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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강처중과 박치우… 윤동주의 벗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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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질서가 낳은 ‘반쪽짜리 한국문학사’ ①

우리는 통상 시인 윤동주를 ‘민족 문학’으로 표현한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식민지 조선은 우리말조차 쓸 수 없었다. 20대 청년 서정주를 비롯해 내로라하는 당대 문인들이 앞다퉈 일본어로 시를 쓰고 작품을 발표했다.

그런 암흑기에 20대 청년 윤동주는 아름다운 우리말 시어로 식민지 현실 속 자신의 내면을 절절하게 성찰했다. 실제로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시절 최현배 선생이 강의하는 조선어 수업 시간이 되면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경청할 정도로 우리말을 사랑했다.

▲ 조선어학회 항일기념탐(광화문 소재) 조선어학회 항일독립운동을 기념해 2014년 광화문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종합청사 사이 공간에 세웠다. 건립 과정에 민족문제연구소 박용규 박사의 연구 업적이 결정적이었다.(출처 : 하성환) ⓒ 하성환

일제강점기 우리말로 시를 쓰는 것 자체가 식민 지배 자체를 거부하는 불온한 행위였다. 일제 말기 터진 ‘언어독립투쟁’, 조선어학회 사건(1942~1943)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름다운 토박이 우리말을 모으고 연구하며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려는 행위조차 잔혹하게 탄압한 자들이 바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다. 조선어학회의 실질적 목대잡이(지도자의 순우리말)였던 고루 이극로 선생은 함흥경찰서로 압송된 지 3일 동안 일곱 번이나 물고문을 당하고 혼절했다.

▲ 박용규 박사의 역작 <조선어학회 항일투쟁사> 책 표지(출처 : 하성환) 조선어학회 사건(1942-1943)을 연구한 박용규 박사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언어독립투쟁>으로 그 성격을 규정했다. 피검된 조선어학회 관계자 33인에 대한 무지막지한 고문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33인 인물에 대해 세밀하게 연구된 저작물이다. ⓒ 하성환

잔혹한 고문의 결과 손톱, 발톱이 모두 빠지는 고통 속에 탄압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지막지한 몽둥이질과 비행기 태우기, 통닭구이로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결국 악형 속에서 이윤재, 한징은 아예 예심재판도 열리기 전 감옥에서 옥사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 윤동주는 ‘저항 시인’임에 틀림없다. 제국주의 식민 통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 윤동주를 우리는 ‘민족시인’이라 일컫는다. 항일민족시인 반열에 이름자를 새겨도 전혀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동주와 인연을 맺었던 인물 가운데엔 코뮤니스트들이 있었다. 그것도 절친이자 친분이 매우 두터운 인물이었다. 바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라는 제목으로 윤동주 유고 시집을 펴낸 강처중이다.

절친 강처중 이야기

윤동주가 일본 유학 시절 절친 강처중에게 보내온 편지 속 시, <쉽게 씌어진 시> 등 5편과 윤동주가 일본 유학을 떠날 때 강처중에게 맡긴 <팔복> <참회록> 등 7편, 그리고 종로구 누상동 하숙집에서 함께 생활했던 5살 어린 후배 정병욱(전 서울대 교수)에게 필사본으로 남긴 19편 등 모두 31편으로 최초 시집을 발간했다.

강처중이 발문을 쓰고 시인 정지용이 서문을 써서 1948년 정음사에서 세상에 처음으로 윤동주 시를 소개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정지용은 윤동주가 가장 흠모했던 시인이다. 유학 당시 윤동주가 도쿄에 있는 릿교대학을 그만두고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으로 옮긴 것도 정지용이 다녔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초판 발행 당시 남쪽 사회에는 ‘백색테러’가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윤동주의 절친 강처중은 당시 <경향신문> 창립 멤버이자 조사부 주임기자로서 남로당 언론계 주요 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 엄혹한 시절, 강처중이 앞장서 주도했기에 윤동주의 시는 당당히 생명의 빛을 보게 됐다. 그렇다면 강처중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1년 앞두고 개봉된 영화 <동주>(2016)에서 강처중(민진웅 분)은 재치 있는 인물로 잠깐 등장한다. 그는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부유한 한의사 집안에서 1916년 맏아들로 태어났다. 17살 청소년 시절인 1930년대 초반, 방학을 이용해 함경도에서 농민 100명을 모아 놓고 브나르드운동을 열성적으로 실천했던 항일독립투사였다.

