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서울 거리에 오백 마리의 제주 조랑말이 무더기로 출현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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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 1주년을 막 넘길 무렵, <매일신보> 1938년 7월 15일자에는 「소비절약(消費節約)의 총수(總帥) 마상(馬上)의 미나미 총독(南總督), 자동차(自動車)를 ‘넉아웃’」이라는 제목의 기사 하나가 등장하였다.

시간극복(時艱克服)의 의기에 불타는 미나미(南) 총독은 솔선하여 자동차의 승용을 절감하고 있는데 14일부터는 우천이 아닌 경우에는 언제든지 승마(乘馬)로 퇴청하기로 되었는데 금후 매일 오후에는 총독부 왜성대 관저 간에 말을 달리는 총독의 자태를 보게 될 것이다.

난다 긴다 하는 조선총독이 솔선수범하여 자동차 없이 말을 타고 통근하는 풍경을 연출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제 막 본격화하는 전시체제기 아래 총후보국(銃後報國)과 물자절약, 그 가운데 특히 ‘가솔린(gasoline, 휘발유)’의 부족사태를 이겨내는 방편의 하나로 고안된 결과물이었다. 이에따라 총독부의 관리들은 전차와 도보로 출퇴근을 하고, 총독과 정무총감 역시 승마(乘馬)와 인력거(人力車)를 이용토록 했던 것이다.

이러한 광경은 경복궁 후면에 경무대 총독관저(景武臺 總督官邸)가 완공되어 남산총독관저(南山總督官邸)에서 그곳으로 이사를 마치게 되는 1939년 9월 22일의 시점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렇다고 그 이후에 말 타고 다니는 조선총독이 길거리에 출현하는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는데, 그것은 바로 ‘승마’ 대신 ‘마차’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매일신보> 1940년 4월 29일자에 소개된 미나미 조선총독의 일두마차(一頭馬車) 시운전 장면이다. 전시물자절약, 그 가운데 특히 ‘가솔린’의 부족상황을 극복하는 방안의 하나로 재래식 교통수단인 마차가 공공연하게 서울 거리에 재등장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실제로 <매일신보> 1940년 4월 29일자에 수록된 「미나미 총독(南總督) 태우고 달릴 삽상(颯爽) 일두마차(一頭馬車), 6월부터는 통감부 시대(統監府時代) 재현(????現)」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신록이 우거지는 서울 장안 거리에는 미나미(南) 총독이 타고 다니는 일두마차(一頭馬車)가 삽상 등장하게 되었다. ‘까소린’을 절약하는 의미에서 총독부에서는 벌써 작년부터 도쿄(東京)에 있는 마차제조회사에다 마차를 주문중이더니 약 1주일 전에 마차 두 대가 도착하였으므로 28일부터는 총독부 안 넓은 마당에서 마차의 시운전을 하였다. 빛은 비록 검으나 산뜻한 새 마차는 네 개의 고무바퀴로 스르륵 달리는 품이 ‘크라이슬라’만 못지않은데 늦어도 6월경부터는 거리에 등장하게 될 모양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이 마차는 말발굽소리도 경쾌하게 거리를 달리어 때는 30년 전 자동차 없던 통감부 시대로 되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주게 되었으나 이는 ‘까소린’을 절약하기 위한 총독부의 영단인 만큼 일반에게는 영향도 자못 클 듯……. (사진은 시운전 중의 마차)

이보다 앞서 1939년 9월 23일에는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와 이와테현(岩手縣)에서 각각 들여와 마차를 이끌 세 마리의 말이 도착하여 미나미(南) 총독과 오노(大野) 정무총감이 손수 총독부 청사의 서쪽 마당에서 직접 이들을 구경한 사실도 있었다. 이 시기에는 이미 가솔린을 대체하는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목탄차(木炭車)와 아세틸렌(acetylene) 자동차 따위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결국에 가서는 사람이나 우마(牛馬)의 힘에 기대는 원시적인 동력을 이용한 방법으로 회귀될 수밖에 없었다.

