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조선의용군 전모, 자료소개 귀국한 관계자 좌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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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소개]

조선의용군 전모, 자료소개

귀국한 관계자 좌담회

1945년 9월 초 옌안(延安) 나가평(羅家坪)을 출발하기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는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 대원과 가족들


출석자 명단
심운(沈雲) 전 조선의용군 제2지대원
이일청(李一淸) 전 조선의용군 선견종대원(先遣縱隊員)
박훈(朴薰) 전 조선의용군 공작반원
고찬보(高贊輔) 전 조선의용군 선전부원


 

① 왜군과 감투(敢鬪), 천하에 용명(勇名)

연안을 중심한 진동남변구(晋東南邊區)를 근거로 하여 팔로군과 함께 포악무쌍한 왜군과 영웅적인 전투를 감행하여 그 용명을 천하에 날린 조선의용군의 존재는 우리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독립동맹이 경성에 특별위원회를 조직하는데 따라 입경한 동맹원 중에는 조선의용군에 적을 두고 분투했던 관계자들이 많다. 본사에서는 이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의용군의 전모를 이야기 들을 기회를 얻었다.
본사 : 조선의용군이 조직된 경로부터 이야기해주시기 바랍니다.
고찬보 : 조선의용군은 1942년 7월 20일 하북(河北)과 산서(山西)의 접경인 진동남변구에서 무정(武亭) 장군의 통솔 아래 결성된 것입니다.
심운 : 이보다 먼저 1938년 10월 10일 황포군관학교의 후신인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300여 명을 중심으로 한구(漢口)에서 조선의용대라는 것을 조직하였습니다. 이것이 한구 함락 직전의 일인데 그 후 정세 변화에 따라 양자강 이북에 있던 제1지대, 이남에 있던 제2지대와 제3지대가 행동을 개시하여 낙양(洛陽)을 향하여 북으로 올라오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1940년 3월에는 전원이 낙양
에 집결하는데 성공했던 것입니다.
고찬보 : 낙양에 집결한 우리는 목적지인 진동남변구를 향하여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낙양서 진동남변구를 가려면 황하를 건너야 하고 이 황하를 천연의 장벽으로 이용하여 엄중한 봉쇄선이 두 겹 세 겹으로 둘러쳐 있으므로 이 봉쇄선을 돌파하기는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불과 500여 리 길을 여섯 달을 걸려 천신만고하여 목적지에 닿았던 것입니다.
심운 : 우리가 이와 같이 강남으로부터 고난의 진군을 한 것은 물론 중대한 정치적 이유와 신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줄이겠습니다.
고찬보 : 낮에는 무기를 분해하여 고리짝에 담아 등에 지고 되도록 숨어서 소모를 피하고 밤에만 전투를 계속하여 행군했습니다. 그래서 겨우 목적지에 도달한 일행은 전부터 황하 이북 각지에서 유격대로서 게릴라전을 계속해온 동지들의 무력집단과 합류했던 것입니다. 이 두 세력이 모태로서 조선의용군이 탄생한 것입니다.
본사 : 그 후의 활동은 어떠했나요?
심운 : 주로 유격전을 계속해 왔습니다. 일본군은 한 지방을 소위 점령한다고 하더라도 점과 선밖에 점령하지 못함으로 우리는 촌락을 유격 근거지로 하여 각지 지대(支隊)를 단위로 싸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서로의 연락은 대단히 어려웠는데 반년 내지 1년씩 서로 연락 없이 독자적 활동을 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본사 : 독립동맹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 있었습니까?
고찬보 : 의용군의 정치지도는 독립동맹이 해왔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의용군은 독립동맹의 활동부대라고 하겠지요.
본사 : 의용군의 이름을 날린 큰 전투는 없었습니까?
고찬보 : 조선의용군만으로 싸운 전투로 역사에 남길 만한 싸움은 호가장(胡家莊) 전투일 것입니다. 이 전투가 어떻게 격렬했고 또 얼마나 영웅적으로 싸웠는지는 쑥스러운 자랑이 아니라 그 변구(邊區)의 소학교 교과서에까지 실려진 것을 보아서 중국인들에게도 큰 감명을 주었던가 봅니다.
본사 : 그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자유신문> 1946.2.11.)

