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학교이름에 도(道), 방위, 숫자 명칭의 흔적이 성행했던 시절 내선일체 완성을 위한 식민교육제도의 변경이 빚어낸 부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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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88]

학교이름에 도(道), 방위, 숫자 명칭의 흔적이 성행했던 시절
내선일체 완성을 위한 식민교육제도의 변경이 빚어낸 부산물

 

이순우 책임연구원

 

여러 해 전에 박완서(朴婉緖, 1931~2011)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1992)를 아주 흥미롭게 읽다가 일제강점기의 학교생활과 관련한 내용에 눈길이 끌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대목에 따로 책갈피를 꽂아둔 기억이 퍼뜩 떠오른다.

 

(22~23쪽) …… 오빠는 면 소재지에 있는 사년제 소학교를 졸업하고 송도로 가서 이 년을 더 다녀 그때 개정된 학제로 육년 동안의 초등교육을 마쳤다. 숙부들은 다 사년제 소학교만 나왔는데도 마을에서 유일하게 신학문을 한 청년이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오빠가 송도에서 이년 더 배운 걸 굉장한 고학력으로 여기셨다. (60쪽) …… 문안에 있는, 엄마 마음에 드는 학교 중에서 다시 나의 통학거리를 감안해서 골라잡은 학교가 매동국민학교였다. 현저동에서 그 학교엘 가려면 산을 하나 넘어야 했다. 인왕산 자락이었다. 현저동 중턱에서 성터가 남아있는 근처까지 더 올라가면 사직공원으로 통하는 꽤 평탄한 길이 나 있었다. (82쪽) …… 국민학교 입학식은 4월이었다. 나는 또 수단 두루마기를 입고 엄마 손잡고 산을 넘어 학교에 갔다. 점잖은 동네아이들이라 과연 우리 동네 아이들하고는 달라 보였다. 예쁘장하고 깡똥한 양복으로 차려입은 애가 대부분이었다. 학부형은 일주일 동안만 따라오라고 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일제 때의 초등학교는 당초 4년제였다가 6년제로 바뀐 것이라든가 그 당시 입학식을 거행하는 개학시기가 지금과는 달리 4월이었다는 사실도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누군가 괜한 꼬투리를 잡은 것이라고 질책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작가가 선택한 용어는 엄밀하게 말하여 약간의 오류가 있어 보인다.

 

조선교육령의 개정에 따른 보통교육과정(조선인)의 수업연한 변경 추이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의 개정에 따라 종래 4년이었던 보통학교(普通學校)의 수업연한(修業年限)이 6년(단, 토지의 정황에 의해 5년 또는 4년으로 하는 것도 가능)으로 바뀐 것은 1920년 11월 9일의 일이었다. 오빠 되는 이의 나이가 작가보다 열 살 남짓 위라는 얘기가 있음에 비춰보아 대략 이 당시의 상황을 말함인 듯한데, 따라서 이 경우에는 ‘소학교’가 아니라 ‘보통학교’라고 표기하는 쪽이 맞았을 것 같다.
또한 작가는 매동국민학교에 입학한 때의 일도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데, 1938년 4월 1일 이후에는 또 다시 「조선교육령(개정)」에 따라 종래의 ‘보통학교’라는 명칭은 일체 폐지되고 그 자리를 ‘소학교’가 대신하는 상황이 전개되었으므로 이것 역시 ‘매동국민학교’가 아닌 ‘매동소학교’에 입학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 학교가 ‘매동국민학교’로 전환되는 것은 기존의 ‘소학교령’이 ‘국민학교령(國民學校令)’으로 대체되는 1941년 4월 1일 이후에 벌어지는 일이다.

 

<관보> 1895년 7월 28일자에 수록된 ‘소학교 개학 안내광고’이다. 이 당시 학부(學部)에서 게재한 이 광고에는 한성 내에 장동(壯洞), 정동(貞洞), 계동(桂洞), 주동(紬洞) 등 4개 관립소학교의 신설을 알리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하지만 ‘소학교’라는 명칭은 나중에 통감부 시기가 되면서 일체 ‘보통학교’로 개칭되고 말았다.