그는 ‘영어도사’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영어에 능통했던 인물로 연희전문 문과 전교 1~2등을 다툴 정도로 총명했다. 리더십도 뛰어나 연희전문학교 ‘문우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핀슨홀 기숙사 총사가 바로 윤동주, 송몽규, 강처중 셋이다.

▲ <윤동주 시비> 뒷편 건물 핀슨홀 전경(출처 : 하성환) 이 핀슨홀은 일제강점기 윤동주, 강처중, 송몽규 <문우회> 3총사가 묵었던 기숙사였다. ⓒ 하성환

그들은 서로 시작(詩作) 비평을 같이하며 깊은 우정을 나눴다. 강처중이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 발문에 쓴 내용을 보면 온순한 성품을 지닌 윤동주와 둘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이 마주 앉아 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중략)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곧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 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 전당포 나들기를 부지런히 하였다.

(중략)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에서 죽었다. 이역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히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하더니! 그는 나의 친구이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 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 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스러지고 말았다.

(중략)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였건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절친 윤동주와 송몽규의 안타깝고 원통한 죽음을 슬퍼하는 친구 강처중의 애달픈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강처중은 절친 윤동주가 남긴 유품을 잘 간직했다가 월남한 동생 윤일주에게 넘겨준 인물이다.

그런 연유로 절친 강처중이 없었다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 유고 시집에 담을 시를 직접 선정하고 시집 편집 자체를 강처중이 오롯이 도맡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윤동주 문학을 이야기할 때 강처중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미군정 탄압이 집중되던 엄혹한 시절, 강처중은 남로당 지하활동을 수행하는 와중에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펴냈다. 오로지 절친 윤동주를 추모하며 윤동주의 나라 사랑과 우리말 사랑을 기리고 세상에 알리고자 애썼다.

다시 말해 시인 윤동주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한국 문학사에서 윤동주의 위상을 정립한 인물이 바로 강처중인 셈이다. 강처중을 통해서 윤동주가 시인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처중은 해방 공간 남로당 언론계 비선 책임자였다. 이육사 동생 이원조는 좌파언론 <현대일보> 편집국장이었으며 박치우는 <현대일보> 발행인 겸 편집주간이었다. 그들 셋은 해방 공간 남로당 언론계 거물급 인물이었던 셈이다.

강처중의 죽음에 대한 명확한 자료는 없다. 일설에 따르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보도연맹원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양주동, 정지용, 황순원과 함께 출옥했다고 한다. 출옥 후 집에서 두 달을 요양한 뒤에 아내에게 공부를 하겠다며 소련으로 갈 것이라며 떠났다 한다.

그런가 하면 이승만 정권에서 1953년 언론인 ‘정국은 간첩 사건’ 배후로 연루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한국전쟁 시기 월북한 뒤에 북쪽에서 김일성이 남로당을 숙청할 때 비슷한 시기 숙청당했을 거라는 일설도 있다.

분명한 역사 사실은 강처중이 윤동주의 절친이었다는 사실과 그가 해방 공간 남로당 언론계를 담당한 주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강처중에 의해서 윤동주 시인 최초의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발간됐다는 점이다.

물론 1955년 증보판을 발행할 때는 강처중의 발문과 정지용의 서문은 완전히 삭제됐다. 반공 파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이승만 정권 1950년대를 생각하면 ‘납북’ 문인 정지용조차 불온한 인물로 대중의 기억에서 애써 지워버렸던 시절이었으니까.

