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회 이달의 PD상 수상작 YTN 라디오 ‘경성라듸오’ 제작기
[PD저널=이은지 YTN 라디오 PD] 시작은 ‘노래’였다. 100년 전 한반도를 둘러싸고 지키는 자와 범하는 자들의 전쟁을, ‘오직 소리’로 기록‧재연해보고자 하던, 강박에 가까운 집착증이 지난해 총소리에 이어 노랫소리로 옮겨간 탓이었다. 노래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만난 ‘경성라듸오’는 참으로 기연이었다. 그리고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 아니, 대체 왜 없어?
1927년 2월 16일 낮 1시. “쩨, 오, 띄, 케이 여기는 경성방송국입니다.” 도쿄 JOAK에 이어 오사카 BK, 나고야 CK, 그리고 경성 DK. 식민지 하늘 위로 라디오 전파가 쏘아 올려지던 그 날로부터 6756일, 조선 땅에 높인 볼륨의 정체, 라디오 방송이었다.
부장 노창성, 과장 이혜구. 설립 목적 심전개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이 정성껏 제작한 ‘황국신민화’ 내선일체 교육용 방송. 해방이 되기까지 이어지고 또 이어지던 이 방송은, 종국엔 해방의 소식마저 전해주었다지, 아이러니하게도.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 해설 등 연예 프로그램, 스포츠 경기 중계, 총독부 시국 강연, 라디오 체조, 만담과 대담같은 토크 프로그램과 노래를 배우고 들려주는 음악 방송, 아나운서들이 전해주는 뉴스까지. 자문 학자들과 당시 발행된 신문과 방송 잡지 ‘지우’, 역사 문헌들을 이잡듯 뒤졌다. 마치 보물지도를 보듯, 제작진은 숨겨진 기록들을 찾는 데에 세 개의 계절을 통째로 바쳤다. 일본 현지 취재까지 지리하게 이어진 편성표와 선곡표 조각을 맞추는 작업을 이어갔다. 결론적으로, 문헌으로 확인한 당시 경성라듸오 프로그램 구성과 편성은 현재 라디오 방송과 비교해서도 빠지는 게 없었다.
그런데, 없다. 아무리 뒤져도, 없다. 학자들마저, 역사 자료들을 보관할 법한 기관 관계자들마저 모른단다. 라디오 PD가 논문을 쓸 것도 아닌데, ‘들려줄 자료’들이 단 하나도 없다. 그토록 민족의 귀를 때리던 그 소리가, 사라졌다! 나, 망했….나? 이번 다큐멘터리는 이대로 올스톱인가. 대 to the 난감.
# 귀하게 찾은 드라마 대본과 악보, 그리고… 소리
‘그래, 당시 녹음 기술의 수준을 생각해서 백 번 양보하자. 소리 기록은 남길 수 없었다(일본 내 방송은 소리도, 기록도 남아있다)고 쳐도, 그 흔한 방송 원고 한 장 남아있지 않다고?’
고작 100년이다. 조선왕조 500년 자료도 아니고, 고려, 삼국시대도 아닌, 채 100년이 지나지 않은 역사란 말이다! 언젠가 읽은 중동학자 버나드 루이스가 쓴 책 <100년의 기록> 서문에 ‘사회의 기억상실증’이라는 말이 나온다. 기록의 부재 속에 역사가 단절돼버린 듯한 거대한 벽 앞에서, 딱 이 단어가 떠올랐다, 기억상실증.
턱 막히는 더위만큼이나 갑갑했던 여름. PD가 논문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라 제작 방향에 고민이 깊어지던 그 때. 두 명의 귀인을 만났다. 연구년을 보내기 위해 준비 중이던 서재길 교수를, 출국 전날 극적으로 만났다. ‘경성라듸오’를 연구한 국내 몇 안 되는 학자 중 한 명인 서 교수는 우리에게 귀한 자료를 넘겨주었다. 유치진이 작성한 방송 드라마 대본 ‘룸펜 인텔리.’
그리고 또 한 사람. 근현대음악 전문가 강태구 박사. 그가 개인적으로 평생을 모아온 자료에서 찾아낸 군국가요 악보 몇 장. 여기에 당시 신문 스크랩에서 발견한 ‘경성라듸오’ 선곡표를 비교대조하니 얼추 드라마와 음악 프로그램은 재연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 7전 7기 취재 실패, 민간인으로!
