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강제징용 피해자 한국기업 돈으로 보상… 일본은 아무것도 안 해
윤석열 정부가 강제징용(강제동원)과 관련해 그간의 공언을 저버리고 있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민족문제연구소·소송대리인단이 26일 발표한 성명인 ‘한국 정부의 강제동원 문제해결 방안에 대한 피해자 측 입장’은 이렇게 말한다.
2018년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 피해자 측 지원단체와 대리인단은 지난주 외교부 측으로부터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유력한 안을 청취하였습니다. 한국 정부 유력안은 (1)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한국 기업들의 기부를 받아 재원을 마련하여 (2) 일본 기업을 상대로 승소 확정 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변제를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박진 외교부 장관을 비롯한 정부 당국자들은 한국인 피해자들에게 노예노동을 강제한 전범기업들의 성의 표시를 요구하겠다고 공언해 왔다. 박진 장관은 지난 7월 27일 외신기자 간담회 때 “일본 측에서도 이런 노력에 대해 나름대로 상응되는, 그런 성의 있는 호응 조치가 있어야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며 “그런 뜻을 이번에 일본을 방문해 정계 지도자들께 전달해드렸다”라고 발언했다.
강제징용 문제 해결의 요체는 가해자의 사과와 배상이다. 사과·배상을 진심으로 하는 것이 성의 있는 태도이지만, 박 장관이 말하는 성의 표시는 결이 약간 다르다. 전범기업이 사과·배상 책임을 전부 이행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이행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그가 말하는 성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전범기업과 일본 정부를 설득해 그런 성의 표시를 받아내는 한편, 전범기업의 한국 내 자산에 대한 대법원 현금화 절차는 중단시키겠다는 것이 윤석열 정부의 방침이다. 그런데 위 성명에 언급된 상황에 따르면 윤 정부는 성의 표시를 받아내지 못했거나 받아내지 않은 것이 된다.
허무하게 무너지는 대법원 승소 판결
성명은 ‘행정안전부 산하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한국 기업 기부금으로 피해자들에게 변제하는 방안’을 외교부가 제시했다고 말한다. 재단이 전범기업 채무를 인수한 뒤 전범기업의 성의 표시 없이 한국 기업 기부금만으로 피해자에게 변제하는 방안을 내놓은 것이다.
한국 정부가 전범기업의 성의 표시를 받아내는 데 적극적이지 않다는 점은 26일 도쿄에서 거행된 한일 외교부 국장급 협의에 관한 보도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서민정 아시아태평양 국장과 후나코시 다케히로 아시아대양주 국장의 협의를 다룬 언론보도들에서 ‘병존적 채무 인수’ 형식이 또다시 거론됐다.
재단이 전범기업 채무를 인수해 피해자에게 변제할 때 전범기업을 이 구도에 끌어들이려면 ‘면책적 채무 인수’ 방식을 활용해야 한다. 채무자의 동의에 따라 그를 면책시키고 인수인이 채무를 떠안는 이 방식에서는, 채무자인 전범기업이 자신의 잘못을 어느 정도로나마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채무를 지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전범기업의 동의 행위는 자신이 강제징용 가해자임을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
하지만 병존적 채무 인수에서는 기존 채무자의 채무를 그대로 놔두고 인수인이 똑같은 채무를 떠안게 된다. 기존 채무자의 채무에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이 경우에는 채무자가 제3자의 채무 인수에 동의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기존 채무자는 관찰자 입장에 서서 제3자가 자기 채무를 변제해주고 채권자의 권리를 소멸시키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기존 채무자에게 필요한 것은 최소한의 성의 표시가 아니라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리는 최소한의 인내심뿐이다.
외교부가 병존적 채무 인수를 유력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점은 정부가 일본을 상대로 성의 표시를 적극 요구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만약 외교부가 추진 중인 것이 병존적 채무 인수가 아니라면 외교부 당국자들의 적극적 반박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확실히 정해진 것은 없다’는 말만 나올 뿐 그런 반박은 나오지 않고 있다.
강제징용피해자지원재단에 의한 문제 처리 방식은 전범기업들의 성의 표시조차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 외에 또 다른 중대 흠결도 담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재단은 지난 21일 임시이사회에서 ‘피해자 보상 및 변제’를 재단 사업에 추가하는 정관 개정을 의결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승인하면 이 정관 개정은 효력을 갖게 된다.
