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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원봉 같은 영웅이 필요한 시대’… 밀양에 80명 모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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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김원봉과함께-민족문제연구소, “조선혁명선언 100주년, 역사 기행”

▲ ‘약산김원봉과함께’와 민족문제연구소는 1월 28~29일 사이 “조선혁명선언 100주년 기념, 의열단 밀양 역사기행”을 열었다. 황상규 선생 묘소 참배. ⓒ 윤성효
▲ ‘약산김원봉과함께’와 민족문제연구소는 1월 28~29일 사이 “조선혁명선언 100주년 기념, 의열단 밀양 역사기행”을 열었다. 황상규 선생 묘소 참배. ⓒ 윤성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망국의 치욕을 자기들의 피로써 능히 씻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실천했던” 그들을 찾아 나섰다. 약산 김원봉(1893~1958?) 장군을 비롯한 ‘의열단’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경남 밀양에서 열린 “조선혁명선언 100주년 기념, 의열단 밀양 역사 기행”이 그것이다.

지난해 11월 창립한 ‘약산김원봉과함께'(공동대표 김언호 한길사 대표, 서중석 전 성균관대 교수, 안경환 전 서울대 교수)가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와 같이 28~29일 이틀 동안 밀양 곳곳을 누비며 “의열단 정신 계승하자”고 외쳤다.

조선혁명선언은 100년 전인 1923년 1월 28일, 의열단장인 김원봉 장군이 단재 신채호 선생한테 의뢰해 작성되었고, 독립운동의 이념과 함께 ‘민중 경제, 민중 사회를 건설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의열단(義烈團)은 1919년 11월,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김대지, 황상규, 김원봉, 윤세주 등 13명이 만든 항일비밀결사다.

이번 역사기행은 약산김원봉과함께가 창립 후 처음으로 마련한 행사였다. 김언호·서중석·안경환 공동대표뿐만 아니라 임헌영 소장,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을 지낸 송기인 신부(천주교), 양보경 전 성신여대 총장,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 김원봉 평전을 쓴 이원규 소설가, 소설 <쌈짓골> <운심이> 등을 펴낸 김춘복 작가, 헌쇠 박중기(90) 선생이 참여했다.

의열단원의 친인척들도 함께 했다. 김원봉 장군의 오촌조카인 김재현(밀양) 선생과 의열단원인 독립운동가 초산 김상윤 의사의 장손자인 김기봉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부회장도 동행했다. 서울, 부산, 제천, 장흥, 진주, 대구뿐만 아니라 호주 시드니에서 온 참가자를 포함해 모두 80명이 모였다.

김언호 대표는 “약산 김원봉 장군과 관련해 전국 여러 곳에서 모이기는 처음인 것 같다. 그만큼 김원봉과 의열단원의 정신이 대단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독립지사들의 정신을 받아서 공부하고 실천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밀양은 정신의 고장, 사상의 고장, 독립의 고을이라는 걸 다시 실감한다. 근현대사의 독립정신을 온몸으로 보여준 곳이다. 김원봉 장군을 비롯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다”며 “우리가 앞으로 손잡고 해야 할 일이 많다. 역사기행을 보니, 앞으로 같이 할 일들을 좀 더 자신있게 추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서중석 교수는 “처음 행사를 기획할 때는 걱정을 했는데,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게 되어 매우 뜻 깊다”고 말했다.

밀양 출신인 안경환 교수는 “어릴 적부터 약산 선생을 가슴 속에 새기며 살아왔다. 젊은이들도 김원봉 선생과 의열단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고, 그래서 절박한 심정이다”라며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활동하고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차원에서 단체를 창립했고 행사를 한다”고 말했다.

김원봉 장군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김재현 선생은 “지금까지 이런 자리에 공식적으로 나타난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왔다. 이번에 좋은 기회가 되어 반갑다”고, 박중기 선생은 “밀양에 살면서 어릴 때부터 약산 선생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었는데, 여러 사람의 힘으로 다시 영웅을 찾아냈으면 한다”고 말했다.