 

<최근조선사정요람> 제2판(1912)에 수록된 공립어의동보통학교(公立於義洞普通學校) 여자교실의 수업광경이다. 이 학교의 경우 관립양현동보통학교와 관립양사동보통학교를 합쳐 관립어의동보통학교(1907년 6월)가 된 이래 교육제도의 개편에 따라 공립어의동보통학교(1910년 4월) → 어의동공립보통학교(1911년 11월) → 경성효제공립심상소학교(1938년 4월) → 경성효제공립국민학교(1941년 4월)의 순서로 변경된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이는 것은 ‘보통학교’니 ‘소학교’니 ‘국민학교’니 하는 말들은 각각 어떻게 구분되는 용어인가 하는 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개국 504년(즉 1895년) 7월 19일에 칙령 제145호 「소학교령(小學校令)」이 반포되면서 한성부 내에 장동(壯洞), 정동(貞洞), 계동(桂洞), 주동(紬洞) 등 4개의 관립 소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이 당시의 명칭은 글자 그대로 ‘소학교’였다. 그러다가 대한제국 시기에 통감부(統監府)가 들어선 이후 광무 10년(즉 1906년) 8월 27일 칙령 제44호 「보통학교령(普通學校令)」이 새로 제정되면서 학부직할(學部直轄)의 소학교는 일괄 ‘관립보통학교’로 바뀌었으며, 다시 융희 4년(즉 1910년) 3월 11일에는 서울 소재 8개교의 관립보통학교가 공립보통학교로 전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러한 상태에서 경술국치를 맞이하게 되자 ‘식민지 교육정책’의 뼈대로 등장한 것이 이른바 ‘조선교육령’이다. 1911년 8월 23일에 칙령 제229호로 제정된 이 법령(통칭 ‘제1차 조선교육령’)은 제1조에 “조선에 있어서 조선인(朝鮮人)의 교육은 본령(本令)에 의함”이라고 하여 그 대상자가 아예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낸 바 있다. 특히 제2조에는 “교육은 「교육(敎育)에 관한 칙어(勅語)」의 취지에 기초하여 충량(忠良)한 국민(國民)을 육성(育成)하는 것을 본의(本義)로함”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이로써 식민통치자들이 이 땅에서 실현하려고 했던 식민지 교육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노골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조선교육령에 따른 보통교육과정의 학교 구분 (1911년 11월 1일~1938년 3월 31일)

아무튼 이로부터 조선인 학동(學童)에 대한 보통교육은 ‘보통학교’를 거쳐 ‘고등보통학교’ 및 ‘여자고등보통학교’의 과정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정해졌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내지인(內地人)이라고 일컫던 일본인의 자제(子弟)는 자신들의 본국(本國)과 동일한 방식으로 ‘소학교’를 거쳐 ‘중학교’ 및 ‘고등여학교’를 다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조선인은 보통학교, 일본인은 소학교로 정확히 구분되어 있던 것이 그 시절의 규칙이었던 셈이다.
그 사이에 일제의 ‘무단통치(武斷統治)’에 대한 거족적인 저항이 삼일독립만세운동으로 분출되자 이에 대응하는 조치로 등장한 것이 이른바 ‘문화통치(文化統治)’였다. 또한 1922년 2월 4일에 전면 개정된 칙령 제19호 「조선교육령」(통칭 ‘제2차 조선교육령’)은 이러한 변화와 맞물려 그들이 내세운 새로운 식민지 교육정책의 결과물이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종래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했던 구절을 삭제하고 표면적으로 일본인이건 조선인이건 모두 동일한 법령의 적용자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교묘하게도 ‘국어(國語, 일본어)를 상용(常用)하는 자(즉, 일본인)’와 ‘국어를 상용치 아니하는 자(즉, 조선인)’로 구분하여 이를 잣대로 ‘소학교’를 다니는 이와 ‘보통학교’를 다니는 이를 다시 나눴으므로, 결국 이는 종전의 방식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매일신보> 1938년 4월 1일자에는 이른바 ‘내선일체’의 완성을 위한 획기적 시정 혁신으로 조선교육령이 개정되고 기타 미성년금주금연법이 시행되게 되었다는 소식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곁들여 전조선의 공사립 중등학교의 명칭이 일괄 변경된 내역도 함께 소개되고 있다.