강제징용과 관련된 보상 및 변제 업무를 추가하는 쪽으로 정관 변경이 추진되는 한편 외교부가 피해자 측에 ‘재단에 의한 변제’ 방식을 제안했다. 이는 피해자에 대한 재단의 금전 지급이 ‘배상’ 형식을 띠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불법 행위에 기인한 금전 지급임을 명확히 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봉합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상 방식으로는 손해 발생 원인이 불법 행위인지 적법 행위인지 명확하지 않다. 불법 행위를 하지 않고도 보상 형식으로 상대방의 손해를 물어줄 때가 있다. 징용 피해자들이 입은 손해가 전범기업의 불법 행위에 기인함을 명확히 하려면 배상 방식에 입각한 금전 지급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도 재단이 ‘피해자 보상 및 변제’만을 추진하는 것은 강제징용의 불법성을 한국 정부가 은폐해주는 결과를 낳는다.
금전 지급 형식을 변제로 하는 것 역시 문제점을 갖고 있다. 피해자와 전범기업의 법적 관계는 단순한 채권·채무 관계가 아니다. 전범기업의 불법행위에는 임금 체불뿐 아니라 노예노동 강요나 한국인 학대 등도 포함된다. ‘변제’는 일반적인 채권·채무를 처리할 때나 어울리는 표현이다. 외교부가 피해자 측을 상대로 ‘변제 방식’를 운운했다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정부 산하인 강제징용피해자지원재단이 미쓰비시나 일본제철의 채무를 인수했다고 선언한 뒤 피해자들에게 금전을 지급한 다음에 채권·채무 관계 소멸을 발표하게 되면 대법원이 강제집행 중인 전범기업 재산을 현금화기 어렵게 된다. 현금화 절차가 중도에 무산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피해자와 대법원은 물론이고 우리 국민이 함께 노력해 얻어낸 2018년 대법원 승소 판결이 허무하게 무너진다. 전범기업과 일본 정부는 성의 표시는 물론이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성의 표시를 관철하겠다는 외교부의 공언과 정반대 상황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일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가 성의 표시를 받아내겠다고 공언하면서도 실상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점은 지난 16일 기시다 후미오 내각이 채택한 안보 문서에 징용 문제가 거론된 데서도 알 수 있다. 일본 정부가 반격 능력을 선언하는 기회에 다소 생뚱맞게도 강제징용에 관한 입장을 천명한 사실이 갖는 의미를 곰곰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시다 내각은 최상위 안보 문서인 <국가안전보장전략>에서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구축해온 일·한의 우호협력관계의 기반에 기초해 일한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한국 측과 긴밀하게 의사소통을 꾀해 나간다”라며 “2국 간의 제반 현안에 관해서는 우리나라의 일관된 입장에 기초해 적절히 대응해 간다”라고 천명했다.
‘2국 간의 제반 현안’은 북한에 맞선 안보협력과 더불어 강제징용·위안부 문제를 지칭한다. 안보협력 문제는 동일한 문단에서 언급됐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제반 현안’은 징용·위안부 문제를 가리킨다.
이런 문제를 ‘일관된 입장’에 기초해 대응하겠다고 선언했다. ‘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다 해결됐다’는 거짓 주장을 계속 밀고 나가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더 이상의 성의표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이 문제가 이미 종결됐다는 일관된 입장을 유지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윤석열 정권의 성의표시 운운에 대해 그런 식으로 대답을 한 셈이다.
그런데 반격 능력이 선언된 날에 우리 외교부 당국자가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일본 정부는 안보 문서를 채택하기 전에 우리 정부에 사전 설명을 했다. 외교부 당국자 역시 한일관계의 긍정적 흐름이 안보 문서에 반영됐다면서 만족감을 표했다.
이는 징용에 관한 언급이 안보 문서에 들어가리라는 것을 외교부가 사전에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일본이 기존의 일관된 입장을 되풀이하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만약 정부가 성의 표시를 받아낼 의지가 있었다면, 그런 문구가 안보 문서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대일교섭을 충실히 했을 것이다. 이는 일본의 성의 표시를 받아내는 일에 대해 윤석열 정부가 성의를 다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지금 윤석열 정부가 해야 할 것은 일본의 성의 표시를 받아내겠다고 국민에게 공언하는 일이 아니다. 윤 정부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해 성의를 표시하는 것이 급선무다. 내가 먼저 성의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남에게 성의를 요구하는 것은 일의 순서가 맞지 않는 일이다.
김종성 기자
<2022-12-27>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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