송기인 신부는 “밀양 땅이 아름답다. 농업 말고 다른 경제적 수입이 없던 시절에 밀양은 가구당 농토가 전국에서 가장 넓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할 때 많은 사람들이 군자금을 냈던 거 아닌가 싶다”며 “독립운동 정신을 살려보자고 나선 걸 보니 감격스럽고 고맙다”고 말했다.

▲ ‘약산김원봉과함께’와 민족문제연구소는 1월 28~29일 사이 “조선혁명선언 100주년 기념, 의열단 밀양 역사기행”을 열었다. 사진 오른쪽부터 서중석 전 성균관대 교수, 안경환 전 서울대 교수, 김언호 한길사 대표, 박중기 선생,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 윤성효
▲ ‘약산김원봉과함께’와 민족문제연구소는 1월 28~29일 사이 “조선혁명선언 100주년 기념, 의열단 밀양 역사기행”을 열었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 뜰에 있는 약산 김원봉 장군의 흉상. ⓒ 윤성효

밀양 곳곳 흔적 .. 영화 <암살> <밀정>으로 관심 높아져

▲ ‘약산김원봉과함께’와 민족문제연구소는 1월 28~29일 사이 “조선혁명선언 100주년 기념, 의열단 밀양 역사기행”을 열었다. 이준설 밀양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사가 황상규 독립운동가의 묘소에서 설명하고 있다. ⓒ 윤성효
▲ ‘약산김원봉과함께’와 민족문제연구소는 1월 28~29일 사이 “조선혁명선언 100주년 기념, 의열단 밀양 역사기행”을 열었다. 석정 윤세주 선생 생가터 표지석. ⓒ 윤성효

참가자들은 밀양 곳곳을 둘러보았다. 독립투사들이 태어났던 생가 터를 비롯해, 묻혀 있는 묘소, 자료를 수집·전시해 놓은 밀양독립운동기념관과 의열기념관, 의열체험관, 김원봉 장군이 독학 수행했거나 해방 후 귀국해 잠시 머물렀던 표충사(요사채) 등을 들렀다.

안내설명을 맡았던 이준설 밀양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사는 “현재까지 정부에서 인정한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는 91명이고, 이는 전국 어느 곳 못지않게 많은 수치”라며 “특히 김원봉 선생의 생가 터에 세워진 의열기념관에서 반경 1km 안에는 29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독립운동가의 밀집도가 높다”고 말했다.

의열기념관은 김원봉 장군의 생가 터에 건립되어 2018년 3월에 문을 열었고, 그 옆에 있는 의열체험관은 지난해 4월 개관했다. 또 밀양에는 전국 시·군보다 앞서 별도 건물로 ‘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다.

김원봉 선생과 이웃에 살았던 윤세주(1900~1942) 선생, 3·1운동을 돕고 의열단원에 많은 영향을 준 전홍표(1869~1929) 선생, 서울에 잠입해 의열투쟁을 전개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7년을 언도 받았던 황상규(1890~1930) 선생, 의열단 활동을 벌인 고인덕(1887~1926) 선생, 무장항일투쟁을 벌인 김대지(1891~1942) 선생,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사건의 폭약 구입 등으로 일경에 잡혔던 윤치형(1893~1968) 선생, 의열단원 김병환(1889~1947) 선생의 생가 터가 밀양에 있다.

1920년 12월 27일에 일어났던 밀양경찰서 투탄의거는 의열단에 의한 최초의 투탄의거로, 의열단원 최수봉 선생이 수행했다. 부산 동래 출신으로 김원봉 의열단장과 1931년에 결혼해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던 박차정(1910~1944) 선생의 묘소도 밀양에 있다. 박차정 선생은 1995년 우리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지만, 김원봉 장군은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한 상태다.

▲ 밀양에 있는 독립운동가 박차정 선생 묘소. ⓒ 약산김원봉과함께

이번 역사기행에 함께 한 김춘복 작가는 박차정 선생이 1928년 동래일신여학교 교지 <일신>에 실었던 시(개구리소래), 소설(철야, 徹夜) 작품을 복사해와 소개하기도 했다. 의열기념관·체험관을 소개한 이준설 학예연구사는 “영화 <암살> <밀정>이 나온 뒤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는 속에 건립할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했다.