일본 NHK 방송박물관에 가면 음원 자료가 있다고 했다. 일본 내에서 ‘경성라듸오’를 연구한 한인 학자들이 취재 준비 과정을 도왔다. 서신을 띄우고 지인을 통해 전화를 하고 취재계획서와 공문을 보냈으며, 총 일곱 번의 취재 요청 시도가 있었다. ‘기획을 이해할 수 없음,’ ‘자세한 취재 계획이 요구됨,’ ‘다큐멘터리 의도가 명확하지 않음’ 등의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고, 급기야 마지막에는 ‘검토할 시간이 충분치 않음’이라고 회신이 왔다. 한마디로 일제강점기 다큐멘터리는 일본 내 취재불가다.
그래서 어찌되었느냐고? 목화씨를 가져온 문익점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자세한 취재 과정을 공개하진 못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히로히토 일왕의 옥음방송, 1929년 하마구치 수상의 연설, 매일 아침마다 방송됐던 라디오 체조와 콜사인, 아나운서가 전하던 시국 뉴스 등의 실제 라디오 음원을 다큐멘터리에 담았다. 칼 끝에 선 듯 아슬아슬 긴박했던 취재 과정 탓에, 코로나 이후 처음 나간 해외 일정인데 도쿄 시내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는 구경조차 못했다.
# 우리에게도 라디오가 있었다
“임시정부에서 방송하는 것을 우리 아버님이 주로 맡았어요. 아버지가 원고를 써오면 임시정부에 제출하기 전에 내가 철자를 고치기도 하고.” 한국독립당 선전부장과 한국광복군 선전과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의한의 아들 故김자동. 그와의 생전 인터뷰에서 들은 이야기.
“저희 어머니가 목소리가 좋으셨는지, 중국어가 능해서 그랬는지. 충칭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가 운영하는 국제방송국이라는 방송국이 있었는데, 거기서 선전방송을 많이 하셨죠.” 여성광복군 지복영의 아들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의 말.
“미국 와싱턴에서 해내 해외에 산재한 우리 2300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독립의 소식이니 곧 생명의 소식입니다.” 1942년 어느 날, VOA를 통해 울린 이승만 박사의 떨리던 음성.
일제가 한반도 심장에 칼과 같은 소리를 쏘아올렸을 그 시기, 우리 독립군과 광복군, 임시정부의 무기가 되어주던 소리가 있었다.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이 무장봉기를 기획하다가 붙잡혀 들어간 사건이 있어요. 그들을 추적했던 일본 경찰의 기록이, 어떻게 이 학생들이 움직일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단파방송을 수신하고서 정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본 판결문 중에는 조선총독부에 엘리베이터를 전담하는 전기 기사가 있었는데 그게 한국인들이야. 그들이 잠시 위에 올라가서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다가 몽땅 다 잡혀 갔어. 뭘 이야기했냐면 중국에 김구 선생이 어쩌고 저쩌고. 어떻게 알았을까? 이게 다 단파방송…”
“손재주가 좋은 경기고등학교 학생이 있었어요. 손치웅이라는 학생이 단파수신기를 만들었어요. 어느 날 ‘미국의 소리’를 듣게 된 거예요. 여운형 선생은 그 학생을 통해서, 직접 방송을 들어봐요. 그러고서 됐다, 하고서….” 임시정부기념관장 김희곤이 들려준 흥미로운 이야기.
비록 남의 전파였지만, 우리도 라디오가 있었다. 우리도 일제에 맞서 ‘소리’로 싸웠더랬다.
NHK에 했듯, VOA에도 자료 요청을 해봤지만, ‘찾을 수 없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몇 해 전 러시아에서 만난 무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이, 모친이 충칭에서 방송했던 원고 일부를 유실했다는 증언을 들은 바 있으나 그마저도 실물을 본 적은 없다. 기록을 남길 수 없던 시대, 독립운동사 대부분이 그러하듯 남아있는 자료는 전무했다. 아니, 전무한 듯 보였다.
“있어요, 원고.” 한시준 독립기념관장이 말했다. 순간 번갯불이 번쩍이는 것 같았다. 백범 김구 자료 안에 남아있던 원고, 1943년 8월 5일 김규식이 해외에 살고 있는 우리 교포들을 향해 방송한 단파방송 연설 원고. 취재 과정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다.
