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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거칠 것 없는 영훈국제중 설립자의 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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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영훈

사또는 그 지역 왕이나 다름없었다. ‘원님 재판’이란 말도 있듯이, 행정뿐 아니라 사법 권한도 갖고 있었다. 경찰권도 있었고 징세권도 있었다. 군수, 세무서장, 법원 지원장, 경찰서장, 검찰 지청장 등을 사또 한 사람이 겸했던 셈이다. 지역 기관장 회의를 따로 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랬던 군수 권한이 약해진 결정적 계기는 일본 침략이다. 1894년에 동학혁명 진압을 빌미로 조선에 침입한 일본이 개혁이란 미명하에 전개한 것이 갑오경장(갑오개혁)이다. 이때부터 군수 권한이 약해졌다는 점이 1995년 <국사관논총> 제64집에 수록된 홍순권 동아대 교수의 논문 ‘일제 시기의 지방통치와 조선인 관리에 관한 일고찰’에 이렇게 설명돼 있다.

“군의 기능과 군수의 권한은 갑오개혁 이후 점차 약화되었다. 갑오개혁 때 서리·향족층의 정리가 있은 다음, 군수로부터 경찰권과 재판권이 분리되었다. (중략) 지방통치제도 자체가 식민지적 성격을 가진 제도로 급격히 변화한 것은 일제의 통감정치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1906년에 이르러서 징세권마저 회수되어 군수의 권한은 크게 약화되고 군 중심의 지방통치 개념은 거의 유명무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가 청일전쟁 시기부터 조선 내정에 간섭해 지방의 독자 권한을 약화시킨 것은 1910년 이후 조선총독부가 조선을 쉽게 장악하는 밑바탕이 됐다. 일본의 점진적 침략 앞에서 중앙의 고종 임금만 약해진 게 아니라 지방 군수들도 함께 약해졌다.

그렇게 변모된 일제강점기 군수들은 일본의 대륙침략을 수행하는 충실한 하부기관으로 거듭났다. 1910년대 무단통치, 1920년대 문화통치, 1930년대 이후 전시체제를 일선에서 진두지휘한 것은 그들이다.

군수 역임만으로도 친일파 증명

▲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김영훈 ⓒ 민족문제연구소

1942년 4월 충남 당진군수가 되고 그해 9월 예산군수가 된 김영훈도 그런 인물이었다. 일본이 한국 본토 강점에 앞서 독도를 강점해 시마네현에 편입한 1905년 2월 22일에 태어난 인물이다. 출생지는 제국주의 이권쟁탈로 유명한 평안북도 운산이다. 이곳은 미국인 모스의 운산금광 개발로 잘 알려져 있다.

3·1운동 3년 후인 1922년 평양고등보통학교(중학교급)를 졸업한 그는 그 뒤 주로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다. 19세 때인 1924년 대구 수창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 훈도가 돼 교원 생활을 시작한 그는 5년 뒤 안동 임하공립보통학교로 옮겨갔다. 그런 다음, 일본 유학을 떠나 26세 때인 1931년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귀국 뒤에는 ‘투잡’을 뛰었다. 일선 학교 교원과 함께, 시학(장학관) 같은 교육 행정관을 겸했다. 또 일본에서 돌아온 뒤에는 활동 무대가 충청남도로 옮겨졌다. 히로시마고등사범 졸업 이후 그의 이력을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영훈 편은 이렇게 정리한다.

“귀국 후, 1931년 4월부터 1937년까지 충청남도 내무부 학무과 시학을 지냈다. 재직 당시 1931년에 공주공립보통학교 훈도를, 1933년에 대전제일공립보통학교 훈도를, 1934년부터 1937년까지 충청남도 내무부 학무과 속(屬)과 대전제일공립보통학교 훈도를 겸했다. 1938년부터 충청남도 내무부 학무과 속을 지냈다.”

1937년부터 학교 훈도와 학무과 시학을 겸했다. 1934년에는 장관급이 임면하는 판임관인 속관 지위가 더해졌고, 1938년부터는 속관 지위만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총독부 및 소속 관서 직원록>에 따르면, 정우택 국회의원의 부친인 정운갑(1913~1985) 전 농림부 장관은 1938년 당시 충남 논산군 권업과의 속관이었다. 1940년 기록에는 권업과 직원으로 표기되지 않고 논산군 속관으로만 나타난다. 그래서 속관 재직 당시의 구체적 직무는 알 수 없다. 김영훈 역시 그런 식으로 1938년부터 속관 지위를 유지하다가 4년 뒤 당진군수와 예산군수로 부임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그가 군수를 역임한 사실만 언급됐을 뿐, 그 기간의 구체적 친일 행위는 설명되지 않았다. 군수를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이 사전에 등재된 것은 아니다. 굳이 친일행위를 거론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일제하 군수들의 활약이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에 의해 약해진 군수들이 제국주의에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군수 역임 사실만으로도 친일파임이 증명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역민 인생 파탄 내는 방식으로 친일