요컨대 윤동주가 한국 현대 시문학사에 혜성처럼 나타나 샛별 같은 존재로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결정적인 인물이 바로 절친 코뮤니스트 강처중이라는 사실이다.

철학자 박치우 이야기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말기 사방에서 탄압이 죄어오던 그 시기 윤동주가 친하게 친분을 쌓았던 인물이 철학자 박치우였다. 박치우는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한 1세대 철학자다. 한국 철학계 거두인 박종홍(전 서울대 교수)과 신남철(전 김일성대 교수) 그리고 박치우는 서양 철학을 함께 공부한 철학 1세대에 속한다. 경성제대 재학 시절 박치우는 일본인 철학 교수로부터 ‘천재 철학자’로 높게 평가받았던 인물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서울대 철학 교수로서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한 박종홍은 알아도 일찌감치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했던 신남철은 잘 모른다. 아니, 신남철은 어느 정도 알아도 박치우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구나 박치우가 윤동주와 친분이 두터웠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전무하다.

이는 아마도 찰학자 박치우가 코뮤니스트로서 해방 공간 박헌영이 북쪽 김일성을 만나러 갔을 때 세 번이나 수행했던 비서로 남로당 핵심이론가였다는 이념 문제 때문일 가능성이 짙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동안 윤동주와 친분이 두터웠던 철학자 박치우가 아예 대중의 기억에서 배제된 이유는 그런 배경을 안고 있다.

박치우와 윤동주가 교분을 쌓게 된 계기는 윤동주가 숭실중학교를 다닐 당시 박치우는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임했던 시기와 연관이 깊다. 윤동주는 숭실중학 시절인 1935년 6월 <동아일보>에 박치우가 소개한 ‘국제작가대회’ 행사에 큰 관심을 보였다. ‘국제작가대회’ 행사는 1930년대 중반 무솔리니, 히틀러, 프랑코 등 유럽 파시즘이 대두하자 국제사회 명성이 자자했던 작가 업튼 싱클레어, 버나드 쇼, 막심 고리키, 토마스 만, 로맹 롤랑 등 38개국 230명 작가들이 참석해 파시즘에 반대한 행사였기 때문이다.

둘의 깊은 친분은 1935년 9월에서 1936년 3월까지 숭실학교 ‘학생 YMCA 문예부’가 발간했던 <숭실 활천>을 통해서 이뤄졌다. 박치우도 윤동주도 황순원도 이 잡지에 글을 쓰면서 교류가 시작되었다. 숭실학교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굽히지 않으면서 학교는 강제 폐교 조치를 당했다.

그러나 1938년 4월 윤동주가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할 당시 조선일보 학예부에 작품을 써 보냈는데 그 당시 박치우는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서 친밀한 교류는 계속되었다. 둘만의 친밀한 관계는 연희전문 문과 시절 내내, 그리고 1942년 봄 윤동주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윤동주와 박치우의 친밀한 관계는 윤동주가 남긴 유품에서 추정해 볼 수 있다. 윤동주가 남긴 유품 가운데 박치우가 1941년 7월 17일 윤동주에게 보낸 엽서가 있다. 그 엽서에는 제기동 “(자신의) 집으로 찾아올 때 집에 있는 개를 조심하라”며 자상하게 주의를 당부한 글귀가 남아 있다.

실제로 누상동 하숙집 당시 하숙집 주인이자 소설가 김송이 <인문평론>에 쓴 희곡작품과 박치우의 평론을 윤동주는 애독했다. 1942년 윤동주가 일본 유학을 떠나고 박치우 역시 항일독립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향했다. 1943년 봄 박치우는 사회주의자 이육사와 함께 경성콤그룹 관련 모종의 항일혁명활동을 실천하고 있었다. 몇 개월 후인 1943년 7월엔 윤동주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본인 형사 고오로기에게 체포돼 투옥된다.

