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경험하는 일본 신사와 다크 투어리즘
여행자는 지도와 친해질 수밖에 없다. 서울 여행을 하다 보니 서울 지도를 자주 들여다보곤 한다. 서울은 우리나라의 심장이다. 우리나라 전역에 사람과 물산을 흐르게 하는 펌프다.
이런 서울의 지리적 중심은 어디일까? 지도에서 서울의 한가운데쯤을 눈어림으로 찾아보면 남산이 짚힌다. 남산이 시내 명동에 붙은 데다가 그 정상의 남산 서울타워가 마치 자신이 기준점이라는 듯이 오른팔을 높게 쳐들고 ‘기준!’을 외치고 있는 게 아닌가.
막연히 추정한 것뿐인데 신기하게도 서울의 배꼽이 남산이라고 한다. 서울시에서 2010년 지리정보시스템을를 이용해 서울의 한복판(위도 37˚33´6˝, 경도 126˚59´30˝)이 남산 정상에 있음을 확인하고 서울타워 광장에 중심점 표지돌을 세웠다.
서울에 왔으면 서울의 중심을 가야지. 수도 서울의 한가운데 우뚝 서서 서울을 모든 방향으로 내려다보는 서울의 핵(核) 남산을 일제 또한 결코 허투루 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시절 남산에 신사(神社)가 세워져 수난을 겪었다고 한다. 남산에 있었던 신사 네 곳을 차례로 따라가 보았다.
남산의 신사 탐방로 : (명동역)-경성신사 터-노기신사 터-조선신궁 터-남산서울타워-경성호국신사 터
서울시에서 조성해 놓은 경술국치 탐방길 ‘통감관저 터-조선총독부 터-노기신사 터-경성신사 터-한양공원 비석-조선신궁 터(한양도성유적전시관)(1,7km)’를 참고해 가며 돌아봐도 좋겠다.
서울을 대표하던 신사, 경성신사
경성신사(京城神社) 터로 알려진 숭의여자대학교를 찾아갔다. 평양에 있던 숭의학원이 1938년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당한 후 1954년 서울에서 학교 부지를 물색하다가 경성신사 부지에 학교를 짓기로 한다.
신사참배로 고초를 겪던 처지에서 신사를 직접 허물고 새 시대를 꿈꾸는 주체가 되다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개교 직후 신사 건물을 임시로 사용했다고 한다. 태극기가 걸린 신사 배전 앞에서 학생들이 조회하는 사진이 있어 놀라웠다. 본관 뜰에 신사 건물의 흔적으로 보이는 돌들이 모여 있었다.
경성신사는 명동 일대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에 의해 1898년에 일본의 시조신인 천조대신을 제신으로 삼는 남산대신궁으로 설립되었다가 1915년 경성신사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경성신사는 조선신궁(1925)이 세워지기 전까지 서울을 대표하는 신사로서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제사와 의식을 지내는 최고의 시설이었다.
학교를 나오면서 교정을 되돌아보니 남산을 뒷배로 하고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명동 일대를 굽어보는 산 중턱의 절묘한 자리에 신사를 앉혔다. 신사 참배길이었을법한 계단을 내려와 노기신사로 향했다.
인간에서 군신으로, 노기신사
경성신사에서 채 몇 분 걷지 않아 노기신사(乃木神社)가 있었다는 리라초등학교 뒤편 사회복지법인 남산원에 도착했다. 러일전쟁 당시의 사령관이던 일본인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를 받드는 신사라고 한다. 1952년에 설립되었다는 남산원 옛 건물 세 개동도 서양식이 섞인 일본풍 문화주택이었다.
신사 터에는 신사 입구에 두어 참배객이 손과 입을 씻으며 마음을 가다듬게 하는 물을 담는 석조 테미즈야(手水舎)가 남아 있었다. 앞면은 세심(洗心), 뒷면은 칼 문양과 시주한 사람의 이름과 연도(소화9년, 1934년)가 새겨져 있었다. 뜰에 들어서니 남산 쪽 옹벽에 박힌 이질적인 돌들이 눈에 띄었다. 신사 유구로 추정되는 다듬어진 화강암이 옹벽 보강재로 이용된 것이다. 바닥에도 신사의 상징 도리이(鳥居)로 썼을법한 기둥돌과 기초석이 흩어져 있었다.
일본 군인 노기는 어떻게 신(神)이 되었을까? 러일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장에서 두 아들까지 잃은 전쟁영웅 노기마레스케는 1912년 천황이 죽자 그의 부인과 함께 자결한다. 죽음과 동시에 노기는 군신(軍神)이 되었고 노기를 받드는 신사가 일본 전역에 세워졌다. 노기신사 붐이 경성으로까지 번져 경성신사에 딸린 신사로 현 위치에 세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신사 피라미드의 최고 정점, 조선신궁
조선신궁(朝鮮神宮) 터는 남산의 백범광장에서 한양도성유적전시관에 이르는 넓은 곳이다. 남산자락에서 일명 ‘삼순이계단(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마지막 장면 촬영지)’을 오르면 신궁의 배전 터로 곧장 갈 수 있지만 소파로를 따라 백범광장으로 오르는 계단길로 가보았다. 그 길이 조선신궁으로 가는 동쪽 참배로였다고 한다.