<한국근현대사연구> 2016년 가을호에 수록된 노영종 국가기록원 학예연구관의 논문 ‘일제강점기 노무자원 조사와 충남지역 강제연행’은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충남 지역) 강제연행자 명부에는 약 11만여 명이 등재되어 있다”라며 “1940년 당시 충남 인구(1,536,587)의 7.24%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약 11만이 동원되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것은 군수를 비롯한 충남 지역 기관장들이다. 위 논문에 따르면, 김영훈이 당진군수로 근무한 해인 1942년에 후쿠오카현 오이타광업소에 강제연행된 피해자 원천상은 ‘낯선 사람이 물어볼 게 있다며 어디 좀 가자고 해서 따라갔더니 그곳이 당진군청이었다’고 말한다. 위 논문은 징용 피해자의 연행 방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각 면사무소에 모인 조선인은 군청에 집합되어 군·읍면 직원으로부터 (전범)기업 모집원에게 인계되었다. 이후 각 군에서 대전역을 비롯하여 홍성역·천안역·논산역 및 이리역 등으로 인솔된 후에 기차로 부산이나 여수로 수송되었고, 부관연락선과 여관연락선을 통해 일본·남양군도 등으로 연행되었다.”

김영훈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1931년부터 충남 내무부에 근무하면서 일왕(천황)이 주는 녹봉을 받았다. 그 녹봉은 일왕과 일본 정부가 한국인들을 착취해서 마련한 것이다. 김영훈은 그런 녹봉을 받으며 해방 때까지 14년간 친일재산을 축적했다.

거기다가 1942년부터는 한국인들을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하는 군수 역할을 수행했다. 두들겨 맞으며 억지로 친일을 한 게 아니라 돈을 받으며 적극 부역했고, 자기 한 사람만 망치는 친일을 한 게 아니라 지역민들의 인생을 파탄 내는 방식으로 친일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력은 1945년 8월 15일 이후의 인생에 손톱만큼의 불이익도 주지 않았다. 일선 교직원과 교육행정가를 겸했던 1938년 이전의 패턴이 해방 이후에 재현되면서 그는 교육계 유력자로 부각됐다.

41세 때인 1946년 이후로 그는 한편으로는 대전사범학교 교장, 대전공고 교장, 대전공립중학교 교장을 맡고, 또 한편으로는 충청남도교육회 회장, 대한교육연합회 이사를 역임했다.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친일파 검거 선풍이 일었던 1949년에는 충남교육회 회장에 재선되는 경사를 누렸다.

김영훈의 반민족적·반역사적 이력

▲ 영훈국제중 홈페이지의 ‘학교안내-영훈역사’에는 김영훈의 사진과 함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련 경력이 표시돼 있다. ⓒ 영훈국제중학교

1931년부터 충남에서 활동했던 그는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는 서울로 무대를 옮겼다. 평안도에서 경북으로 내려왔다가 충남으로 서진했던 그가 서울로 북향하게 된 것이다. 1951년에는 서울사대 부속고등학교 교장이 되고, 1956년에는 서울시 초대 교육감에 임명됐다.

교육에 전념하지 않고 정치권력과 연결되는 그의 일제강점기 행적은 해방 이후에도 나타났다. 4·19 혁명 때인 1960년 4월 29일 임기를 6개월 앞둔 상태에서 교육감직 사의를 표명한 사실에서도 나타나듯이, 그가 이끄는 서울시 교육청은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가담했다. 제국주의 침략에 부역했던 그가 이승만 독재에도 부역했던 것이다.

1961년 2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 ‘전 교육감 김영훈씨도 입건’은 “22일 상오 3·15 당시 서울시 교육감이었던 김영훈씨를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 위반 혐의로 입건하였다”라며 “김씨는 3·15를 앞두고 시내 원각사에서 각 학교 직원들을 모아놓고 이승만·이기붕 양인에게 투표하도록 선거운동을 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일본제국주의 부역뿐 아니라 이승만 정권 부역 역시 그의 인생에 지장을 주지 않았다. <친일인명사전>은 “1963년 3월 홍국중고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다 이해 5월 영훈학원을 설립했다”라고 말한 뒤 영훈초등학교 교장, 영훈중학교 교장, 영훈고등학교 교장을 지내다가 1985년 9월 14일 사망했다고 설명한다.

김영훈의 반민족적·반역사적 이력은 그의 사후에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존경과 숭상을 받는 대상으로 남게 됐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지부의 2019년 2월 26일 자 보도자료는 영훈초등학교와 영훈고등학교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사실을 고발한다.

또 영훈국제중학교 홈페이지의 ‘학교안내-영훈역사’에는 그의 사진과 함께,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부 관련 경력이 표시돼 있다. 일제강점기 경력을 가급적 노출시키지 않는 여타 사례와 대조되는 장면이다. 친일파의 이름을 학교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도 이례적이다. 죽어서도 거칠 것 없는 김영훈의 면모를 느끼게 된다.

<2023-01-0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거칠 것 없는 영훈국제중 설립자의 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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