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노래 함께보기 2]
신흥무관학교의 노래 (2) : 신흥학우단 단가
이명숙 선임연구원·강태구 근대음악 연구가
2017년 연구소에서 발간한 노동은 선생님의 유작 ????항일음악 330곡집????은 올해로 발간 5주년을 맞았다. <항일음악 330곡집>에 다 담지 못했던 항일노래 이야기를 이번 달 ????민족사랑????부터 싣는다. 노래가 만들어지고 불리던 시기의 역사적 사실, 관련 사건이나 단체·인물 등에 관한 내용과 함께 노래가 가진 음악적 특징 등을 소개하려 한다. 노동은 선생님과 편찬 작업을 함께 했던 이명숙 선임연구원과 강태구 근대음악 연구가가 원고 집필을 맡았다. 역사적으로, 음악적으로 더 풍부해진 항일노래를 만나보길 기대한다. – 편집자 주
신흥무관학교의 노래로 소개할 두 번째 곡은 신흥학우단 단가이다. 현재까지 2개의 단가가 전해진다. 신흥학우단은 신흥무관학교가 1911년 6월 개교한 후 약 2년만인 1913년 5월 6일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 신흥강습소에서 ‘신흥교우단(新興校友團)’으로 먼저 창단됐다. 이 같은 사실은 2010년 신흥교우단의 기관지 <신흥교우보> 제2호(1913.9.15.)가 발굴·수집되면서 확인되었다. 이전에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자들의 증언과 <신흥학우보(新興學友報)> 제2권 제2호(1917.1.13.), 제2권 제10호(1918.7.15.)를 통해 ‘신흥학우단’이 독립운동의 조직적 전개와 신흥무관학교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조직돼 활동했다고 알려졌다. 이 세 개의 기관지가 현재까지 전해진 신흥무관학교의 유일한 기록물이다.
<신흥교유보>제2호 <신흥학우보>제2권 제2호 <신흥학우보>제2권 제10호
신흥교우단의 창단과정은 <신흥교우보>에 실린 「신흥교우단 역사의 대개(大槪)」에 간단히 소개되어 있다. 1913년 5월 6일 오후 2시 신흥강습소에서 학생 일동이 모여 장시간 협의 끝에 단 조직을 결정하고 명칭과 규칙 등을 논의·결정한 후 같은 달 두 차례의 임시총회를 개최해 단 규칙과 기관지 <신흥교우보>의 연 4회 발행 등을 결정했다. <신흥교우보> 발간 소식은 미주지역의 한인신문 <신한민보>, <국민보> 등에 보도됐으며, 교우보의 내용 중 중국 지역 동포의 상황과 독립운동 관련 소식 등이 기사화되기도 했다. <신흥교우보> 제6호가 발간됐다는 1914년 12월의 보도 이후 1915년 4월에 학우단으로 명칭을 변경했다는 보도도 <신한민보>에서 확인된다. 교우단의 ‘범위가 한 학교 생도에 지나지 못하여 그 이름을 개정’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교우단 창단 2년여 만인 1915년 상반기에 신흥학우단으로 명칭을 변경한 것이다.
신흥학우단의 조직원 구성과 활동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자 교관을 지냈으며 신흥학우단 총무부장 등을 역임한 원병상(元秉常)의 수기에서도 확인된다. 신흥학우단이 신흥무관학교의 교직원과 졸업생을 정단원으로 하고 재학생을 준단원으로 한 일종의 동창회 성격을 띤 단체로 출발했으며,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에도 군사훈련, 자치·교육활동, 독립정신 고취 활동 등을 이어가고자 조직했다고 한다. 이러한 활동들은 <신흥교우보>·<신흥학우보> 지면에 다양하게 실렸으며, 아울러 국외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한 우리 동포들에게 배포되어 동포들의 독립정신 고취에도 기여했다.