일제가 조선에 세운 1000여 개 신사의 최고 꼭대기에 조선신궁이 있었다. 착공 5년 만인 1925년에 완공했으며 천조대신과 메이지 천황을 제신으로 삼았다. 서울 도성 어디에서라도 올려다 보이는 남산이라는 위압적인 위치에 15개의 건물과 380여 개의 돌계단을 놓으며 위압적인 규모로 지었다. 고도의 식민 지배 테크닉을 공간과 건축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으로부터 신체(神體)를 받아 신사에 앉히는 행사인 진좌제와 봉축행사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부산에서 배로 들여온 신체를 최신문물인 기차에 태워 경성역으로 옮긴 후 봉안차로 거리 행진을 하면서 남산까지 이동시켰다고 한다. 경성역을 그 행사에 맞춰 완공했다고 하니 일제가 얼마나 조선신궁에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옆에 조선신궁 배전 터가 남아있었다. 배전의 유구와 당시 항공사진으로 추정컨대 지금의 방공호 앞이 본전 터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방공호는 유사시에 자기들이 모시는 신물(神物)을 보관하기 위해 그 위치에 조성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서울에도 야스쿠니 신사가 있었다고요?
조선신궁 터를 지나 남산 정상으로 갔다. 남산타워 광장에서 타워 계단을 통해 내려가는 오솔길로 20여 분을 걸으니 용산중학교 뒤편의 ‘108계단’이 나왔다. 평범한 동네 계단으로만 보이는 이곳이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참배로’였다고 한다. 신사는 해체되어 다세대주택들이 들어섰고 계단에는 경사형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경성호국신사(1943년)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호국의 영령으로 추모한다는 명목으로 세워진 신사로서 초혼제와 합사제 등 전사자 추모 행사와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행사가 많이 열렸다고 한다.
후암동 일대는 지금도 일본식 가옥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일제 때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니 신사 하나쯤 있을 법도 하다. 그런데 이름도 생소한 호국신사라고 한다. 전쟁에서 싸우다 전사한 사람들을 ‘호국의 신’으로 모시고 국가 차원의 위령제를 지내는 곳이라? 어디서 들어봄직하지 않은가. 영어권에서 아예 ‘전쟁 신사(War Shrine)’로 호칭한다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기능을 경성호국신사가 담당한 것이다.
오늘날 명실상부한 ‘서울의 지리 중심’ 남산은 조선시대에는 한양도성의 남쪽 경계였다. 남산은 한양도성의 내사산(內四山)의 하나로 한양의 수호산으로 엄격히 관리되었다. 북악산 아래 경복궁에서 바라보면 마주 보이는 산으로서 조선을 흥하게 하는 기운을 보내주는 산이라 여겨 남산을 특히 신성시했다고 한다.
조선왕조가 알아본 남산의 가치를 일제 또한 탐내고 흠집내었다. 남산 산허리를 깎아 조선신궁을 세우고 경복궁에 있었던 조선총독부와 일직선상에 배열함으로써 권력의 축을 완성하고 상징과 위엄으로 군림했다. 서울의 한가운데 꼿꼿이 솟아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다이내믹한 서울 전망을 선사하는 남산에 조선신궁을 비롯해 이름만 들어도 이질 문화요, 침략 통치 수단인 신사가 웬 말인가. 자연도 경관도 식민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을, 남산은 오늘도 증언하고 있었다.
※ 참고자료 :
– 식민도시 경성, 차별에서 파괴까지(서울역사편찬원, 2020)
–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민족문제연구소, 2009)
– 거대한 감옥, 식민지에 살다(강제병합 100년 특별전 도록, 2010)
– 웹페이지 서울특별시 중구청 junggu.seoul.kr
– 가나가와대학(神奈川大学) 해외신사 데이터베이스 himoji.jp/database/db04
※ 찾아가기 :
– 경성신사 터 : (현)숭의여자대학교, 서울 중구 소파로2길 10(예장동)
– 노기신사 터 : (현)남산원, 서울 중구 소파로2길 31(예장동)
– 조선신궁 터 : (현)한양도성유적전시관 옆, 서울 중구 회현동1가 100-267
– 경성호국신사 터 : (현) 용산중학교 뒤 108계단, 서울 용산구 신흥로36길(후암동)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김상희 김자
<2023-01-2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아는 만큼 보인다, 남산에 남은 일제의 잔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