② 혁혁한 호가장(胡家莊) 승리의 기록
고찬보 : 호가장전투의 상세한 모양은 대개 이렇습니다. 1942년 12월 12일 석가장 남쪽 호가장에서 김세광(金世光) 동지가 지휘하는 무장선전대 제2대 40명이 왜군 300여 명에게 완전 포위를 당했습니다. 원체가 선전대인지라 가진 무기라고는 경기관총 1대와 소총뿐이었는데 적군은 중무장을 한 대부대였으므로 실로 비장한 싸움이었습니다. 완전 포위를 당한 채로 새벽녘에 양군은 아주 접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지세가 남쪽으로는 평지가 전개되고 등 뒤인 북편에 높은산이 있었더랍니다. 새벽녘 안개를 이용하여 40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 그야말로 사자와 같이 사나운 기세로 백병전을 한 끝에 한쪽에 겨우 혈로를 터놓고 김세광 대장(隊長)의 임기응변한 지휘로 일동은 등 뒤의 산으로 단숨에 기어올라 집결하기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경기관총을 무사히 끌고 올라갔으므로 이것을 중심 무
기로 하여 쳐올라 오는 적군에게 맹렬한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이일청 : 이편은 원체가 결사적이었던 까닭이었겠지만 지세(地勢)를 얻어가지고 퍼붓는 맹렬한 사격과 불을 뿜는 그 기세에 적은 이편을 상당한 부대를 보고 응원군을 청하기 위하여 일단 물러났는데 그 기회에 완전 탈출을 했던 것입니다.
박훈 : 그 후 유격대의 기습으로 공교롭게도 호가장 전투에 관한 왜놈들의 보고서를 빼서 보게 되었는데 그 보고서에 보면 ‘야수적 전투력을 가진 의용대’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심운 : 그래서 그들은 의용군 전문의 ‘스파이’와 편의대(便衣隊)를 보내어 항상 우리 동정을 살피고 있습니다.
본사 : 그 외에도 큰 전투가 많겠지요?
고찬보 : 1943년 5월에 있었던 왜놈들이 말하는 소위 5월소탕작전이 또한 특기할 큰 싸움이었습니다.
심운 : 이때 왜군은 오랫동안 준비 끝에 비행기 ‘탱크’ 등을 총동원하여 십만의 병력을 가지고 굉장한 규모의 입체전을 전개하며 팔로군의 전군을 포위하여 맹렬한 기세로 대들었습니다.
박훈 : 그래서 의용군은 팔로군의 방침에 따라 정면충돌을 피하고 후방교란을 해가며 퇴각했습니다.

심운 : 그런데 퇴각 도중에 어찌 하다가 팔로군 정치부와 우리 독립동맹 간부들을 중심으로 한 3천여 명의 비무장부대가 왜군에게 발견되어 추격당했던 것이다. 이 급보를 받은 것이 이들과 가장 거리가 가깝게 있던 의용군 부사령 박효삼(朴孝三) 장군이 지휘하는 제2지대의 용사들이었으므로 이들이 즉시 구출, 접전을 착수한 것입니다.
고찬보 : 좌우간 이때에 독립동맹 간부 여러분도 10년은 더 늙었고 김두봉(金枓奉) 선생을 허리를 매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떠밀고 하여 물 한 모금을 못 마시며 바위와 바위 사이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모험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심운 : 3천 명이나 되는 비무장부대, 더구나 부인들이 많이 섞인 정치부원을 중심한 일종의 피난민을 보호해가며 적의 몇 천분의 일도 못 되는 빈약한 무기를 가지고 싸움이란 붓이나 말로는 다할 수 없는 피눈물 나는 처참한 싸움입니다. 더군다나 적은 비행기의 편대를 항상 날리며 사람 하나만이라도 눈에 띄면 폭격과 급강하 기총소사를 잔인하게 퍼부으니 낮에는 행동의 자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전히 야간전투로만 적을 괴롭혔습니다. 의용군의 최후의 힘을 다한 야간백병전이 계속된 끝에 간부들이 총동원하여 간부대를 편성해가지고 칼날 같은 바위 위에다 진을 치고 이리로 적을 유인하여 큰 타격을 주었는데 이때에 적의 약세를 이용하여 일동은 겨우 포위망을 벗어나서 안전지대로 퇴각했던 것입니다.
고찬보 : 바위를 기어오르고 산을 타는 산악전과 야간전투는 왜놈이 도저히 우리를 따르지 못하고 이편의 독단장이었습니다.

