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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주년 부산항일학생의거를 기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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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주년 부산항일학생의거를 기념하며

이상국 부산동구문화원 전문위원

부산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 출처 <조선부산명소>(1928)

1940년 11월 23일 “제2회 경남학도 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가 부산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에서 부산·경남지역 18개 남녀중등학교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대회는 학생체육대회가 아닌 군사훈련을 모방한 이상한 대회이다 보니 경기규정도 조악했다. 경기종목은 ‘수류탄던지기, 모래운반, 비상소집, 환자 들것 운반, 무장 행군’ 등 15개 종목이었다.
특히 심판관인 일본군 학교배속장교들이 한국인 학교인 동래공립중학교(현 동래중·고등학교)와 부산제2공립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중·고등학교)에 대해 편파적인 경기판정을 일삼아, 일본인 학교인 부산공립중학교(현 부산중·고등학교와 다름)에 우승을 안겨 줬다고 판단한 1천여 명의 한국인 학생들이 폐회식에서 일본인에게 폭행과 폭언으로 경기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또한 의분이 격화된 200여 명의 한국인 학생들은 야간에 대회심판장인 경남지역 학교배속장교 총책임자인 ‘노다이 켄지’(乃臺兼治) 육군대좌[현 대령]의 관사로 몰려가 돌팔매질로 기물을 크게 파손하는 등, 심판 판정에 대한 불만을 물리적으로 토해내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일제는 중일전쟁 등의 침략전쟁을 확대하면서 한국인 학생들에게 식민지교육을 통한 동화정책과 아울러 우민화·황민화 정책을 펼쳐, 향후 한국인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려고 중등학생들에게도 군사 집체훈련을 강화했었다. 그리고 일본제국의 군인으로서 일왕을 위해 영광스러운 목숨 바치기를 세뇌화시켰으며, 애교심을 앞세운 학교 간의 군사훈련 경쟁을 통해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 학생들은 이날의 국방경기대회를 통해 일제 식민정책의 기만성을 깨우침과 동시에 민족차별에 대한 잠재적 저항정신을 불러일으켰다. 일제는 이 사건으로 한국인 학생 15명(동래중학 9명, 부산제2상업 6명)을 ‘폭력행위 등의 죄’로 재판에 회부시켜 징역 8월 등의 실형을 선고했다. 비록 이 사건은 사전 계획된 것이 아닌 돌발적인 폭력사태의 성격은 있었지만, 이후 광복때까지 부산지역 학생·청년세력의 항일운동에 단초가 되어 자생적 비밀결사단체가 끊임없이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는데 큰 의의를 갖는다.

‘시국을 모르는 행동’ 국방경기대회 불상(不祥) 사건에 대하여 경남경찰부장 담. <매일신보> 1940.11.28

과거에는 ‘노다이사건’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지금은 부산항일학생의거로 명명되어 시민·학생들이 매년 11월 23일에 성대히 기념하고 있다. 올해로 82주년을 맞이한 의거는 2015년에 부산시 조례로 ‘부산항일학생의 날’로 제정되었다.
본 의거와 관련하여 정부포상으로는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1명(순국)이 추서되었고, 애족장 7명이 서훈되었다. 같이 옥고를 치른 나머지 독립운동가들은 제외되어 있다가 2019년과 2021년에 대통령표창이 각각 1명씩 추서되었다.
1942년 나의 아버지인 이광우(애족장)를 자발적으로 독립운동(부산 친우회사건)에 투신하게끔 만든 이 의거에 대해 10여 년간을 연구한 나는 올해 부산항일학생의거기념사업회(이사장 금상태)와 함께 나머지 독립유공자 발굴·신청에 나서, 새로이 3명에게 대통령표창이 추서되도록 하였다. 이로써 부산항일학생의거 독립유공 포상자는 모두 13명으로 늘어났다. 모진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분들의 한을 풀
어드림으로써 민족정기선양이라는 큰 과업에 다소나마 보탬이 되었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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