▲ ‘약산김원봉과함께’와 민족문제연구소는 1월 28~29일 사이 “조선혁명선언 100주년 기념, 의열단 밀양 역사기행”을 열었다. ⓒ 윤성효
▲ ‘약산김원봉과함께’와 민족문제연구소는 1월 28~29일 사이 “조선혁명선언 100주년 기념, 의열단 밀양 역사기행”을 열었다. 의열기념관을 찾은 김춘복 작가, 박중기 선생 등 참가자들. ⓒ 윤성효

김영범 교수 “김원봉은 ‘뼛속까지 민족주의자'”

기행 첫날 저녁 김영범 교수(대구대)는 밀양시청 강당에서 ‘약산 김원봉의 독립운동과 그 사상’을 주제로 강연했다. 의열단에 대해, 김 교수는 “자료가 빈곤하다. 그것은 다 비밀리에 움직였기 때문이다. 의열단원들이 일경에 체포된 뒤 나온 진술 등을 통해 꿰맞춰 가며 연구를 하고 있어 제대로 진척이 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2000년대 초반에 뉴라이트 쪽에서 의열단을 테러라고 폄하·매도하는 세력들이 나타나면서 부정적 시각이 있어 학자들이 연구를 꺼리는 경향이 있었고, 독립운동 연구가 갈수록 임시정부 중심으로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김원봉 선생은 위대한 독립운동가라고 다들 말을 하고, 이것에 이의를 가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왜 위대하다고 하는지에 대해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느냐”며 “장군은 멈춤이 없는 지사·운동가였다. 저는 그래서 위대하다고 본다. 굉장히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의거가 실패를 해도 좌절하지 않고 계속 가고, 꺾여도 다시 일어섰던 것”이라고 했다.

‘조선혁명선언’에 대해 김 교수는 “올해 100주년이다. 새로운 조선, 이상적인 조선, 민중이 자유로운 사회, 민주적 문화와 경제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며 “20개로 되어 있는 조선혁명당 강령을 보면, 놀랄 정도로 진취적이다. 지금 헌법정신 이상으로 노동, 농민, 여성운동과 복지까지 들어가 있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때 ‘공산당’에 대해, 김 교수는 “당시 레닌주의, 공산주의를 지금의 남북대결 상황 체제의 공산당 개념으로 보면 안 된다. 그때는 얼마든지 취할 수 있는 노선이었고, 제대로 항일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봤던 것”이라고 말했다.

김원봉 선생의 임시정부 참여와 관련해, 김 교수는 “김원봉은 정치를 하더라도 덧셈 정치를 해야 한다고 했다. 하나로 뭉쳐서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규모가 커지는 방향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다”며 “사실이든 아니든 결과로 보면 백범(김구)은 뺄셈의 정치를 한 게 아닌가, 특정 세력만 통합하려고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김원봉에 대해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정치인이 있었는데, 김원봉은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였다. 여러 학자들도 그렇게 평가한다. 김원봉은 민족주의를 떠날 수 없었던 인물이다”고 강조했다.

한편 기행단은 마지막 일정으로,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20여년을 복역했다가 1988년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해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을 출간하고 성공회대학에서 강의했던 고 신영복(1941~2016) 선생의 묘소를 참배했다.

▲ ‘약산김원봉과함께’와 민족문제연구소는 1월 28~29일 사이 “조선혁명선언 100주년 기념, 의열단 밀양 역사기행”을 열었다. 의열기념관. ⓒ 윤성효
▲ ‘약산김원봉과함께’와 민족문제연구소는 1월 28~29일 사이 “조선혁명선언 100주년 기념, 의열단 밀양 역사기행”을 열었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 내부 전시물. ⓒ 윤성효
▲ ‘약산김원봉과함께’와 민족문제연구소는 1월 28~29일 사이 “조선혁명선언 100주년 기념, 의열단 밀양 역사기행”을 열었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 뜰에 조성된 ‘선열의 불꽃’. ⓒ 윤성효
▲ ‘약산김원봉과함께’와 민족문제연구소는 1월 28~29일 사이 “조선혁명선언 100주년 기념, 의열단 밀양 역사기행”을 열었다. ⓒ 약산김원봉과함께

윤성효cjnews

<2023-01-2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김원봉 같은 영웅이 필요한 시대’… 밀양에 80명 모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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