심운 : 이 싸움에서 팔로군 참모차장 좌권(左權)과 하운(何雲) 같은 동지가 희생을 당하기는 했어도 많은 간부들이 구출되었지요. 그러나 싸움은 참으로 글자 그대로 악전고투였습니다.
고찬보 : 전투 중에서 해산(解産)을 하는 부인네도 있어 달아나며 탯줄을 끊었고 두 주일 이상씩 소금을 못 먹고서 싸우니 나중에는 퉁퉁 부어 쓰러지는 동지들을 볼 때 눈에서는 피눈물이 났습니다.
심운 : 거름물에다 옥수수를 삶아 씹으며 진수성찬보다 맛있게 먹었지요. 어떤 동지는 팔로군 간부를 업고 정신없이 가다보니 발바닥이 해지고 뼈가 허옇게 나왔더라지요.
(<자유신문> 1946.2.12.)

③ 대중 신뢰는 군민(軍民) 합작에
본사 : 팔로군과 의용군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박훈 : 팔로군의 부사령 팽덕회(彭德懷) 장군은 평시에는 웃지 않기로 유명한데 의용군만 만나면 언제나 만면에 웃음을 띠고 감격에 넘치는 말투로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들과 우리는 완전히 정의(情誼)와 전우애와 동지의 결합으로 뭉쳤습니다.
고찬보 : 왜놈들의 소위 북지 파견군에서는 팔로군 중 385사단은 전부가 우리 의용군으로만 편성된 사단이라고 알아온 모양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고 385사단은 팔로군 중의 가장 정예부대인 유백성(劉伯誠) 장군 휘하의 장병과 조선의용군의 혼성사단입니다. 이 385사단이라면 왜놈들도 머리를 내저었습니다.
본사 : 팔로군과 의용군의 무기는 어떻게 손에 넣습니까?