신흥학우단으로의 명칭 변경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신흥교우보>·<신흥학우보>는 전하지 않는다. 1917년 1월 13일자로 발간된 <신흥학우보>에서 신흥학우단으로 변경된 명칭이 확인될 뿐이다. 한편 이 권호에서는 <신흥학우단 단가>를 제정했다는 기사가 있어 주목된다. 「단중기사(團中記事)」 즉 학우단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서 1916년 12월 26일 제10회 정기총회가 열렸음을 알렸고, 이것에 바로 이어 「신흥학우단 단가」를 싣고 있었다. 정기총회에서 신흥학우단의 예결산 의결과 함께 단가를 제정한 사실이 확인된 것이며, 신흥학우단의 정식 단가로 공표했음을 알 수 있다.
<신흥학우보>에 실린 <신흥학우단 단가>
<신흥학우단 단가> (수절가 곡조동)
1 조상의 세우신 녯나라 어듸메뇨
충용한 무리아 그은혜 끗까지 이즈랴
사천춘광 빗나오든 배달 내나라
자유의 낙원을 지을자 우리가 안인가
2 종설음 받으며 실목숨 이여가는
이천만 생령의 인생길 인도할 이 뉘뇨
굳은마음 참된정성 힘을 다하야
썩어진 민족의 새영광 나타내이여라
3 우리의 마음을 연단코 큰힘길너
녯나라 억만년 새기초 공고케 세우세
대천세계 덥고남는 긔운 다하라
보천하 우승의 면류관 길히 빗나도다
신흥교우단·신흥학우단의 설립 목적은 “혁명 대열에 참여하여 대의를 생명으로 삼아 조국 광복을 위해 모교의 정신을 그대로 살려 최후일각까지 투쟁한다.”라고 원병상은 밝혔다. 이 같은 ‘모교의 정신’은 단가 가사에 잘 표현돼 있다. 조상이 세우신 배달나라를 새 영광, 새 기초 위에 세울 이들이 신흥학우단임을 자임하며,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단련하며 힘을 길러 종의 설움 받으며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가는 이천만 동포를 자유의 낙원으로 인도할 것이라 노래했다.
단가의 제목 옆에는 “수절가 곡조 동”이란 글자를 기재해 ‘수절가’ 곡조에 맞춰 부르도록 지정했다. ‘수절가’ 곡조는 확인되지 못하다가 고 노동은 교수에 의해 확인되어 2011년 11월 24일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한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 항일음악회’에서 초연됐다. 학우보의 단가를 처음 접한 노동은 교수는 곡조가 ‘수절가’와 같다는 내용을 근거로 북간도 광성중학교에서 펴낸 <최신창가집>을 살폈고 그 결과 「수절」의 곡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노 교수는 “1910년대 민족진영에서 만들어낸 창가들이 광성중학교의 ‘최신창가집’에 다수 수록되었다는 점에 착안해 일본국회도서관에 소장됐었던 이 책에서 수절가를 찾아내, 가사만 전했던 「신흥학우단 단가」를 복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곡이 미국 작곡가 포스터(Stephen Collins Foster, 1826~1864)의 ‘스와니강(Suwannee River)’과 같은 곡조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라고 했다.
