도 포함된다. 일제 대륙침략이 본격화된 뒤인 1936년 무렵부터 각종 친일 현장에 명함을 들이밀었다. 불혹을 앞둔 38세부터 친일행위가 본격화됐다.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여성 교육자
<친일인명사전> 제3권 황신덕 편에 따르면, 1936년 12월 총독부 간담회에 참석한 이후 각종 시국 강연회나 토론회에서 한국 여성들의 침략전쟁 지원을 역설했다. <친일인명사전>은 그가 조선임전보국단·국민총력조선연맹·국민동원총진회 간부가 되어 전쟁 참여를 독려했다고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훌륭한 어머니’를 소리 높여 외쳤다. 1943년 5월 13일자 <매일신보> 기사 ‘어머니의 책임 더 한층 증대’에 따르면, 그는 ‘훌륭한 어머니’의 역할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한 번 나라를 위할진대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그러한 위인을 길러내는 어머니가 되기에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가 생각하는 훌륭한 어머니는 침략전쟁에 기여하는 어머니였던 것이다.
황신덕은 경성가정여숙을 창립할 때도 ‘어진 어머니’를 운운했다. 경성가정여숙 설립을 예고하는 1940년 8월 9일자 <조선일보> 기사는 황신덕이 어진 어머니를 양성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훌륭한 어머니, 어진 어머니를 강조하는 그의 모습이 친일행위에서도 나타나고 경성가정여숙 창립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은 그의 친일행위가 이 학교에 끼쳤을 영향을 생각하게 만든다.
<친일파 99인> 제2권에 수록된 장하진 충남대 교수의 기고문 ‘황신덕: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여성 교육자’는 경성가정여숙의 설립 자금이 옛 대한제국 황실인 이왕가의 건물에서 나왔다고 설명한다. 이왕가 사무처인 이왕직이 일본 궁내성(궁내청) 소속이었던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이왕가는 일본 왕실에 종속된 곳이었다.
일본의 대륙침략이 활발하던 시기에 그곳 자금을 받아 학교를 세우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친일파 99인>은 “당시 서울에서는 황족이나 친일 고관 부인이 중심이 되어 여성의 민족의식을 약화시키고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준비로 여성교육에 관여하였던 경우가 많았다”라고 설명한다.
이 학교가 실제로 친일행위에 이용됐다는 점은 조선여자근로정신대 강제징용 피해자인 김금진 할머니의 사례에서도 나타난다. 1992년 6월 5일자 <뉴스메이커> ‘고 박순천·황신덕 말 못할 사연, 정신대 여고생 45년 만의 폭로’에 따르면, 1943년에 김금진 할머니가 전범기업인 후지코시의 군수품 공장에 가게 된 것은 황신덕 교장의 눈물 어린 호소 때문이었다.
김금진은 근로정신대에 지원할 용감한 학생이 다른 학교에는 있는데 우리 학교에는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며 학생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교장의 호소를 들은 뒤 학교를 구해야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혔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교장실을 찾아가 기념사진을 찍은 뒤 후지코시로 가게 됐다고 회고했다.
친일청산이 어려운 이유
전범기업을 옹호하는 측은 이런 사례를 ‘자원에 의한 징용 참여’의 증거로 포장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감언이설에 의한 강제동원의 한 사례다. 학교를 위해 누군가는 징용을 가야 한다고만 말해줬을 뿐, 그곳이 봉급도 주지 않고 노예처럼 부리는 강제노역장이라고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인 1970년대에 김금진은 황신덕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갔다. 김금진이 그때 저한테 왜 그러셨느냐며 원망의 말을 하자, 황신덕은 자신도 그 일이 후회된다면서 사과했다고 한다.
이런 사과는 강제징용 피해의 치유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정으로 뉘우쳤다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후속 행동이 뒤따랐어야 했다. 전범기업과 한일 정부를 상대로 사과·배상을 촉구하는 행동 같은 것도 고려될 수 있었다. 사회적으로 저명했으니 파급력을 끼치는 양심선언 같은 것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신덕은 미안하다고만 했을 뿐이다.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까지 침략전쟁으로 몰아넣은 황신덕은 일제 패망 직후에는 새로운 상황에 신속히 적응해 갔다. 해방 다음날부터 그는 새로운 모습을 선보였다. 1945년 8월 16일 ‘조선 여성의 해방’을 표방하며 건국부녀동맹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듬해에는 미군정 하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이 됐다. 1958년에는 대한어머니회 이사에 취임했고, 1971년에는 3·1여성동지회 부회장에도 취임했다.
1983년 11월 22일 사망한 그는 살아생전은 물론이고 사후에도 칭송받는 삶을 살고 있다. 2019년 2월 26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지부가 발표한 ‘학교 내 친일잔재 1차 조사 결과’에도 언급됐듯이, 동상과 황신덕기념관과 추계장학금이 황신덕을 훌륭한 인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일제 치하에서 그가 만든 재산들이 지금도 힘을 발휘하면서 그를 모범적인 인물로 형상화하고 있다.
친일파가 친일행위 중에 확보한 사립학교를 기반으로 사후에도 영예를 이어가는 이 같은 현실은 친일청산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를 시사한다. 친일파가 남긴 재산을 기반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이어가는 세력이 ‘다 끝난 일’이라면서도 친일청산을 악착같이 저지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2022-11-26>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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