심운 : 전부가 자급자족입니다. 이것이 생활의 원칙이니까요. 게릴라전의 특색은 기습인고로 적군의 치중(輜重) 부대만을 전문으로 습격하여 무기와 탄환을 많이 빼앗으며 또한 수공업적이나 적의 철도 레일에서 거둬온 쇠로 소규모 공장에서 소총 같은 것은 만들고 고치고 합니다.
박훈 : 왜놈들은 세계 제일의 애국심을 가진 병정이 자기들인 것 같이 말하나 팔로군 지역으로 일본 무기를 대규모로 몰래 팔아먹은 연대장 사단장 놈이 또한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참 많습니다. 좌우간 팔로군과 의용군의 무기는 거의 다 적의 것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고찬보 : 그리고 양식은 스스로 농사를 지어 절대로 자급자족을 합니다. 전투의 여가에는 농사를 짓고 장사하며 대장장이 노릇을 하고 방직공장을 만들어 연안지구(延安地區)가 두겹 세겹으로 봉쇄를 당해도 꿈쩍도 않고 꿋꿋하게 싸운 것입니다.
심운 : 가을 추수 때에는 농민들의 추수를 도와주고 또 틈이 있으면 그들의 무너진 집을 지어줍니다. 잔인한 왜놈들은 팔로군과 내통을 한다 하여 농민의 집을 전부 뒷간 하나만 남겨놓고 헐어버리고 가버리는 것입니다.
고찬보 : 그래서 싸움의 여가에는 그들을 위해서 연극을 하고 연설을 하며 마음껏 위로해줍니다. 그러면 또 농민들은 성심성의로 우리를 접대해주는 데는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군민의 합작이 이렇게 완전무결하게 이루어 나가는데서 팔로군의 힘이 생기는 것이겠지요.
이일청 : 그렇기 때문에 나도 체험해 보았지만 왜군의 교통을 끊기 위하여 도로와 전주를 파괴하는데 5, 60리를 하룻밤 사이에 끊어버리는 것쯤은 보통입니다. 민중이 총동원해서 협력해주는 까닭이지요. 이것 때문에 적의 소위 기동작전이 실패한 일이 많습니다.
박훈 : 그리고 팔로군에게 병사를 내보낸 항일가족에게는 전부 면세해주고 손이 닿는 데까지 보호해줍니다. 의식수준이 얕은 일반농민도 팔로군이 좋은 일을 해주는 군대로 알고 무조건 신뢰하는 것입니다.
심운 : 팔로군이 어느 변구(邊區)로 진군하면 첫째 조사하는 것이 그 지방의 풍속과 습관이고 둘째로 그곳 하층계급의 최저 생활 상태입니다. 그런 다음에 풍속과 습관을 절대로 존중해주는 한편, 일반병사들은 물론 아무리 책임 있는 최고 간부일지라도 그 지방의 최저 생활 정도 이상의 생활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최저 생활의 농민과 똑같은 조밥을 먹고 똑같은 누더기를 입습니다.
고찬보 : 아무리 입으로 훌륭한 말을 해도 그 행동이 말과 다르면 민중은 따라오지 않습니다. 언행이 일치하는 곳에 비로소 민중이 따라오게 된다는 것을 우리도 절실히 느끼고 배웠습니다.
심운 : 그들의 민중공작의 표어는 ‘인심(忍心) 설복(說服) 친절(親切) 화평(和平)’의 여덟 자입니다. 팔로군의 민중공작에는 참으로 머리가 수그려집니다. 좌우간 조선의용군과 독립동맹 간부 여러분도 열이면 열 모두가 위장병의 소유자들입니다. 하루 꼬박꼬박 두 끼의 조밥 혹은 조죽인데 그것도 불규칙하게 먹게되어 자연 위장병이 생길 수밖에요.
(<자유신문> 1946.2.13.)

