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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조선총독의 양자’, 악랄함에 비해 덜 알려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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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기옥

오늘날 거론되는 친일파들은 주로 ‘전국구’들이다. 고위 직책에 있었거나 전국적으로 알려졌거나 아니면 서울(경성)이 무대였던 친일파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농업사회에서는 대중의 일상적인 이동 범위가 지금의 시·군·구 정도로 한정돼 있었다. 일본제국주의가 지배한 식민지 한국이 그랬기 때문에, 일제의 지배는 그런 사회 형태에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식민지배를 지방 곳곳에 침투시킬 ‘지역구 친일파’들의 조력이 절실했다.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로 일본에 시장이 개방된 이듬해인 1877년에 출생한 김기옥도 지역구 친일파였다. 그가 태어나고 주로 활동한 곳은 8·15 해방 당시 북위 38도 이북이 대부분이었던 강원도 김화군이다.

주로 김화군에서 친일 행적을 축적한 그가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데 기여한 것이 있다. 그가 조선총독의 양자였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런 인연이 그를 전국적 인물로 만드는 작용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김기옥을 체포했다는 소식을 보도한 1949년 신문 기사들은 그의 양부에 관해 혼선을 드러냈다. 그해 3월 22일 자 <동아일보> 2면 하단 및 <조선일보> 2면 좌상단 기사는 경북에 피신 중인 김기옥이 체포됐다면서 “우리 겨레가 한 시도 잊지도 못할 왜놈 남차랑(南次郞)의 양자”(동아), “우리 겨레가 한 시도 잊지 못할 왜놈 미나미(南次郞)의 양자”라고 그를 지칭했다.

이처럼 3월 22일 자 기사들에서는 제7대 조선총독인 미나미 지로(재임 1936~1942)가 양아버지라고 나왔지만, 4월 9일 자 <동아일보> 2면 좌하단에서는 “총독 우원일성(宇垣一成)의 양자”로 보도됐다.

<동아일보>가 3월 22일의 자사 보도를 수정해 이렇게 표기한 것을 보면, 미나미 지로가 아니라 우가키 가즈시게(재임 1931~1936)가 양부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호적상의 의미든 아니든, 김기옥이 조선총독의 양자였다는 보도는 그가 식민지배기구의 중앙부와의 연계 속에 지방 실력자로 활동한 인물이었음을 알려준다.

▲ 조선총독부 청사 전경. 1926년 경복궁 내에 준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의 모습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총독부의 인정을 받은 친일 지역유지

그는 총독뿐 아니라 일본 극우단체인 동광회와도 인연이 있었다. 이 단체의 조선총지부 평의원으로도 활동했다. 외부세계와의 이 같은 연계 속에서 그는 영리 사업을 하는 동시에 지역 내의 경제·행정·종교 등에 손길을 뻗쳤다.

그가 지역유지로 등장한 시점은 33세 때인 1910년 10월부터다. 그해 8월 29일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한 직후에 고향의 실력자로 모습을 드러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기옥 편을 근거로 1910년 10월 이후 그가 지역 사회에서 역임한 주요 직책을 시간순으로 열거하면, 김화금융조합(농협) 평의원, 동양생명보험㈜ 대리점장, 김화소방조(의용소방대) 부(副)조두, 김화군청 참사, 강원도 도평의회 의원(4선), 김화축산동업조합장, 강원도농회 특별위원, 김화수리조합장, 김화상조회 이사, 김화합동운수조 사장, 김화세무서 소득조사위원, 김화군 학교비 평의회원, 강원식산㈜ 발기인, 김화주조㈜ 취체역(이사) 및 감사, 김화불교청년회 고문, 강원도양곡㈜ 감사역 등이다. 지역 내 곳곳에 그의 손길이 닿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조선군사후원연맹 김화군 지부 고문과 국민총력조선연맹 강원도 지부 평의원 등도 역임했다. 지역 내의 인적·물적 자원을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하는 활동도 병행했던 것이다.

1928년에는 히로히토 일왕(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1935년에는 시정 25주년 기념표창, 1940년에는 기원 2600주년 기념장 등이 그에게 수여됐다. 1915년에는 조선인 시찰단원으로 선발돼 일본에 가서 다이쇼 박람회를 시찰할 기회도 주어졌다. 일본 정부와 총독부의 인정을 받는 친일 지역유지의 전형적 패턴을 밟았던 것이다.