음원은 남아있지 않아 다큐멘터리 안에서는 김규식의 손녀 김수옥이 대신 연설 원고를 낭독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조국의 독립, 유엔의 승리, 그리고 세계 모든 민족 간의 평화 합의의 확립이라는 더 위대한 목표의 실현을 위한 피 흘림과 희생을 위해 더 조직하고 단합하고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세계 민족과 나라의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믿습니다.”
김희곤 관장에게 “당시 임시정부나 광복군의 단파 라디오 방송은 독립을 염원하던 식민지 조선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요”라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신의 복음과도 같은 소리였죠. 암울했던 시대에 우리 민족에게는 희망의 메시지이고 생명과도 같았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경성라듸오’나 충칭방송이나 VOA를 통해 방송되던 당시 라디오 방송은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세요. “다시는 없어야할 소리.”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역사, 다시는 있어선 안되는 소리. 전쟁의 칼이 되고 선봉장이 되었던 치열했던 소리. 우리는 다시는 없어야할 그 소리를, 잊지 않기 위해 찾아헤맸고 끈질기게 기록했다.
# 다시 노래에 부쳐
“한 6000곡 정도 자료를 정리했고요.” 노래를 찾아가던 길목에서 만난 반혜성 교수의 말.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에서 5년 간 수집한 일제강점기 항일노래가 6천곡이 넘는다고 했다.
그 많던 노래들은 지금 어디로 사라진걸까. 왜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목숨 건 사선에서도 그토록 노래를 불렀던 걸까.
다큐멘터리 2편에서는 처음 시작으로 돌아가 ‘노래’의 흔적을 좇았다. 찾은 노래를, 생존 독립운동가와 그 아들 딸들이 다시 불렀다. 해방을 기도하던, 묵묵히 옳은 길을 가던, 이름없이 스러져간 100년 전 청춘들을 그의 아들 딸들이 모여 곡조로 위로했다. 그렇게 총 다섯 곡이 새롭게 불려졌다.
“이 피디, 이건 말도 안돼. 포기하자.” “나는 바보멍텅구리다, 이 실력으로 무슨 피디질하며 밥 벌어먹냐.” 독립군가 복원 과정은, 18년차 피디와 21년 경력의 작가를 자학의 지름길로 빠지게 했는데, 그 뒷이야기는 추후 시간과 지면이 허락한다면 담기로 하고, 귀인과도 같았던, 뜻을 같이 해주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자이크 작업이었다는 결론으로 갈음한다.
# 기억을 기록한다는 것은
가난했지만 올바르게 살고자 했던 이 민족은, 강탈자에 저항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저항했고 싸웠으며, 집요했던 피의 역사는 그 모든 순간이 고스란히 소리로 남았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았지만 총탄보다 빨랐고, 대포보다 무서운 파괴력을 지녔던 소리.
100년 전 이 땅을 울렸던 소리는 조선이 천황의 속국이 되었음을 세뇌하던 일제의 가혹한 통치 수단이었고 다른 한 편에서는 대한이 살아있음을 끊임없이 알린 신의 나팔수이기도 했다. 해방은 어느날 갑자기 행운처럼 선사된 것이 아니다. 소리에 소리가 덧대어지며 이뤄졌다.
우리는 소리로 치열했던 일제 35년, 전쟁의 한복판을 기록하고 싶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최재형의 후손 발렌틴 최 선생은 2019년 <해간도 연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당시, 생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 후손들의 가장 큰 역할은 기억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기록을 해놓으면 어쩌면 우리 후대에서 뒷일을 감당해주지 않을까요.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전문가 인터뷰 총 155시간. 현장 취재 8개월+α. 독립운동지와 독립운동가 후손들 취재 5년. 발렌틴 최의 말처럼 ‘경성라듸오’의 이 기록이 내일의 기억이 되어주길. 2022년, 100년 전 소리의 흔적을 찾던 개고생의 사계절이 아쉬워 남긴 뒷이야기를 마친다. 이러고선 또 하겠지, 개고생.
이은지 YTN 라디오 PD
<2023-01-25> PD저널
☞기사원문: 100년 전 ‘경성라듸오’ 흔적 찾아 나선 개고생 취재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