④ 뛰어오라, 너를 기다린다
본사 : 연안에는 외국인들도 많다는데 그들도 하루 조밥 두 끼로 삽니까?
고찬보 : 연안에는 11개국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안남(安南: 베트남), 인도, 인도네시아 등의 약소 민족을 비롯하여 구미 각국 사람들이 연안에서 각기 일들을 하고 있는데 그들은 참으로 민족이나 국가의 차별없이 한 집안 식구와 같은 단란한 생활을 하고 있어 보기에도 즐거운 국제사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빵과 우유를 상식(常⻝)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역시 빵과 양젖을 대접하고 버터와 잼 같은 것
까지 만들어 공급하고 있습니다.
심운 : 동방반파쇼동맹의 본부가 바로 연안에 있는데 1942년인가 봅니다. 우리 국치기념일인 8월 29일에 연안에 있는 각국 대표가 전부 모여와 태극기로 장식한 간략한 식장을 다채스럽게 하여주고 독립동맹과 의용군을 고무 격려해주었을 때에는 참으로 감격하였고 국제정의가 파시즘을 격멸할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고찬보 : 미국 영국 소련의 신문기자들도 많이 찾아와서 사진과 영화도 꽤 많이 찍어 갔습니다. 이들을 통하여 국제선전을 전개하여 타도일제의 기세를 올렸던 것이다.
본사 : 학병들이 연안으로 많이 탈주했다는데 모두 얼마나 됩니까?
고찬보 : 자세한 수효는 모르나 3천 명의 어느 대대 중에서 150명이 학병이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것이 8·15 이전이니까 현재는 상당한 수효에 달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들이 한 명 혹은 두 명씩 많은 때에는 열 명 스무 명씩 탈주해와 우리와 얼싸안을 때의 감격은 무어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릅니다.
화북(華北)의 어느 곳을 물론하고 왜군이 주둔한 곳에서 조선 이수(里數)로 10리나 20리만 빠져나오면 벌써 의용군과 팔로군의 촉수가 뻗쳐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과한 고생을 하지 않고 무기를 가진 채로 또 어떤 사람은 몹시 고행한 뒤에 우리 쪽으로 빠져나옵니다.
박훈 : 화북 어디를 가나 성벽에는 물론이요, 담벼락이나 판장에 큰 글자로 탈주를 격려하는 우리 글이 큰 글자로 써있습니다. “뛰어오너라 기다린다” “십리만 똑바로 뛰라 우리를 만난다” “조선사람이라고 말만 해라 우리에게 안내해준다” 이런 종류의 큰 글자가 조선의용군의 이름으로 그들을 부르고 있는 것
입니다.
고찬보 : 1945년에 접어들면서 탈주해오는 사람은 거의 다 학병이었습니다. 이들이 탈주할 기회는 대개 세 가지 경우가 있는데 첫째는 기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차에서 뛰어내리는 것이고, 둘째는 토벌대에 섞여 본대에서 멀리 떨어져 나갔다가 대오를 지어 한꺼번에 다수가 탈주해오는 것이고, 셋째는 보초를 보다가 그대로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토벌대로 나갔다가 탈주하는 것이 그중 기회가 많은 까
닭에 “토벌대 슬그머니 빠져 나오시오” 하는 삐라가 많이 붙어 있습니다.
박훈 : 개중에는 몇 번이나 사선을 넘어 탈주한 사람도 있습니다. 왜놈들의 눈을 속여가며 틈틈이 새끼 꼬아 그 새끼를 이어가지고 성벽 위에서 늘어뜨린 다음 몰래 그 줄을 타고 탈주하다가 들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기적적으로 살아온 용사가 있습니다.
본사 : 그와 같이 탈주하여 연안이나 혹은 중경으로 간 용사들을 왜놈들은 뻔뻔하게도 전사(戰死)라고 발표했는데 현재 의용군으로 살아있어 활동하는 탈주 용사들의 성명을 발표하면 좋지 않을까요?

고찬보 : 그들의 가족들이 몹시 궁금해 할 것을 의용군에서도 퍽 걱정하고 성명 발표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아직까지 못한 것 같습니다.
본사 : 하루라도 빨리 발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고찬보 : 저도 잘은 모르겠으나 직접 책임 가진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머지않아 곧 발표 하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유신문> 1946.2.16.)

⑤ 감격했던 봉천의 대행진
본사 : 8·15 이후 조선의용군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고찬보 : 일본 항복의 소식을 듣자 조선의용군은 즉시 연안을 진발(進發)하였습니다. 일부 간부들은 8·15 전에 벌써 열하로 점차 진격을 개시하고 있었으니까요.
이일청 : 지하공작은 열하와 만주에 전면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유명한 우심(牛心) 광산 습격, 성북(城北)광산 파괴사건이 즉 조선의용군 편의대(便衣隊)의 만주 진격의 첫걸음입니다.
고찬보 : 8·15를 당하게 되니 북경, 천진 등지의 중학생들이 모두 의용군으로 몰려오고 그동안 기회만 엿보고 있던 화북 일대의 조선 병사들이 일제히 영창을 깨트리고 의용군으로 달려와 8·15 이후 의용군은 급작스럽게 증가하였습니다.
본사 : 그러면 총세가 상당히 많겠습니다.
고찬보 : 작년 11월 중순에 약 8만가량이었습니다.
본사 : 그들이 전부 화북에 남아 있습니까?

