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한길사 김언호 대표이사
“약산 김원봉(1898~1958(?))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위대한 역할을 한 분인데 공적에 비해 너무 예우를 못 받고 있어요. 기념사업회도 없잖아요. 약산과 의열단의 독립운동과 그 정신을 제대로 자리매김하고 청년들이 이어받도록 해야죠.”
지난달 10일 서울 글로벌센터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출범한 ‘약산 김원봉과 함께’(공동대표 서중석 안경환) 상임대표 김언호(77) 한길사 사장의 말이다.
약산 독립정신의 계승 발전을 표방한 이 단체에는 강만길, 함세웅, 백낙청, 박석무, 김정남, 박중기, 임헌영 등 학계와 사회단체 원로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이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산하에 기획(위원장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이사)과 학술(위원장 김영범 대구대 명예교수), 문화(위원장 강성몽 문화기획자) 3개 위원회를 두었고 앞으로 청년과 여성위원회도 꾸릴 방침이다.
지난 5일 서울 시청역 근처 복합문화공간 순화동천에서 만난 김 대표는 “기일이나 챙기는 옛날식 추모사업에서 벗어나 약산의 정신을 오늘날 이어받을 수 있는 다양한 사업을 해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약산은 1945년 12월 환국 때 1년 전 별세한 부인 박차정 선생의 유골함을 들고와 고향 밀양 땅에 산소를 씁니다. 독립운동가 박차정 선생은 여성운동도 하셨죠. 약산은 얼굴도 잘생기고 똑똑했어요. 이런 부부의 삶은 영화로도 좋은 소재이죠.” 그는 “내년에 약산 요청으로 단재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의열단 선언)을 작성한 지 꼭 100년이 된다”면서 이 선언 다시 읽기 사업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의열단 등 독립운동사를 다룬 소설이나 논픽션 공모도 생각하고 있어요. 우선 내달 회원들과 경남 밀양의 약산 생가터 답사에 나섭니다.”
경남 밀양에서 난 약산은 21살 때인 1919년 11월, 중국 지린에서 동지 9명과 함께 의열단을 만들어 1924년까지 항일 의열투쟁을 이끌었다. 의열단원들은 단장인 약산의 지시로 조선총독부 청사와 도쿄 왕궁 주변 등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런 투쟁을 두고 현대사 전문가 서중석 교수는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활약에 견주기도 했다. 1938년 조선의용대를 만들어 항일전을 펼친 약산은 1942년 임시정부에 참여해 광복군 부사령과 제1지대장,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냈다. 해방공간에서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합작에 힘을 쏟다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48년 월북했다.
이런 독립운동 공적에도 약산은 아직껏 서훈을 받지 못했다. 북한 초기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에서다. 3년 전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기념사에서 약산이 이끈 조선의용대 공적을 언급하며 서훈 논의가 잠시 일었지만 일부 보수진영의 반발에 막혔다.
“서훈도 당연히 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아요. 가능한 것부터 해야죠. 먼저 영화를 만들어 젊은이들이 약산의 정신을 자기 삶의 지표로 삼게 하고 싶어요. 넓은 의미의 학교도 열어 강좌도 하고 답사도 하려고요.”
최근 ‘약산 김원봉과 함께’ 창립총회
각계 원로들 발기인…상임대표 맡아
기획·학술·문화 이어 청년·여성도
위원회 꾸려 논픽션 공모·영화 추진
“좌우 초월한 독립운동 인정 받아야”
“고향 밀양서 어릴 때 약산 얘기 들어”
그는 약산과 같은 밀양 출신이다. 발기인으로 참여한 박중기 4·9통일평화재단 이사와 안경환 공동대표도 고향이 같다. “초·중학교 시절 우리 동네에 김원봉이라는 독립운동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어요. 임진왜란 때 구국 정신을 발휘한 사명당과 조선 사림의 종장인 김종직도 밀양 출신입니다. 어릴 때 이런 분들 이야기를 많이 들은 게 살면서 영향이 있었을 겁니다.”
독립운동가 중 왜 굳이 약산이냐는 물음에 그는 약산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 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약산은 독립을 위해 철저히 항쟁한 분입니다. 또 독립운동에 좌우가 따로 없다며 백범 김구와도 손을 잡았어요. 약산은 의열단장 신분으로 중국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해 교장 장제스와 인연을 맺고 훗날 독립운동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죠. 그럼에도 남과 북의 정치적 조건 때문에 제대로 평가가 되지 않고 있어요. 약산을 다룬 책도 최근에야 나왔죠.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더 방치해선 안 됩니다.”
그는 “의열 정신은 청년 정신”이라고도 했다.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들은 모두 20대 젊은이들이었어요. 얼마나 대단합니까. 윤세주 등 밀양의 젊은이들이 대거 의열단에 합류했죠.” 김 대표는 “의열 정신은 정의로운 삶을 실천하려는 마음”이라면서, 이는 오늘날 어려움에 처한 젊은이들이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가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언제부터 약산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졌는지 묻자 그는 “기자 시절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아 독립운동 관련 책과 자료를 많이 사서 봤다. 출판사를 차리고도 가장 주력한 분야가 역사였고 그중에서도 한국 근현대사였다”고 답했다.
자유언론운동을 하다 1975년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그가 이듬해 한길사를 세우고 가장 먼저 펴낸 책이 송건호 <한겨레> 초대 사장의 <한국 민족주의 탐구>(1977)였다. 1979년 펴낸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하 해전사)은 80년대 필독서 중 하나였다. 그의 표현대로 “한국 역사에 대해 사람들의 눈을 띄워준” 책이었다. 그는 이 책을 직접 기획한 의도를 두고 “일제 식민통치에서 해방을 맞은 나라가 왜 분단에 이르렀는지 알고 싶었다”고 쓴 적도 있다. 답은 찾았냐고 묻자 그는 “역사는 해답이 없다. 계속 모색하는 과정”이라고 받았다.
출판사를 시작할 때 품었던 민족과 민족사에 대한 관심은 지금도 여전한지 묻자 그는 자신이 ‘한길사 최고 필자’로 꼽은 함석헌 선생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길사에서 그동안 3500권 가까운 책을 냈는데요. 함 선생님 책이 80권입니다. 단일 저자로는 가장 많아요. 하지만 함 선생님은 민족주의자가 아닙니다. 세계주의자이죠. 다만 민족의 가치는 높이 평가하셨죠. 국가주의에 반대하며 다 같이 평화롭게 살자고 하셨어요. 열린 민족주의입니다. 제 생각도 그래요.”
인터뷰를 끝내며 한길사 책 중 최고 명저가 뭔지 물었다. 역시 답은 함석헌 선생 대표작 <뜻으로 본 한국역사>이다. “지금도 이 책을 읽고 있어요. 늘 읽어도 감동입니다. 저는 이 책을 서사시라고 생각해요. 언젠가 대형 판형 애장본으로 만들고 싶어요. 고구려벽화 등 우리 역사에 좋은 이미지들이 많으니 함께 편집해서요. 선생님의 글 모두가 다 시적이죠. 사상 함석헌, 예술 윤이상, 혁명 김원봉 이렇게 영화 3부작을 만들어도 좋겠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2022-12-07>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