「수절가」
1 뒷동산 저송죽 그절개 지키려고 / 찬서리 쌓인눈 견디어 홀로 푸르렀네
후렴 중한책임 맡은청년 우리학생들 / 곤하고 어려움 참아서 목적을 달하네
2 앞뜰에 접시꽃 충군성 변치않고 / 사나운 동남풍 이기어 태양만 향하네
3 봄날에 저참새 날기를 배우려고 / 약한몸 삭삭이 익혀서 성취를 하였네
4 청천에 백일이 다하면 등밝히고 / 밤과낮 기다리지 말고서 내뜻을 이루세
<최신창가집>의 「수절」 악보와 가사
광성중학교는 1911년 길림성 연길현 국자가(局子街) 소영자(小營子)에 이동휘(李東輝) 등이 설립한 민족학교였고, <최신창가집>은 창가 교과에 사용됐던 음악교재였다. 일제 간도영사관이 압수해 보관하던 것을 발굴한 것이며, 여기에는 1914년 이전의 애국창가 총 152곡이 수록돼 있다. 특히 가사집 형태가 대부분이던 기존 창가집과는 다르게 수록 창가의 모든 악곡을 함께 싣고 있어 사료적 가치도 매우 높은 자료였다. 이 「수절」은 1916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발간된 <애국창가>에 「슈절가」로, <신한민보> 1917년 9월 6일자에는 「국치일노래」로 수록돼 있다. 빼앗긴 나라에 대한 절개를 지킬 것에 대한 가사로, 특히 청년들의 의기와 애국심을 고양하고자 한 노래였다. 이러한 내용이었기에 미국 LA(나성) 지방 국치기념 행사에서도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애국창가>의 「슈절가」·「흙로망향가」
<신한민보>(1917.9.6)의 국치일노래
「신흥학우단 단가」의 선율로 사용된 「스와니강」의 원제는 「고향의 노인들(Old Folks at Home)」이지만 「스와니강」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흑인 노예의 애수가 잘 표현된 이 곡의 가사는 “머나먼 그곳 스와니강물 그리워라”로 시작하며 1인칭 시점으로 작사되었다. 이 곡조와 가사 그대로가 항일노래가 되기도 했는데, 호놀룰루에서 발간한 <애국창가>의 「흑노망향가」가 그것이다. 흑노 즉 흑인 노예가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일제에 나라를 뺏기고 고향을 떠나온 해외동포들이 조국과 부모형제를 그리는 마음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스와니강」의 선율은 「수절(가)」, 「신흥학우단 단가」 외에도 「국치일노래」, 「피묻은 옷」등 여러 항일노래에서 차용됐다. 외국 유명곡의 선율 차용은 앞서 연재했던 「신흥무관학교교가」의 선율 「조지아 행진곡」처럼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 양식이며, 유명 곡을 차용하는 방식이 당시 상당히 유행했음과 함께 유명 곡의 선율이 가진 생명력도 짐작하게 해준다. 작곡가 포스터는 19세기 중반 미국을 대표하는 가곡 작곡가로 20여 년간 약 200곡을 작곡했는데, 작사도 대부분 직접 했다. 선율 대부분은 흑인들의 애환과 향수를 잘 표현하고 있다.
대표적 작품으로 「스와니강」을 비롯해 「오! 수재너(Oh! Susanna)」, 「켄터키 옛집(My old Kentucky Home)」, 「금발의 제니(Jeanie with the light brown hair)」, 「올드 블랙 조(Old Black Joe)」 등이 있다. 「켄터키 옛집」의 선율은 항일노래 「동반도 옛집」의 곡조로도 사용됐다.