<조선일보> 1938년 4월 1일자에 소개된 ‘경기공립중학교’의 새 교문간판 모습이다. 이 학교는 1921년 4월 이후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으나 ‘경성공립중학교’(일본인 학교) 탓에 단순히 ‘경성제일공립중학교’로 변경하는 것이 어려웠으므로 결국 도(道) 단위의 명칭을 끌어들여 ‘경기’로 부르기로 결론지어졌다.

 

이러한 방식의 교육제도가 십수 년간 지속되다가 만주사변(滿洲事變, 1931년)을 거치고 중일전쟁(中日戰爭, 1937년)의 발발을 계기로 시대상황이 급변하게 되자, 1938년 3월 3일에는 칙령 제103호 「조선교육령(전면 개정)」(통칭 ‘제3차 조선교육령’)이 새롭게 공포되기에 이른다. 이 당시는 전시체제기가 막 본격적으로 개시되는 때였으므로 이에 맞춰 무엇보다도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정신을 강조하는 새로운 교육지표가 필요했던 까닭이었다.
이처럼 내선일체의 완성을 위해 새로 바뀐 조선교육령에서는 상투적으로 명기했던 교육의 목적이라든가 하는 구절은 물론이고 ‘국어를 상용하는 자’와 ‘그러하지 아니하는 자’의 구분 자체가 아예 삭제되고, “보통교육은 소학교령, 중학교령 및 고등여학교령에 의함”이라는 정도의 언급만 남아 있었다. 이 말은 곧 식민지 교육제도 전체가 일본의 그것과 완전히 동일하게 운영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따라 이제껏 유지되던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약칭 고보)’, ‘여자고등보통학교(약칭 여고보)’는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는 일본의 학교편제 그대로 ‘(심상)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약칭 고녀)’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교육내용 상에 있어서 종래 근근이 지속되고 있던 조선어(朝鮮語)의 교육시간이 완전히 삭제되거나 대폭 단축되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이러한 내선공학(內鮮共學, 일본인과 조선인이 같은 학교를 함께 다니는 일)의 실시와 학교명칭의 통일이 가시화하자 당장의 현안 과제로 떠오른 것은 새로운 교명(校名)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였다. 가령, 어느 특정 지역에 동일한 지명을 단 조선인 보통학교(또는 고등보통학교)와 일본인 소학교(또는 중학교)가 나란히 존재한다면 이때 동일한 학교명을 지닌 소학교(또는 중학교)가 둘씩이나 등장하게 될 것이므로 서로 충돌되는 이름을 어떻게 조율해야 하는지가 시급한 과제로 등장했던 것이다.

각 유형별 공립중등학교 교명개칭 내역(1938년 4월 1일 시행)

