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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일본 돈으로 가짜 독립운동 한 일제의 비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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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엄인섭

일본제국주의가 경찰이나 군대 같은 공권력만으로 독립운동진영을 상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백범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가들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개항 도시의 외국인 거주지)에서 주로 활약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 조직은 일본 경찰이나 군대가 접근하기 힘든 곳에 포진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일제는 밀정들의 활약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독립운동가들이 어디에 있든 쉽게 접근해 정보를 빼내기도 하고 조직을 와해시키기도 했다. 밀정은 일제 당국의 비밀 병기였다. 경찰이나 군대가 하기 곤란한 임무들을 이들이 수행했다.

그런 일제의 비밀병기 중 하나가 외형상으로 독립투사였던 엄인섭이다. 그는 독립운동 진영의 핵심 인물이었기 때문에, 밀정이란 의심을 쉽사리 받지 않을 뿐 아니라 고급 정보를 빼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A급 비밀 병기였던 셈이다.

엄인섭이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난 해는 1875년이다. 일본 운요호(운양호)가 해안 측량을 빌미로 강화도에 접근해 함포 사격을 가한 해였다.

어린 시절, 그는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1900년에 중국에서 반(反)제국주의·반외세·반기독교 운동인 의화단운동이 발생하고 영국·러시아·미국·일본 등 8개국 군대가 의화단 진압을 위해 출동했을 때, 25세의 엄인섭은 러시아군에 종군했다. 이 일로 러시아 훈장을 받았다.

25세의 해외 교민이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을 진압하는 데 가담했다.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이 철저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며,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그의 투쟁이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하지 못한 사실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된다. 그는 1904년 러일전쟁에도 참전해 러시아군 통역으로 활약했다. 러시아 편에 서서 일본에 맞서게 된 이 인연이 그 뒤 오랫동안 반일전선에 몸담은 배경으로 보인다.

러시아 내 한국인 지도자 반열에

▲ 엄인섭(사진 오른쪽) 역시 안중근과 함께 단지 동맹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자료사진

반일운동에 뛰어든 이후의 엄인섭은 굵직한 독립투사들과 함께하는 족적을 남겼다. 그래서 주요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서 안중근 의사는 1907년에 고종황제가 폐위되고 군대가 해산된 뒤 자신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간 일을 설명하면서 “그곳에 훌륭한 인물 두 분이 또 있었으니, 하나는 엄인섭이요, 또 한 사람은 김기룡이었다”라고 한 뒤 “나는 그 두 사람과 형제의 의를 맺었다”라고 말한다. 엄인섭은 안중근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서약했다. 그 역시 안중근과 함께 단지 동맹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엄인섭은 항일투사이자 카레이스키(러시아 고려인) 대부인 최재형의 삶에도 등장한다. 박환 수원대 교수의 <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은 “러일전쟁 시 통역으로 참여했던 인물들 가운데 다수가 항일운동을 전개했다”라고 한 뒤 “그중 엄인섭과 유진률은 최재형과 긴밀하게 협조하며 활동했다”라고 말한다.

엄인섭은 저명한 인물들과 함께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신망도 상당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엄인섭 편은 “1910년대 전반 엄인섭은 러시아 연해주 한인들의 자치기관으로 러시아 당국의 공인을 받았던 권업회의 간부로 활약했다”라고 말한다.

그런 뒤 “(1914년) 3월 권업회와 신한촌민회의 통합총회가 열렸을 때 최재형의 후임을 뽑는 회장 선거에서 최다 득표인 31표를 얻었으나, 사퇴함으로써 26표를 얻은 김도여가 회장에 선임되었다”라고 설명한다. 최재형 후임을 뽑는 선거에서 최다 득표를 한 사실은 그가 러시아 내에서 한국인 지도자 반열에 올라 있었음을 의미한다.

엄인섭의 위상은 러시아를 여행한 20대 초반의 만해 한용운에게도 포착됐다. 한용운이 1935년 3월 8일부터 13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북대륙의 하룻밤’에 엄인섭이 등장한다.

이 글에서 한용운은 “그는 노령(露領)에서 생장하여 노국 교육을 받고 군인에 편입되어 다소의 전공이 있으므로 훈장까지 차고 상당한 대우를 받는데, 위인이 표한효용(驃悍驍勇)하고 지기(志氣)가 녹록지 아니하여 노령 거류 조선인 중에는 엄연히 수괴가 되어 있다 한다”라고 설명했다. 위인됨이 사납기도 하고 용맹하고 날쌔기도 하면서 의지 또한 대단해 보인 러시아 한국인의 지도자로 보였던 것이다.