다시 신흥무관학교의 노래로 돌아오면, 또 하나의 학우단 단가는 ‘또또따따’로 시작하는 <신흥학우단가>이다. 이 곡의 출처는 1970∼1980년대에 독립군가의 기록과 복원, 보급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노래를 채록해 편찬한 <독립군 가곡집–광복의 메아리>(독립군가보존회, 1982)와 <독립군시가집–배달의 맥박>(독립군시가집편찬위원회, 1984)이다. 저작권 문제로 안타깝게도 <항일음악 330곡집>에 수록할 수 없었다. 당대 생존 신흥 출신자들의 노래를 채보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작곡자를 박은환으로 기재했으나 이 이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신흥학우단가」
1 또또따따 기상나팔 그얼마나 새롭던가 / 조국의얼 맞아드려 절치부심 칼을갈며
광복대업 달성코저 형아제야 금란결맹 / 우리단의 단결일세 우리단의 단결일세
2 우렁차다 군가소리 산붕지절 하였으라 / 한번뛰어 강을건너 한번쳐서 왜적토평
그기세가 장할세라 월탕답화 그기상은 / 우리단의 기백일세 우리단의 기백일세
3 시베리아 요동천리 거침없이 편답할제 / 야수마적 다만나고 만주벌판 설한풍에
갖은고초 다겪어도 일편단심 나라회복 / 우리단의 정신일세 우리단의 정신일세
4 백만적병 무찌르던 을지소문 수범대로 / 포연탄우 화해속에 동정서벌 육탄삼아
구국성인 하신고우 백절불굴 절개로세 / 이것이곧 우리단시 이것이곧 우리단시
전체 4절의 「신흥학우단가」 각 절에서는 학우단의 단결, 기백, 정신, 단시를 노래했다. 1절 첫 소절 ‘또또따따 기상나팔’은 원병상의 수기에서도 확인된다. “새벽 6시에 기상나팔 소리 ‘또-또-따-’ 잠든 생도들의 귓전을 울리면 각 내무반의 생도들은 일제히 일어나 신변 환경을 정리하고 3분 이내에 복장을 단정히 하고, 각반 치고 검사장에 뛰어나가 인원 검사를 받은 다음 보건 체조를 한다.”라며 기상나팔로 시작했던 철저한 군대식 생활방식을 확인케 했다. 학우단의 하루를 시작하는 첫 울림이던 나팔 소리가 1절 첫 소절로 활용된 것이었다.
2절에서는 학우단의 장한 기상과 대단한 기백을 조금은 과장된 표현으로 노래한다. 우렁찬 군가소리는 산붕지절(山崩地折) 즉 산을 무너뜨리고 땅을 꺾을 정도이며, 학우단의 기세와 기백은 한 번 뛰어 강을 건너고 한 번 쳐서 왜적을 평정할 정도라 자랑한다. 3절과 4절에서는 시베리아, 만주벌판에서의 갖은 고초 속에서도 국권 회복에 대한 의지를 피력하고, 우리 역사 속 구국 영웅·성인의 모범과 절개가 곧 학우단의 단시라 했다. 4절 가사에 언급된 ‘우리 단시’는 원병상의 수기에서도 확인된다.
<신흥학우단 단시(團詩)>
(1) 시베리아 요동천리 거침없이 편답할때 / 야수마적 다만나고 만수장림 설한풍에
갖은고초 다겪어도 일편단심 나라위해 / 우리단의 정신일세
(2) 백만적을 무찌르던 을지소문 수범대로 / 포연탄우 불바다속 동정서벌 육탄삼아
구국대성 하신고우 백절불굴 절개로세 / 이것이곳 우리 단시
단시는 「신흥학우단가」의 3, 4절 가사와 거의 같다. 원병상이 신흥학우단의 조직을 설명하면서 강령, 사업, 부서, 임원 등과 함께 제시한 것으로, 총 2연 구성에 4음절의 시구가 반복되는 형태여서 일정한 운율을 띄고 있다. 보통 운율이 있는 시, 후렴이 있거나 정형성이 뚜렷한 시들은 노래로 변용될 가능성이 많다.
예를 들어 <항일음악 330곡집>의 1번 곡인 「거국행」도 <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12일 자에 실린 ‘신도’(新島)의 「거국행(去國行)」에 민족음악가 이상준이 작곡한 「석별」(惜別) 곡조를 부쳐 노래로 불렀던 것이다. 신도는 도산 안창호의 여러 필명 중 하나이다. 안창호가 독립운동을 위해 한반도를 떠나 미주지역으로 가면서 그 심정과 각오를 시로써 <대한매일신보>에 기고했던 것이 항일노래가 된 것이다. 학우단의 단시와 단가 중 무엇이 먼저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같은 내용이 시와 노래라는 다른 형식으로 변용되어 신흥 관계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지금에 이르렀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