이런 경우에 통상적인 해결책은 ‘제일(第一)’, ‘제이(第二)’ 또는 ‘제삼(第三)’과 같은 숫자를 차례대로 부여하는 방식을 따르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류로는 이미 경성고등보통학교(관립학교 시기)가 있는 상태에서 서울지역에 새로운 고등보통학교가 추가 설립(1921년 4월 18일 관제개정)될 때 신설학교가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가 되고 기존학교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 개칭된 사례가 있고, 또한 ‘경성제이공립고등여학교(1922년 5월 30일 설립 인가)’가 생길 때 기존의 ‘경성공립고등여학교’가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1922년 5월 13일 변경 인가)’로 바뀐 것도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이러한 전례에 따라 1938년 당시에도 평양공립중학교(일본인 학교)는 평양제일공립중학교, 평양공립고등보통학교(조선인 학교)는 평양제이공립중학교, 옛 평양숭실학교(폐교)는 평양제삼공립중학교의 순서로 각각 학교명을 정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서울지역의 경우 일본인 학교인 ‘경성공립중학교’를 ‘경성제일공립중학교’로 변경하자니, 이미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라는 학교명이 존재하고 있던 상태였으므로 이를 그대로 적용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도(道) 단위의 명칭’을 가져오는 방식이었다. 이에 따라 경성공립중학교는 그대로 두고 조선인 학교였던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만 난데 없는 ‘경기공립중학교’가 되고, 동일한 방식으로 ‘경성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도 ‘경기공립고등여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 기존의 ‘경성제이공립고등보통학교’는 경복궁(景福宮)에 인접한 곳에 있다는 것을 빌미로 ‘경복공립중학교’로 개칭되었다. 이밖에 여러 지방에 걸쳐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가 경북공립중학교가 된 것이라든지,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가 경북공립고등여학교가 된것이라든지, 전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가 전북공립고등여학교가 된 것 등이 모두 이러한 유형에 포함된다.

 

<조선일보> 1938년 2월 5일자에는 당초 ‘용산고등보통학교’(사립학교)로 설립신청을 했던 학교가 갑자기 ‘성남고등보통학교’ 라는 교명으로 조율이 된 사연이 소개되어 있다. 이른바 ‘제3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중학교’로 바뀔 것이 예견된 상태에서 기존의 용산중학교(공립학교)와 이름이 겹치게 된다는 것이 그 변경이유였다.

 

이러한 종류의 흔적을 뒤지다 보니, 또 한 가지 ‘성남중학교(城南中學校, 사립학교)’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사례도 눈에 띈다. 이 학교는 당초 서울 이태원 지역에서 ‘용산고등보통학교(가칭)’라는 이름으로 신설인가를 신청중인 상태였는데, 이것이 ‘성남고등보통학교’로 돌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일보> 1938년 2월 5일자에 수록된 「용산고보(龍山高普)를 성남고보(城南高普)로, ‘중학(中學)’ 명목통일(名目統一)을 예상(豫想)」 제하의 기사는 학교 이름이 갑자기 변경된 사유를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원윤수(元胤洙) 씨와 김석원(金錫元) 소좌의 힘으로 73만 원 재단으로 용산고보(龍山高普)를 창립하게 되어 지난달 10일에 그 재단인 원석학원(元錫學園)의 법인인가가 나와서 드디어 오는 4월부터 개교하게 되었다 함은 기보한 바어니와 이 용산고등보통학교라는 교명은 총독부 당국에서 이미 결정된 교육령 대개혁에 의하여 장차 고등보통학교를 중학교로, 보통학교를 소학교로 명칭을 변경할 때를 미리 생각하고 이 용산고보도 애초에 그 교명을 성남고보(城南高普)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지시가 며칠 전 총독부에서 부청을 거쳐 설립자에게 나오게 되어 결국 용산고보는 성남고보라는 교명으로 ‘데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중학교로 통일되는 때에는 현재의 용산중학과 그 교명이 겹치지 않게 된 것이다. 이와 동시 교육령이 개정된 때에 시내 각 고등보통학교와 보통학교의 교명은 제일, 제이를 붙이지 않고 각각 그 지역에 연유하여 용산중학, 성남중학 등과 같이 고쳐질 것이고 보통학교도 대개 각정(各町)의 이름에 따라 수송소학(壽松小學), 청운소학(淸雲小學), 경운소학(慶雲小學) 등으로 고쳐질 모양이다.

