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주요한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의 삶은 문학 이외의 공간에서도 활발했다. 1900년 평양에서 출생한 그는 숭덕소학교를 졸업한 1912년에 선교사 겸 목사인 아버지 주공삼을 따라 도쿄로 건너간 뒤 메이지학원 중등부와 도쿄 제1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1919년에 그는 시인이 되어 있었다. 3·1운동 직전인 그해 2월 1일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가신 임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버릴까”, “아아 좀 더 강렬한 정열에 살고 싶다” 등이 담긴 ‘불놀이’를 <창조>에 발표했다.
그의 입당 동기에 관해 1973년 9월 22일 자 <경향신문> 인터뷰 기사 ‘내가 겪은 20세기’ 제58편은 “50년 가을 유엔군의 북진으로 통일의 전망이 확실해지자, 북한 출신 인사들은 이북 지역의 선거에 대비해서 정치 조직을 하기로 결정, 주씨는 조선민주당에 입당했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그곳에서 선전부장과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남한 정부가 북한 전역을 관리하게 될 경우에 대비해 지역구를 다지는 활동을 전쟁 중에 개시했던 것이다.
중국군(중공군)의 반격으로 북한 지역구 마련에 실패한 그는 휴전 이듬해인 1954년 제3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가 당선된 것은 민주당에 들어간 뒤였다. 1958년과 1960년 총선에서 연달아 당선됐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재선 국회의원이 된 1960년에 그는 장면 내각의 부흥부 장관으로 발탁된 데 이어 상공부 장관에도 임명됐다.
위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5·16 쿠데타로 민주당 정권이 전복된 뒤인 1963년에 그는 이 당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민주당에 염증을 느꼈다’, ‘파벌 싸움만 하는 야당에 실망했다’라며 당의 재건에 대한 참여를 거부한 그는 1966년에 박정희 자문기구인 대통령 직속 경제과학심의회의 위원이 되어 장관급 대우를 받았다.
그런 뒤 재계 지도자로 두각을 보였다. 1970년에는 공기업인 대한해운공사 사장이 되고, 1973년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설립한 한국특허협회 회장이 되고, 1975년에는 한국능률협회 회장이 됐다. 박정희 피살 1년 전인 1978년에는 전경련 수석부회장으로 올랐다.
자유당 시절에는 민주당 의원으로, 민주당 시절에는 경제부처 장관으로, 민주공화당 시절에는 공기업 및 전경련 간부로 활동했으니 문학 이외의 삶도 불꽃 튀었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그의 공적 인생에서 전환점이 된 해는 1963년이다. 민주당 정권의 장관이었던 그는 ‘염증을 느꼈다, 실망했다’는 말로 결별을 선언한 뒤 박정희 체제의 경제 분야 지도자로 변신했다. 73세 때 나온 위 인터뷰 기사에서 그는 자신이 사장이 된 뒤 대한해운공사 운임 수입이 32억 원에서 130억으로 배증한 사실을 소개하면서 “이만하면 잘한 셈이지요”라고 만족감을 표했다.
칭찬보다는 욕을 먹기 쉬운 과감한 전향이었다. 그런 전향을 한 뒤에 새로운 진영에서도 불꽃처럼 살아갔다.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버릴까”, “아아 좀 더 강렬한 정열에 살고 싶다”라는 시구를 연상시키는 이런 모습은 그의 일제강점기 삶에서도 나타났다.
변신의 귀재
‘불놀이’를 발표한 19세 청년 주요한은 1919년에 일시 귀국했다가 상하이로 건너갔다. 1993년에 발간된 <친일파 99인> 제3권에 수록된 김윤태 민족문학사연구소 연구원의 기고문 ‘주요한: 대동아공영의 꿈 읊조린 어릿광대’는 “3·1운동 이후 일시 귀국하여 무슨 격문을 돌리다가 그해 여름 중국 상하이로 피신”했다고 말한다.
상하이로 간 그는 여덟 살 많은 춘원 이광수와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을 편집하면서 독립운동에 관한 시들을 발표했다. 1920년에는 도산 안창호가 세운 흥사단에도 가입했다.
귀국한 뒤인 1925년 7월부터 <동아일보> 기자 및 편집국장, <조선일보> 편집국장 및 전무취체역 등을 역임한 그는 흥사단 자매단체인 수양동우회에서 기관지 <동광>을 편집하고 발행했다. 언론 분야에서 독립운동의 최일선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공안 사건인 ‘수양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정반대 사람으로 변신했다. 이광수의 주도 하에 교육자·목사·변호사·의사 등으로 구성된 수양동우회의 이사장이 된 그는 중일전쟁 1개월 전인 1937년 6월 7일 수양동우회 활동 때문에 종로경찰서에 체포됐다. 보석으로 석방된 뒤인 1938년 11월, 전향을 선언하고 서울 남산에 올라가 조선신궁을 참배했다. 이광수와 똑같은 방식의 전향을 선보였던 것이다.
