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최린
천도교는 기독교와 함께 3·1운동의 중추 세력이었다.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15명이 천도교인이었다. 16명인 기독교와 쌍벽을 이뤘다. 동학에서 기원한 이 교단의 전국적 조직망이 1919년 만세운동 폭발의 밑바탕으로 작용했다.
그 같은 천도교 3·1운동의 중심에 당시 41세인 민족대표 최린이 있었다. 보성고등보통학교(중학교) 교장인 그는 천도교를 대표해 기독교 대표 함태영과 협의해 만세운동을 조직했다. 문인 최남선에게 독립선언서 집필을 맡긴 것도 그였다.
그의 역할은 일제 법원의 재판 기록에도 나타난다. 국가보훈처의 전신인 원호처가 1972년에 펴낸 <독립운동사 자료집> 제5권에 수록된 재판 기록은 손병희·최린·권동진·오세창이 천도교 만세운동 계획을 수립한 뒤 “그 계획의 실행에 대하여는 최린으로 하여금 담당케” 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그 뒤 최린은 정반대 성향으로 변신했다. 대표적인 제국주의 부역자 중 하나로 우뚝 섰다. 단순히 일본을 돕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일제의 녹봉에 의존하는 생계형 친일파의 모습까지 보여줬다. 민족대표 타이틀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변했던 것이다.
1878년 함경도 함흥에서 출생한 최린은 한학 공부를 거쳐 24세 때인 1902년에 지방 통상 부서인 길주감리서의 주사로 취임했다. 그 뒤 대한제국 유학생이 되어 도쿄부립제일중학교 속성과에 들어가고,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이듬해인 1906년 메이지대학 법과에 입학했다.
3년 뒤 졸업한 그는 국권침탈 직후인 1910년 10월 천도교 제3대 교조인 손병희의 권유로 교단에 입교했다. 이듬해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 등을 지내며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3·1운동 최일선에 서게 됐던 것이다.
만세운동 때문에 1921년 12월까지 감옥에 있었던 그는 출소 직후 전업 종교인으로 변신했다. 1922년 1월 천도교 본부 서무과·교무과 주임이 되고, 종리사·종법사 등을 거쳐 51세 때인 1929년에 교단 지도자인 교령 직에 올랐다. 그로부터 얼마 뒤부터 그의 친일 행각이 본격화됐다. 50대 초중반부터 친일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의 친일은 ‘악명이 높았다’보다는 ‘매우 두껍다’로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전체 25권에 수록된 친일파 숫자는 1006명이다. 이 보고서는 친일파 1명에게 평균 20쪽 미만의 분량을 할애한다. 그런데 최린에게는 91쪽을 배당했다. 그가 일본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보고서 제4-17권 최린 편은 “각종 선전 활동을 통해 일제의 황민화 운동과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고 말한다. 또 “내선일체와 전쟁 협력을 선전·선동하는 다수의 시국강연과 집필 활동을 수행”했다고 설명한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전도하지 않고 ‘일본은 곧 조선’이라는 내선일체 이념을 전도했던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샐러리맨
단순히 일제 이념을 확산시키는 데만 관여한 게 아니었다. 위안부나 강제징용으로 끌려가지 않은 한국 청년들을 강제징병으로 내모는 데도 가담했다. 보고서는 “각종 강연과 기고 활동을 통해 조선 청년의 지원병, 학도병 참가를 독려하는 등 징병제와 지원병 제도를 선전·선동”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자기 자신만 제국주의 부역자가 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교단 지위를 활용해 다른 교인들도 친일로 물들였다. “1937~1945년 현법사(玄法師), 장로 등 천도교 간부를 역임하며 천도교단의 친일화와 천도교인의 전시체제 협력을 주도”했다고 보고서는 평한다. 교단 자체를 일제 부역단체로 만들려는 시도까지 했던 것이다.
’91쪽’이나 필요할 정도로 왕성하게 친일한 그는 명함도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가 친일을 위해 역임한 직책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번잡하다. 몇 개만 열거하면, 중추원 참의, 매일신보사 사장,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위원,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단장, 조선언론보국회 회장, 배영동지회 상담역, 조선유도연합 상임이사 등등이다.