<매일신보> 1941년 9월 3일자에는 휘발유 통제로 인한 대체수단으로 등장한 각종 교통기관이 두루 나열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이른바 ‘후생차(厚生車)’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었던 삼륜거(三輪車, 사이드카를 단세바퀴 자전거)의 모습도 함께 소개되어 있다.
<매일신보> 1938년 3월 13일자에 소개된 목탄(木炭)버스의 모습이다. 이처럼 가솔린 연료를 대체하기 위한 목탄가스차와 아세틸렌차 등이 잇달아 선을 보였으나, 결국에는 사람이나 우마(牛馬)의 힘을 빌리는 교통수단이 되려 크게 확산되었다.
<매일신보> 1941년 6월 5일자에 게재된 합성공작소(合成工作所)의 배급마차(配給馬車) 및 승용마차(乘用馬車) 판매광고이다. 마차를 사용하면 가솔린을 절약하고 애마사상을 함양할 수 있다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는 이른바 ‘후생차(厚生車)’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었던 삼륜거(三輪車, 사이드카를 단 세바퀴 자전거)라든가 승용마차(乘用馬車)와 인력거(人力車) 등이 망라되어 있었다. 여기에다 주요물자의 수송을 담당해야 할 ‘도락쿠(トラック, 트럭)’가 연료부족으로 가동률이 크게 떨어지게 되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은 흥미롭게도 제주도산 조랑말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42년 4월 24일자에 수록된 「서울에 ‘제주(濟州) 조랑말’ 부대(部隊), 선발(先發)로 5백 마리 근일중(近日中)에 도착(到着), 도시운수(都市運????)에 일력(一力)을」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결전필승체제 아래 물자의 수송을 더욱 원활케 하여 총후생활과 도시운수계에 큰 도움이 되게 하고자 전남 제주도의 ‘조랑말’이 전시수송진에 한몫을 보게 되었다. 부내 종로 4정목 경성우마차운반통제조합연합회(京城牛馬車運搬統制組合聯合會)에서는 전시 아래 도시의 수송 신속과 수송의 만전을 기하고자 수송자재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하던 중 우선 제주도의 ‘조랑말’을 구입하여다 부내 각 우마차조합에 나눠줄 계획을 세우고 전남도청과 누차 구입에 대하여 절충중 이즈음 전남도에서도 쾌히 승낙하였기 때문에 제1차로 5백여 두의 제주말이 근근 경성거리에 나타나게 되었다. 이 제주말은 기왕에도 조선서 군마로 사용하였고 또한 병이 없으며 힘이 센데 그 특징이 있다. 그리고 개량종 말보다는 값도 쌀 뿐더러 방금 제주도에 얼마든지 말이 있으므로 동 연합회에서는 앞으로 될 수 있는대로 많이 구입하여 총후수송에 이바지하기로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몇 달 후에는 제주마가 도착할 상황이 임박하게 되었는데, <경성일보> 1942년 8월 2일자에 수록된 「내가 맡을게 ‘연료운반(燃料運搬)’, 도락쿠(トラック)를 대신하는 제주소마(濟州小馬) 등장(登場)」 제하의 기사에는 하루 이틀 새 서울 거리에 선을 보일 제주조랑말의 존재와 그 역할에 대해 자세히 소개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탄(炭, 석탄)이랑 신(薪, 땔감)의 운반만큼 도락쿠에 신세를 지지 않는 것은 없지만 “우리들의 다리로 충분해요. 히히힝.”이라며, 겨울의 연료수송진(燃料????送陳) 완화(緩和)를 위해 멀리 제주도(濟州島)에서 키 작은 제주마(濟州馬)들이 꽃의 도시 경성(京城)으로 향해 오고 있다.
본년(本年)이야말로 연료수송진(燃料????送陣)의 만전(萬全)을 꾀하려는 의도(意圖) 아래에, 경성 동대문 우마차운반통제조합연합회에서는 최근(最近) 다량(多量)의 노역용(勞役用) 마(馬)를 제주도(濟州島)에서 구입(購入)하여 도락쿠에 대체하는 마차(馬車)의 대량제작(大量製作)을 개시(開始)하는 것으로 되었는데, 그 가운데 일부(一部)는 벌써 최근 경성(京城)에 도착(到着)했다.
그래서 동조합(同組合)에서도 경성 동대문서(京城 東大門署)의 이해(理解) 있는 응원(應援) 아래 관하(管下)의 차량 제작공장(車輛製作工場)을 총동원(總動員)하여 운반용 마차(運搬用 馬車)의 제작(製作)에 전능(全能)을 들여 11월(月)까지는 수백 대(數百台)가 완성(完成)될 전망으로 되어 있다.
성전하(聖戰下) 귀중(貴重)한 도락쿠 운수(運????)에 교체하여 등장(登場)한 제주소마(濟州小馬)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방울소리 높이 신거(薪車, 땔감수레)를 끌며 천사(天使)처럼 경성(京城)의 거리에서 거리로 뛰고 걷는 굉장한 풍경(風景)이 보이는 것도 그만큼 가까울 것이다.

이 기사가 등장한 바로 그날 밤에는 실제로 제주말 가운데 일부인 30두(頭)가 우선 청량리역(淸涼里驛)에 도착하여 장차 시탄(柴炭)의 운반이나 김장거리와 소화물 운송에 투입될 것이라는 소식도 전해진 바 있었다. 다만, 나머지 조랑말들도 전부 다 도착한 것인지에 대한 여부는 더 이상의 후속기사가 없으므로 정확하게 확인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매일신보> 1942년 8월 4일자에는 청량리역(淸涼里驛)을 통해 긴급 수송된 제주조랑말 30마리의 모습이 실려 있다. 이들은 전시체제기 연료부족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서울로 가져오기로 교섭된 300두(頭) 가운데 우선 도착한 물량이었다.
<매일신보> 1941년 8월 15일자에 수록된 ‘택시합승실시’와 관련한 보도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피같이 귀한 휘발유 절약을 위해 같은 방향의 승객들이 함께 타며, 요금도 나눠 내는 방법이 적극 장려되었다.