친일파로 전향한 직후, 그는 총독부가 시켰다고 보기 힘든 특이한 행동을 연출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주요한 편은 1938년 12월 그가 “수양동우회를 대표해 종로서에 국방헌금으로 4천 원을 헌납했다”라고 말한다.
1945년 8·15 직전에 서울의 중급 한옥 1칸이 980원 정도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가 낸 금액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자신이 체포된 종로경찰서에 그런 거액을 헌납했다. 입회비를 내듯이 돈부터 내놓고 친일을 했던 것이다.
전향 선언 이후 그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위 사전에 따르면, 전향 선언 바로 다음 달에 경성 부민관(지금의 서울시 의회)에서 열린 시국 좌담회 때 “황군의 필승을 위한 총후(銃後)의 적성(赤誠)에 전력을 바쳐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중일전쟁 승리를 위해 후방에서 붉은 성심을 다하자고 외쳤던 것이다.
그의 변신은 시 쓰기에도 반영됐다. 일례로 1942년 12월 3일 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발표된 ‘성전 찬가’에서는 “아아 위대하다 이 날이여/ 어마어마하다 이 부름이여/ 복되어라 이 생각이여/ 태양의 깃발 앞서는 곳에 / 따르나니 10억의 대동아 겨레와 겨레”라고 읊었다. 그는 이런 시들을 앞세워 한국 청년들을 일본 군대로 몰아넣었다. ‘나쁜 시’를 쓰는 사람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는 ‘불놀이’란 단어를 연상시키는 축사도 썼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7권에 따르면, 그는 1943년 12월 4일과 5일에 조선문인보국회 이사 자격으로 만주에서 거행된 결전예문전국대회에 참가했다. 그는 “우리들은 친애하는 만주제국 5000만 민중들 역시 하루라도 속히 직접 총을 들고 포악한 미·영의 두상에 불의 세례를 내릴 것을 기원해 마지않는 바입니다”라며 불의 세례를 언급했다.
그가 얼마나 확실하게 일본제국주의자로 변신했는가는 창씨개명에서도 느낄 수 있다. 위의 <친일파 99인>은 “주요한의 창씨명은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이다”라며 “고이치란 일본의 조국(肇國) 이념인 팔굉일우(八紘一宇)에서 따온 것임이 너무나 분명하다”라고 말한다. 여덟 방위로 상징되는 전 세계를 일왕(천황)이 주인인 하나의 집으로 만든다는 일본 군국주의 이념을 본떠 창씨개명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친일은 마지못한 친일이 아니었다. 그의 친일은 수익이 발생하는 친일이었다. 해방 뒤에도 그랬던 것처럼, 해방 전에도 그는 기업 활동에 참여했다. 그것이 군국주의와 연계돼 있었다. <친일인명사전>은 “1944년경 주식회사 화신이 안양에 비행기 공장을 짓는 데 관여해 해방될 때까지 이 공장의 운영을 책임졌다”라고 설명한다. 일제 침략전쟁을 군수산업 측면에서도 후원했던 것이다.
그는 대표적 친일파인 박흥식과 함께 비행기 공장을 운영했다. 총독부 관리나 일제 순사가 되어 봉급을 받는 것 이상의 친일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인인 그가 한국전쟁 와중에도 차기 총선에 대비할 수 있었던 이유를 재정적 측면에서 설명해주는 장면이다.
친일을 통해 상당 수준의 친일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던 그는 해방 뒤에는 친일 경력을 무색게 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친일인명사전>은 “1946년 10월 초순 전후 이광수·김대우·계광순·최린 등과 함께 흥사단 국내위원회를 만들어 활동했다”라고 말한다. 8·15 이전의 행적을 개의치 않는 행보를 벌였던 것이다.
1949년 4월 28일, 그는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특경대에 체포됐다. 이광수나 박흥식 같은 대표적 친일파들과 함께 친일 활동을 했고 그들과 함께 친일의 최일선에 있었으니, 반민특위 경찰의 체포를 피할 길은 없었다. 하지만, 그 역시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일반적인 시인이나 문인들과 달리, 주요한의 변신은 과감했다. 해명이 필요한 일들이지만, 그는 그런 것에 구애됨 없이 1938년·1945년·1963년에 인상적인 전향을 단행했다. 1938년 전향과 1945년 전향에는 특히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그는 그에 얽매이지 않고 ‘불놀이’를 이어갔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개인적 기질에도 기인하지만, 그의 불놀이를 끄지 못한 우리 사회에도 원인이 있다. 일제에 부역했던 이들이 해방 이후의 지배층으로 거듭나는 것을 막지 못한 우리 사회의 책임도 적지 않다.
<2022-12-1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어느 유명 시인의 놀라운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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