조선’천도’연합이 아니라 조선’유도’연합 상임이사도 역임했다. 일제 침략전쟁에 유림들을 동원하고자 만든 단체에도 가담했던 것이다. 천도교뿐 아니라 유교까지 친일로 물들이려 했던 것이다.
그는 고위 성직자이므로 교단 내에서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제국주의의 녹봉을 받았다. 천도교 최고지도자 반열에 오른 지 5년 뒤부터 이런 일이 있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최린 편은 “1934년 4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칙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1938년 4월 의원면직할 때까지 한 차례 연임하면서 매년 1800원의 수당을 받았다”라고 설명한다.
1938년 10월 11일,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에서 편창제사방직주식회사 직공 노동자 300여 명이 동맹파업을 일으켜 서대문경찰서 경찰 20여 명이 출동하는 사건이 있었다. 노동자들의 핵심 요구사항은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 인상이었다.
이들은 새벽 5시부터 저녁 7시까지 중노동 하는 현실과, 식사 제공에 3원 내지 7원의 월급을 받는 현실 때문에 파업을 일으켰다. 이를 보면, 최린이 받은 중추원 참의 월급 150원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는 1941년에 다시 중추원 참의가 됐고, 이때부터 1945년까지는 연봉 2400원을 받았다. 친일재산을 축적했다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1938~1941년 기간에는 중추원 참의를 지내지 않았다. 이 기간이라고도 해서 그가 일제 녹봉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때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사 사장으로 부역했다. 일본이 주는 월급을 쉼 없이 받았던 것이다. 3·1운동을 조직한 인물이 일본제국주의의 샐러리맨으로 변했던 것이다.
철저한 굴복
최린은 3·1운동 4년 뒤인 1923년부터 자치운동을 모색했다. 현실적으로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의 울타리 내에서 자치를 모색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가 동아일보사의 김성수·송진우 등과 연대한 것도 그들이 자신과 생각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최린을 실망시키는 현상이 1930년대부터 있었다. 서구열강과 협조하며 동아시아를 침략하던 일본이 서구마저 무시한 채 단독으로 독주하는 현상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 도발이 그 시발점이었다.
이는 최린이 자치론을 포기하고 친일파로 변신해 위와 같이 제국주의 밥을 먹고 사는 계기로 작용했다. 일본이 너무 강해져 조선 자치의 실현이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 그를 일본에 대한 굴종으로 몰아간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2018년에 <내일을 여는 역사> 제70호에 게재된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의 기고문 ‘사람이 하늘이냐, 천황이 하늘이냐 – 최동희와 최린’은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군국화되어 가면서 조선에서의 자치 실현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라며 “이에 충격을 받은 최린의 처세는 철저한 굴복 그 자체였다”라고 설명한다.
자치론을 포기한 그는 서양을 적대시하는 인식 체계를 본격화했다. 서양을 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동양권인 한국과 일본을 하나로 묶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위 기고문은 “1933년 12월 최린은 대동방주의를 선언한다”라며 “대동방주의란 동양인의 손으로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며 동양적 낙원을 건설하여 동양 영원의 복리를 창조하자는 이념”이라고 설명한다.
일본이 최강국인 영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와의 대립을 감수하며 중국 침략에 드라이브를 걸던 시점에 최린은 ‘동양인에 의한 동양적 낙원의 건설’을 역설했다. 일본의 독주를 합리화하는 이런 논리로 자신의 변절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위에 열거한 친일 직책 중 하나인 배영동지회 상담역은 영국·미국 등을 악마화하고 배척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친일을 합리화한 인물들에게 안성맞춤인 자리였다.
3·1운동 민족대표의 무게, 천도교 지도자의 무게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일본을 위해 복무하며 꼬박꼬박 월급을 받은 최린의 말년을 <친일인명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세 차례 공판을 받았고, 같은 해 4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1950년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가 1958년 12월 말 평안북도 선천에서 80세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2023-01-29>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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