국권 침탈 뒤 일본 밀정으로 변신

그런데 엄인섭은 1910년 국권 침탈 뒤에 일본 밀정으로 변신했다. “1911년 4월경부터 일본 측에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으며, 일본총영사관의 기토 통역관이 엄인섭을 관리했다”라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이 사전에 정리된 그의 첩보 활동은 기가 막힐 정도다. 1911년 9월에는 역사학자 겸 독립투사 신채호가 주필인 <대양보> 인쇄에 사용되는 활자 1만 5천 개를 훔쳐내 일본총영사관에 넘김으로써 <대양보> 발행을 중단시켰다. 또 독립운동 진영에 붙들린 일본 밀정 서영선을 구출했고, 일본 밀정 김기양을 구출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밀정이었던 것이다.

1912년 8월, 한·중 두 민족의 항일운동가 33명이 참여한 둔전영(屯田營)이라는 단체의 창립총회가 있었다. 엄인섭도 블라디보스토크를 대표해 참석했다. 이 단체에 관한 정보 역시 당연히 일본 측에 넘어갔다.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엄인섭은 훗날 임시정부 총리가 될 이동휘에 관한 첩보를 제공해 그 뒤 이동휘가 체포되는 단서를 만들었다.

1917년 5월, 독립운동가 조응순 등이 을사늑약 당시의 주한일본공사였다가 베이징에 주재하고 있던 하야시 곤스케를 암살할 계획을 추진했다. 엄인섭은 조응순이 보낸 서한을 일본총영사관에도 보여줬다. 그런 뒤 일본을 도와 조응순을 저지하는 작전에 뛰어들었다.

1920년 1월 4일, 만주 용정촌으로 수송되던 일제 조선은행 현금 15만 원을 독립투사 최봉설(최계립)·윤준희·한상호 등 6인이 빼앗는 일이 있었다. 이들은 이 돈으로 무기 구입을 물색하다가 1월 31일 조직원 일부가 체포되는 바람에 자금 대부분을 도로 내주고 말았다.

이들이 체포된 것도 엄인섭의 밀고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2000년에 <역사문화연구> 12에 수록된 반병률 한국외대 교수의 논문 ‘간도 15만 원 사건의 재해석’에 따르면, 사건 주역이지만 체포되지 않은 최계립과 1월 31일 체포된 윤준희·한상호가 엄인섭을 밀고자로 지목했다.

이 사건은 엄인섭의 가면을 벗기는 계기가 됐다. 이로써 그의 독립투사 이미지가 벗겨지고 일제 밀정의 본질이 드러났다. 독립운동진영에서 신망을 잃은 그는 러시아혁명을 무산시키기 위해 영국·미국·프랑스와 함께 러시아를 침공했던 일본군이 1922년에 철수할 때 함경북도로 도주하게 됐다.

▲ 15만원 탈취 사건 유적지 ⓒ 위키미디어 공용

일본 자금으로 외형상의 독립운동

그는 독립운동뿐 아니라 밀정 일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위 논문은 “그 뒤 엄인섭은 중국 훈춘으로 왔으나, 가는 곳마다 15만 원 사건 당시 일본 정탐놈이라고 하는 통에 갈 곳도 없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엄인섭은 일본 자금으로 외형상의 독립운동을 했다. 1910년부터 10여 년간의 “일본 정탐놈” 활동은 그가 친일 재산을 축적하게 해주었다. 그는 외형상 명망이 있는 독립운동가인 데다가 밀정 활동에서 굵직한 성과들을 냈기 때문에, 밀정 수행에 대한 금전적 대가도 많았으리라 볼 수 있다. 그런 돈으로 살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독립운동가보다 안정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받아서는 안 되는 돈이었다. 그런 돈으로 벌인 ‘무늬만 독립운동’이었기에 그의 운동은 제대로 된 것일 수 없었다. 그가 참여하는 활동들은 일본총영사관에 보고됐고, 그의 주변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갑자기 체포되곤 했다. 일본 돈으로 수행한 그의 활동은 한국 독립의 가능성을 떨어트리는 가짜 독립운동이었다.

역사는 그를 독립운동가나 반일 활동가 아닌 일본 밀정으로 기억하고 있다. 1956년에 최계립이 만주 옌지(연길)의 현지 포수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엄인섭은 1936년 훈춘에서 자신의 불명예를 한탄하며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

<2022-12-1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일본 돈으로 가짜 독립운동 한 일제의 비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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