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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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덕수궁

김유 광동지부장

도심 속의 고궁, 그러나 쓰라린 역사를 간직한 곳. 분주한 도시생활 중에 세월의 유장함을 느끼고자 오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알고서 찾는 것일까. 나는 지난주에 우연히 시청 앞에 있는 덕수궁을 가 볼 기회가 있었다. 늦가을의 단풍은 노란색과 붉은 빛이 어우러졌다. 그리고 소나무의 푸른빛도 함께였다. 이제 단풍도 오늘이 지나면 아마도 마지막일 것이다.
서산의 저녁 햇살, 만추의 길목에 서있는 낙엽들의 향연, 단풍을 즐기러 온 사람들 그들 모두는 손마다 카메라를 들고 사라지는 가을을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가을을 즐기러 온 사람들, 그러나 바람에 소소히 날리며 떨어지는 나뭇잎, 하루의 쓰러져가는 황혼 빛에 하나의 왕조가 무너지는 비운의 터임을 알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중에 몇 명이나 될까.
나는 중화문과 이따금 달력의 그림에도 나오는 중화전을 거쳐 석조전의 계단에 앉았다. 여기서 쓰러져가는 왕조를 회상하였다. 연못이 있고 몇 포기 가을 억새가 지는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시성 두보는 쓰러진 왕조를 두고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나라가 무너져도 산과 강은 남아있네).”라고 피눈물을 뿌리며 읊었다. 을사늑약이 맺어진 중명전은 여기서 멀지않다. 고종의 처소인 함녕전은 지척이다.
이곳은 선조가 임진왜란의 전화(戰禍)가 끝나 한양으로 돌아와 즉시 왕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임시로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살던 집을 임시 거처로 삼으면서 ‘정릉동 행궁’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였고 나중에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경운궁이라고 불리었다. 인조가 반정에 성공한 후 왕위에 오른 것도 경운궁이었다.
그는 정국이 안정되면서 창덕궁으로 옮기게 되고 역대의 왕들처럼 그곳에서 정사를 보았다. 경운궁은 이제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것은 2백여 년이 지나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될 때였다. 즉, 조선의 개방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든 상황도 같이 왔다.
‘아관파천’이란 한 나라의 국왕이 신변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그것도 자국 안에서 다른 나라의 공사관으로 피신한 세계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이다. 더구나 세인들을 더욱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 것은 이것이 주도면밀한 ‘작전’ 끝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자기 나라 안에서 자기 궁궐을 나오는데도 그들은 번듯이 나올 수가 없었으며 궁리 끝에 국왕과 세자는 ‘궁녀’로 변장하여 빠져 나왔던것이다.
궁을 벗어나는데 성공하자 그들은 정동에 있는 ‘러시아공사관’을 찾아가서 일신의 안전을 기탁하였다. 1896년 2월이었다. 그로부터 1년 간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정사를 보았다. 그리고 이듬해 2월 러시아공사관에서 나와 가까운 경운궁으로 와서 나라를 다스렸다. 경복궁으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이로서 ‘아관파천’이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어떻게 보면 해괴망측한 이사건은 끝을 보게 되었다. 그가 경운궁으로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관파천이라는 명칭에 문제가 있다. ‘아관(俄館)’이란 중국말이다. ‘러시아’를 중국말로는 아라사(俄羅斯)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로서아(露西亞)라고 하니 ‘아관’보다는 ‘노관(露館)’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파천(播遷)’이란 임금이 전란 중에 도성을 나와 변방으로 피난을 떠난 것을 이르는 말이나 고종은 도성인 서울을 떠난 적이 없다. 도성 내에서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여 외국 공사관에 자신의 안전을 의탁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정확하게 말한다면 ‘노관망명(露館亡命)’이 된다. 아관파천이란 국수주의 일본사람들이 즐겨 일컫는 말이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며 조선과 일본은 서로가 전쟁 중에 있는데 조선이 패퇴하게 되자 왕이 궁궐에서 나와 지방으로 도망쳤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과거사 해석에 입장이 다른 일본이 쓰는 말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서야 되겠는가.
고종에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순종이 1907년 창덕궁으로 거소를 옮기면서부터 이곳을 경운궁 대신 덕수궁으로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구한말의 풍운이 휘몰아친 곳도 여기 경운궁, 아니 덕수궁이었다. 현실 속에 육박해 들어오는 역사의 무게가 그곳에 있었다. 역사는 늘 참여하는 주체들의 지극함으로 움직이고 또 변화해 왔다.
돌아가는 길에 가로수 나무들의 밑동과 가지가 헐벗고 아랫부분만 털실을 걸친 모습은 다시금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떠올리게 하였다. 도심의 불빛이 멀리 보이고 낙엽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졌다. 우리는 식민사관을 말로만 극복하자고 있지나 않은가 하는 우려가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그림자가 되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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