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모윤숙
모윤숙은 시인으로 저명하지만, 명성에 비해 대표 작품은 희미하다. 한국전쟁 중에 발표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등의 작품 외에는 널리 각인된 게 별로 없다.
그것은 그의 화려한 이력 때문일 수도 있다. 유엔총회 한국 대표, 국제펜클럽 한국위원장, 여류문인협회 회장, 민주공화당 전국구(비례대표) 국회의원, 한국현대시협회 회장, 문화진흥재단 이사장,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 등의 경력이 훨씬 두드러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이유도 생각해볼 수 있다. 창작 활동을 왕성하게 했던 시기가 일제강점기였다는 점도 무관치 않다고 할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인 한국문화정보원이 운영하는 문화포털 홈페이지는 모윤숙에 관해 “1940년대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점차 순수시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왕성하게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순수시의 경향을 띠었다는 서술은 사실이 아니다. 그 시기 그의 작품들은 순수시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민망했다. ‘메시지’들로 가득한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정치적이고 선전적인 시들을 집중적으로 썼던 것이다.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시기에 친일 작품들을 대거 생산했다는 점은, 시인 모윤숙의 이름은 유명해도 모윤숙의 작품은 얼른 떠오르지 않는 것과 연관될 수 있다. 해방 이전 작품들을 가급적 감춰야 했던 그의 처지가 영향을 줬을 수 있다.
1909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한 모윤숙은 함흥 영생보통학교와 개성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중학교)를 거쳐 22세 때인 1931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교사로 취직하게 된 그는 잡지 <동광>에 시를 발표한 그해 12월에 문단으로 데뷔했다.
이광수를 문학 스승으로 두고 그의 중매로 25세 때 철학자 안호상과 결혼한 모윤숙은 이광수가 친일 전향을 선언한 1938년경에 친일 대열에 가담했다. 1940년 1월 28일 자 <조선일보>는 조선총독부 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가 “시국과 문학의 인식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황기 이천육백년을 마지하는 기원절을 전후하여” 지방 강연회를 개최한다면서 “본 협회 회원 모윤숙”도 이 행사에서 작품을 발표한다고 보도했다.
‘황기 2600주년’으로 언급된 ‘기원 2600주년’ 행사는 초대 임금이라는 진무 일왕(천황)의 즉위 26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1940년에 열린 이 행사를 위해 조선문인협회가 그해 연초에 움직일 때 모윤숙도 함께 했다. 1939년이나 그 이전에 친일파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전 방위적으로 친일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5권에 따르면, 이 위원회는 시 창작, 군국가요 작사, 강연·좌담회 활동, 조선임전보국단 등의 활동을 통해 학병·지원병 참여 및 후방 지원을 독려하고 내선일체 및 황민화 정책을 선전한 행적 등을 근거로 모윤숙을 친일파로 규정했다.
해방 이전에 발표된 모윤숙의 시들을 읽어보면 그가 상당히 감각적 방법으로 한국인들을 침략전쟁으로 내몰았음을 느낄 수 있다. 31세 때인 1940년 육군지원병훈련소를 하룻동안 체험한 뒤에 쓴 ‘태양 아래 빛나는 몸’에서는 “나는 가슴이 몹시 뛰었습니다”라며 한국 남성에게서 본 적 없는 모습을 거기서 봤다고 읊었다.
그는 “반도 사람에게서 보지 못하던 굳센 팔, 힘센 다리, 당신들이 지금 붉은 태양 아래에서 내게 보여주였습니다”라고 썼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전쟁에 동원된 한국 청년들을 보고 그런 시를 썼던 것이다.
1945년 1월 2일 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신년송-금녀의 노래’에서는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한국 여성의 헌신적 열정을 형상화했다. “오늘부터 이 몸은 공장 색시 되어서/ 서방님 달리던 길 아침저녁 걸으며/ 나라 위해 왼 정성 이바지하려 하오/ 님이 쓰실 총포탄을 내 손수 만들려오”라는 대목이 들어 있는 작품이다.
그는 1941년 1월에 발표한 ‘지원병에게’라는 시에서 일본 육군에 끌려가는 한국 청년들을 “그대들은 이 땅의 광명입니다”, “반도의 남아 희망의 화관(花冠)입니다”라는 말로 극찬했다. 육군으로 끌려가는 청년들을 그렇게 찬미했던 그는 해군으로 끌려가는 청년들을 위한 글에서는 ‘해군이 최고’라는 메시지를 강조했다.