김기옥의 친일은 이익이 많이 생기는 친일이었다. 총독의 양자로 알려진 사실이 자기 명의의 영리 사업은 물론이고 각종 기관장 취임에 어떤 작용을 했을지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1919년부터 1년 넘게 김화군 참사로 근무한 적도 있지만, 금융조합이나 수리조합 등에 근무한 경력이 훨씬 더 큰 이익이 됐으리라는 점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일본의 후원을 받는 가운데 그런 직책들에 취임하고 이를 이용해 지역민들을 군국주의 전쟁으로 내몰았다. 기관장 근무를 비롯한 각종 활동으로 벌어들인 수입이 친일 재산이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그의 친일은 이윤이 발생하는 친일이었다.

그런데 그의 친일이 국권 침탈 이후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일제의 한국 강점이 완성된 1910년 하반기부터 고향에 정착해 친일 활동을 벌였다면, 일제의 한국 침략이 한창 진행되던 1910년 상반기까지는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친일을 했다.

일제가 한국을 향해 돌진할 때는 고향을 떠나 친일하고, 일제가 한국 강점을 완성한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친일했다. 일제의 한국 강점이 일단락된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개인의 기반을 굳히면서 친일을 했던 것이다.

▲ 일본군과 맞서 싸운 의병들. 1907년 경. ⓒ 미상

일본군 의병 학살 작전에 참여

위의 1949년 3월 22일 자 <동아일보> 기사는 김기옥 체포 소식을 전하면서 “김은 일자무식으로 독립군 토벌 공로로써 우리 겨레가 한 시도 잊지도 못할 왜놈 남차랑의 양자가 되어 관선 도회 의원이 되었던 자라고 한다”라고 보도했다.

일자무식이었다는 평은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나온 듯하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을 기준으로 하면 그의 교육 수준은 평균 이상이다. <친일인명사전>은 “서당에서 5년간 한문을 수학했고, 1894년 5월(음력) 부산의 일본 육군조선주차대에서 1년간 일본어를 배웠다”라고 설명한다. 17세 이전에는 서당에서 5년간 수학한 일이 있고, 17세부터 1년간은 동학혁명을 진압하려고 침략한 일본군의 조선 주둔지에서 일본어를 배웠던 것이다.

교통·통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일본보다는 청나라가 훨씬 강하다는 전통적인 인식이 지배하던 시절이다. 그런 시절에 17세의 강원도 청년이 청나라군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일본 군영을 찾아가 일어를 배우고 싶다고 요청했고, 바로 그해에 일본군이 예상을 뒤엎고 청나라군을 꺾으면서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부상했다. 위 <동아일보> 기사의 작성자가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일자무식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1년간 배운 일본어가 평생의 친일 기반이 됐다. 일어를 배운 지 15개월 뒤에 일본군 통역이 됐고, 2년 뒤인 1897년에는 일본공사관 무관의 통역이 됐다. 1899년부터 다시 일본군 통역으로 활동하다가 1910년 2월에는 일본군과 함께 의병 학살 작전에 참여했다.

이렇게 일본 군복을 입고 일제의 한국 침략을 돕던 그는 국권이 완전히 넘어간 직후인 1910년 10월부터는 젊은 지역유지로 변신해 지역 이권을 챙기며 일제의 한국 지배를 도왔다. 친일 인생을 설계하면서 살아갔다는 느낌을 주는 인물이다.

김기옥 같은 친일 유지들은 일제가 지배하는 한반도 전체에 포진해 있었다. 일제가 이들 지방세력의 협력 없이 경찰력과 군대만으로 한국 전역을 지배할 수는 없었다. 그런 면에서 친일 유지들은 일제 지배의 중추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지역 간 교류의 빈도가 지금보다 훨씬 낮았던 그 시절 한국인들이 아는 친일파는 주로 지역유지들일 수밖에 없었다.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이광수나 박흥식 같은 친일파보다는 지역에서 부딪힐 기회가 있는 김기옥 같은 친일파가 일제강점기 대중에게는 훨씬 익숙했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은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까지의 친일청산 노력이 전면적이고 철저하지 못했던 데도 원인이 있다. 김기옥보다 덜 알려져 있지만 일제의 한국 수탈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한 지역 단위 친일파들을 규명하는 것도 친일청산의 과제 중 하나다.

<2022-12-25>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조선총독의 양자’, 악랄함에 비해 덜 알려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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