 

<경성일보> 1942년 8월 2일자에는 느닷없이 서울 거리에 등장한 제주조랑말의 모습이 소개되 어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연료부족으로 인해 ‘도락쿠’가 감당해야 할 화물수송을 이들 조랑말이 끄는 마차가 그 자리를 대신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좀 엉뚱한 얘기로 들릴는지 모르겠지만, 근년까지도 크게 성행하던 ‘택시합승’이라는 고질적인 악습 또한 일제의 군국주의와 전시체제기가 이 땅에 남겨놓은 생활풍습의 하나였던 것으로 드러난다. <매일신보> 1941년 8월 15일자에 수록된 「택시합승운동(合乘運動)실시(實施), 내(來) 16일부터 경성역(京城驛)에서 시험(試驗)」 제하의 기사를 보면, 그당시 “피같이 귀한 휘발유를 쓰는 택시에 승객 한 사람이 타고 달린다는 것은 몹시도 재미롭지 못한 일”이라고 하여 모르는 사람끼리라도 방향이 같으면 택시 한 대를 같이 타고 갈수 있도록 이른바 ‘합승제도’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경성역(京城驛) 앞에 주차장을 설치하여 여기에서 합승권(合乘券)을 구입하고 이동거리에 따라 승객수만큼 분할한 요금을 추가로 내는 방식이 적용되었다. 이렇게하면 각자의 요금부담이 크게 줄어드는 동시에 여러 사람이 동시에 움직이므로 그만큼 휘발유의 사용을 줄일 수 있어서 이득이 된다는 논리였다. 단 하나, 같은 방향으로 갈 사람끼리 모여야 하는 문제와 서로 모르는 사이의 남녀가 타는 경우에 풍기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 흠이었다.

이와 아울러 가솔린 부족상황은 한때 심야운행택시에 대한 단호한 집중단속이 필요하다는 쪽의 주장이 크게 불거지게도 하였는데, <매일신보> 1940년 7월 15일자에 수록된 「세 시간(時間)에 85대(臺), 전부(全部)가 유흥자동차(遊興自動車), 서문서(西門署)서 도색차(桃色車) 검색(檢索)」 제하의 기사에는 그 이유가 이렇게 기재되어 있다.

시내 서대문서 보안계에서는 12일 밤 열한 시부터 오전 세 시까지 계원이 총동원하여 서대문네거리를 통과하는 ‘택시’를 조사하였던 바 그 시간 동안에 통과하는 자동차가 여든 다섯 대나 되며 모두가 유흥자동차로서 종로거리에서 술이 취해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취한, 더구나 술이 취해 기생과 여급을 데리고 여름밤 교외로 호기 좋게 달음질치는 것이 전부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일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고 매일 밤 그러한 것이다. 최근에 와서 국책으로서 ‘깨소린’ 절약을 한층 강화하는 이때에 이와 같은 사실은 그대로 간과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동서 보안계에서는 그 대책을 강구하기로 되어 방금 연구중이다. 즉 가장 차를 타야 할 병자나 급한 일을 당한 사람은 탈 수 없는 이 사실은 시내에 몇 대 안 되는 자동차가 모두 교외에 나가 몰려 있기 때문인 것이며 더구나 운전수 쪽으로 보아서도 그런 급한 용건으로 차를 타는 사람을 여러 가지 조건으로 거절하고 유흥객을 나르기에 주력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소득이 많은 까닭인 듯하여 실로 교통기관의 지장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합동 ‘택시’의 비난 소리는 결국 유흥객들의 죄상의 일면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며 유흥객들의 시국에 배반된 행위는 실로 단속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아 동서에서는 앞으로 밤늦게 달리는 유흥자동차를 단호히 단속하리라고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전시체제기 아래 연료절약이라는 과제를 타개하는 일이 얼마나 절실했던 것인지는 그 시절에 한창 유행했던 국책슬로건(國策スロガン)이 바로 “가솔린 한 방울, 피 한 방울(ガソリン 一滴, 血の一滴)”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듯하다.

이와 함께 대체운송수단이 되었던 우마(牛馬)의 보호도 현안문제로 떠올랐는데, 바야흐로 시국이 패망의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던 상황에서 <매일신보> 1944년 3월 17일자에 수록된 「마차꾼은 우마를 지키자(馬車ひきは 牛馬を 護れ)」라는 글에서도 그러한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막상 공습(空襲)이 있을 때 길을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방공호(防空壕)에 들어가지만 구루마(車)를 끄는소(牛)나 말(馬)은 아무 것도 모르고 그대로 유유히 지나가는데, 평양경찰서(平警察署)에서는 마차꾼은 피난(避難)할 때 소랑 말을 적당(適當)한 곳에 묶어두고 그런 것이 없을 때는 피난치 말고 구루마 곁에 있으면서 돌볼 수 있도록 마차꾼에게 명령했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 오로지 전쟁물자로서의 효용성이라는 잣대로 그 가치를 평가하던 일, 바로 이런 것이야말로 일제가 이 땅에서 야만적으로 저질렀던 총동원체제의 실상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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