박훈 : 작년 11월 만주까지 왔던 일부가 신의주까지 왔다가 북만 각지 동포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시 만주 각지로 파견되어 갔습니다.
고찬보 : 만주에는 일본 패잔병이 토비(土匪)로 변하여 동포들의 생명 재산을 위협한 일이 많았습니다.
이일청 : 작년 11월 18일 조선의용군 통화현 경비대가 일본 패잔병 300여 명을 무찌른 최대 규모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아주 비적단으로 화해버린 왜군 300명이 산속을 근거로 약탈과 폭행을 마음대로 하고 있는 것을 의용군 100여 명이 불시에 습격하여 30명을 격멸하고 270여 명을 포로로 하였는데 이쪽은 부상자 하나 안 났습니다.
박훈 : 역시 패잔병들이라 심리적으로 벌써 문제가 안 되어 이쪽의 일격에 손을 들어버린 것입니다.
이일청 : 8·15 직전에 산해관(山海關) 근처에서 있었던 전투는 참으로 극적인 전투였죠. 즉 간도에 있는 조선사람으로만 조직 훈련시킨 간도특설부대(間島特設部隊)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부대를 왜놈들이 산해관까지 출동시켜 우리와 싸우게 하였습니다. 만 사흘 동안을 개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맹렬한 전투를 하였는데 차차 진지가 가까워오니 양쪽에서 군호(軍號)하는 것이 다 조선말이란 말이지요. 직감적으로 조선사람끼리라는 것을 알자 양쪽이 일시에 총을 버리고 개천으로 뛰어들어 서로 얼싸안았습니다. 그때의 눈물겨웠던 이야기는 말할 수 없습니다.
박훈 : 그때 간도특설부대 지휘관이 아마 김소좌(여기서의 ‘김소좌’는 김찬규(金燦奎, 개명후 金白一. 1917~1951)로 판단된다. 김찬규는 길림성 용정 출신으로 1937년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1938년 12월 간도특설대 창설시부터 일제 패망 때까지 군관으로 복무했다. 1945년 8월 무장해제시 계급은 만주국군 상위[대위]였다. 김찬규는 간토특설대 간부로서 <친일인명사
전>(2009)에 실렸다.)란 분이지요.
이일청 : 그렇습니다. 그 부대가 바로 우리부대와 함께 금주(錦州)의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화북에서 큰 활약을 하였습니다.
고찬보 : 내가 최근에 가장 감격한 것은 작년 11월 7일 봉천에서 거행한 조선의용군의 행진이었습니다.
이날 10월혁명을 기념하여 적군(赤軍: 소련군), 조선의용군, 중국군, 몽고군, 시민들의 순서로 행진하였는데 가장 질서정연하고 의기가 늠름한 군대는 가장 남루한 의복을 입은 우리 조선의용군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 보기에도 그러했던 모양으로 중국 사람들도 모두칭찬을 해주었습니다.
박훈 : 더구나 우리 동포들은 감격이 지나쳐 박수도 못하고 그냥 멍하니 서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완전무장을 한 1만여 명의 우리 군대가 보무당당하게 승리의 행진을 하는 것을 보고 너무 감격했던 모양입니다.
심운 : 그들의 늠름한 자태를 국내 동포에게 보여줄 때가 언제일지 모르나 우리는 언제나 ‘인심 설복 친절 화평’을 표어로 하는 민중공작에 온갖 힘을 쓸 작정입니다.
본사 : 전연 동감입니다. 바쁘신 시간을 내어 여러 가지 참고될 이야기와 궁금증을 풀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자유신문> 194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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