34세 때인 1943년 6월에 발표한 ‘해군의 얼굴’이란 산문에서 “사실 나는 육군지원병제가 공포될 때보다 이번 해군특별지원병제가 공포될 때 더 감격이 되었습니다”, “만약 내게 아들이 태어난다면 나는 꼭 해군 되기를 빌겠습니다”, “사나이다운 사나이, 그는 오직 해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기품일까 합니다”라고 찬미했다.
해군이 최고라던 그는 학병에 관한 시를 쓸 때는 ‘어서 가라’며 학병 지원을 독려했다. 그해 11월에 쓴 ‘내 어머니 한 말씀에’란 시에서는 “오냐! 지원을 해라 엄마보다 나라가/ 중하지 않으냐 가정보다 나라가 크지 않으냐/ 생명보다 중한 나라 그 나라가/ 지금 너를 나오란다 너를 오란다”라며 “폭탄인들 마다하랴 어서 가거라”라고 선동했다. 일제가 패망하지 않았다면, 모윤숙 자신에 의해 널리 홍보됐을 시들이다.
그의 친일 작품들에서는 생기가 느껴진다. 그 자신이 상당히 활력적으로 친일을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단순히 작품 발표만 한 게 아니라 선전 활동을 하는 기관에도 깊숙이 몸을 담았다. 전 방위적으로 친일을 했던 것이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모윤숙 편은 “(1940년) 11월 조선문인협회 간사를 맡아 1943년 4월까지 활동했다”, “(1941년) 9월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 강연·강좌계에서 근무했다”, “1941년 12월 조선방송협회 편성과 직원으로 들어가 해방될 때까지 활동했다”라고 설명한다. 전쟁 선전과 관련된 기관들에서 투잡이나 쓰리잡을 했던 기간이 있었던 것이다.
노태우 정권은 금관문화훈장 추서
친일 작품들을 왕성하게 생산하는 한편, 여러 기관의 실무 직원으로도 일했다. 전쟁 홍보에 거의 전적으로 매달렸던 것이다. 이런 데 힘입어 그가 생계를 이어나간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언론 기고 및 강연 활동과 실무 직원 활동에서 큰 수입이 생기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4~5년간 일본 밥을 먹으며 일본을 위해 시를 쓴 것은 감출 수 없다.
대단한 액수의 친일재산이 생기지 않았더라도, 살아가고 활동하는 데 필요한 재산이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일본의 강요로 친일 작품을 썼다는 변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측면이다.
그랬던 모윤숙이 해방 뒤에는 새로운 상황에 열심히 적응해 나갔다. 8·15 이후에는 자신을 반공의 기수로 형상화해 나갔다. 이승만 정권 때인 1950년에는 북진통일 여성투쟁위원장으로 활약했고, 박정희 정권 때인 1966년에는 아시아반공대회 한국 대표로 나섰다.
그는 이 분야에서 영향력을 획득하기 위해 문인답지 않은 행적도 남겼다. <친일인명사전>은 “1951년 부산 피난지에서 영어를 잘하고 외모가 뛰어난 인텔리 여성들을 모아 낙랑클럽을 조직하여 한국 정부의 고위 관리와 군 장성을 비롯하여 주한 외교사절 등 외국 귀빈을 대상으로 사교 활동을 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을 위한 정보 수집과 로비 활동을 했다”고 설명한다.
1948년 2월에 유엔의 남한 단독선거 결의로 한반도 분단이 기정사실화되는 과정에도 그는 깊이 개입했다. <친일인명사전>은 “UN한국임시위원단장인 인도인 메논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메논이 애초의 뜻을 뒤집고 남한만의 총선거를 통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도록 유도했다”라고 말한다.
1993년에 발간된 <친일파 99인> 제3권에 수록된 임헌영 당시 문학평론가의 기고문 ‘모윤숙: 여성 교화사업의 첨병’은 “처음부터 단정 수립 반대국이었던 인도의 대표로 한국에 온 메논은 모윤숙의 노력으로 하지 중장을 떼어버린 채 이승만과의 단독 대좌를 했는가 하면 이광수와도 자리를 마련해 즐거운 한때를 가졌다”라고 설명한다.
친일파에서 반공 투사로 변신한 모윤숙은 해방 뒤에 오히려 승승장구하면서 화려한 이력들을 밟아나갔다. 박정희 말년인 1979년에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3·1문화상도 수상했다. 1990년 6월 7일 그가 사망하자, 다음날 노태우 정권은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2023-02-1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군인들에게 죽으러 가라던 시인, 죽어서도 훈장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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