 

이것 말고도 또 다른 간편한 작명법으로 성행했던 것은 방위(方位, 동서남북) 표시를 추가하는 방식이었다. 대표적으로 광주공립중학교(일본인 학교)가 광주동공립중학교(약칭 ‘광주동중’)로 되고,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조선인 학교)가 광주서공립중학교(약칭 ‘광주서중’)로 된 것이 바로 그러하다. 그리고 초등학교의 경우에도 하나 문득 생각나는 것은 박정희(朴正熙, 1917~1979)와 관련이 있는 문경공립보통학교의 사례이다.
대구사범학교 출신인 박정희는 1937년 4월에 문경공립보통학교(1912년 3월 8일 설치인가)의 훈도로 부임하여 이곳에서 1940년 2월까지 근무하였는데, 바로 이 시기에 통칭 ‘제3차 조선교육령’이 시행됨에 따라 기존의 보통학교는 폐지되고 일본식 소학교로 일괄 전환되는 상황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의 경우에는 이미 ‘문경공립심상소학교(1915년 4월 9일 설치인가)’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복 명칭을 피하기 위해 이 학교의 새 이름은 ‘문경서부공립심상소학교(聞慶西部公立尋常小學校)’로 정리되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궁금한 것은 소학교 앞에 붙어 있는 ‘심상(尋常)’이라는 말의 뜻 풀이다. 이것은 사전적으로 “대수롭지 않고 예사롭다”는 뜻을 지녔으며, 통상 “사태가 심상찮다”라고 말할 때 일컫는 바로 그 단어이다. 이를 테면, ‘보통’이라는 말에 가장 흡사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조선총독부관보> 1929년 2월 28일자에 수록된 ‘경상남도 지역 장학자금 표창내역(조행선량 학술우수 아동)’이다. 여기에 나열된 명단을 살펴보면, 소학교는 일본인, 보통학교는 조선인이라는 이분법이 거의 예외 없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또한 부산지역의 심상소학교의 경우 학교명을 ‘제일(第一)’에서 ‘제칠(第七)’에 이르는 숫자 방식으로 구성하였다는 사실과 이들 가운데 몇몇 학교는 ‘심상고등소학교’의 명칭을 지녔다는 사실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다.

 

일본 쪽의 학교제도 변천사를 훑어보니, 칙령 제14호로 <소학교령>이 처음 제정 공포된 것이 1886년 4월 9일의 일이었는데, 이 당시부터 “소학교를 나눠 고등(高等)과 심상(尋常)의 이등(二等)으로 함”이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1890년 10월 6일에 전면 개정된 칙령 제215호 <소학교령>에서는 “소학교는 이를 나눠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 수업연한 3개년 또는 4개년) 및 고등소학교(高等小學校; 수업연한 2개년, 3개년 또는 4개년)로 함”이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에 따라 통상적으로는 그냥 ‘소학교’라고 부르지만 학교교문에 걸린 간판에는 “무슨무슨(공립)심상소학교”라는 정식명칭이 기재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에다 ‘고등과(高等科)’ 과정이 병설(倂設)되어 있는 학교의 경우에는 “무슨무슨(공립)심상고등소학교”라고 하는 긴 이름을 갖게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중에 1941년 2월 28일 칙령 제148호에 따라 <국민학교령>(1941년 4월 1일 시행)이 전면 시행될 때는 이것들이 국민학교의 초등과(初等科, 수업연한 6년)와 고등과(高等科, 수업연한 2년)로 각각 변경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듯 학교이름에 도(道) 명칭이나 방위 명칭이나 숫자 명칭 따위가 들어가는 일이 크게 성행했던 것은 바로 1938년 당시 식민지 교육제도의 전면 개정에 따라 ‘보통학교’가 ‘소학교’로, ‘고등보통학교’가 ‘중학교’로, ‘여자고등보통학교’가 ‘고등여학교’로 일시에 통합되는 와중에 서로 충돌되는 이름들을 교통 정리하는 와중에 생겨난 부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돌이켜보면 벌써 오래 전 고교평준화정책이 시행되지 않았던 시절의 일이지만, 전국에서 손꼽히는 난다긴다하는 수재들만 모인다는 일류학교(一流學校)의 대명사였던 ‘경기고’니 ‘경기여고’니 하는 이름들이 알고보니 사실상 일제가 그토록 간절히 추구하고자 했던 내선일체정책의 찌꺼기라는 점에서 참으로 씁쓸하고 묘한 여운을 남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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