그나마 강처중은 송몽규의 조카 송우혜 작가로 하여금 조금은 그 존재가 알려졌던 인물이다. 그렇지만 박치우의 존재는 3년 전 김성연 교수의 연구논문 <윤동주 평전의 질료와 빈곳 – 윤동주와 박치우의 서신, 그 새로운 사실과 전망>을 통해 조금 실체가 드러났을 뿐이다. 이 모든 게 분단이 자초한 굴곡진 현대사와 관련이 깊다. 민족 문학이든, 항일투쟁이든, 역사 연구든, 우리말 연구 등 모든 게 반쪽짜리였으니까 말이다.

<2023-02-24>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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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에도, 임화에도 덧씌워진 ‘부당한 색깔’
분단 질서가 낳은 ‘반쪽짜리 한국문학사’ ②

▲ 배화여고보 교무주임 시절 야자 이만규(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야자 이만규는 개성에서 외과의사였지만 항일민족주의 교육운동가로 전무후무한 교육사서 <조선교육사>를 집필했다. 해방 공간 조선 최고의 교육자로 이만규, 이극로, 백남운 3인을 꼽는 데 이견은 없다. ⓒ 박용규

대한민국 교사들에게 ‘조선의 페스탈로치’ ‘이만규’를 물으면 아는 이가 거의 없다. 해방 공간 ‘조선 최고의 교육자’였음에도 그가 월북했다는 이유만으로 남쪽에선 완전히 잊힌 인물이 돼버렸다. 마찬가지로 이상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슬픈 현실을 서정성 짙은 아름다운 시어로 노래했음에도 일반 대중은 그가 카프 출신인 줄은 잘 모른다.

이데올로기가 낳은 비극은 또 있다. 이기영의 <고향>은 일제강점기 농촌을 배경으로 한 당대 최고의 농촌소설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농촌소설로 심훈의 <상록수>를 머릿속에 떠올린다. 심훈의 <상록수>도 유명하지만 당대 최고의 농촌소설은 이기영의 <고향>이라는 게 당대 역사의 평가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아마도 처음 듣는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이유는 작가 이기영이 카프 출신이었기에 의도적으로 배제시킨 탓이다. 그만큼 문단 내 왜곡과 은폐가 극심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1970, 1980년대 서정주를 비롯해 친일 작가들 작품이 교과서에 버젓이 실렸던 게 사실이다. 자라나는 학생들은 시험에 나올세라 머릿속에 암기하고 외우며 그 시절을 보냈다. 식민지 시절 유랑하던 조선 민중의 참담한 삶을 묘사한 작품으로 최서해가 쓴 <탈출기>가 있다. 최서해 역시 카프 출신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소설 <인간 문제>를 쓴 강경애도 그렇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수탈과 참담한 노동 현실을 소설로 탁월하게 형상화한 최고의 작가가 강경애다. 강경애가 쓴 <인간 문제>를 읽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식민지 조선이 처한 노동 현실을 이토록 탁월하게 표현한 작품을 찾기는 어렵다.

모르긴 몰라도 <인간 문제>는 식민지 조선 사회 리얼리즘 문학의 정수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과 국어 교사나 알까 일반 대중은 전혀 모르는 생면부지 인물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학교 교육에서 의도적으로 배제시켰기 때문이다.

카프 서기장을 역임했던 카프의 맹장, ‘청년 임화’로 들어가면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청년 임화의 경우 문학사에서 망각과 왜곡이 가장 극심한 경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청년 임화’를 연구하고 있는 문예비평가 늘샘 김상천에 따르면 그 왜곡의 중심에 기존 내로라하는 문학비평가들의 잘못이 컸음을 지적했다. 늘샘은 불순한 이데올로기 장애를 뛰어넘어 좌우를 아우르는 통섭의 문예비평가다. 그는 <임화 연구>를 썼던 김윤식 전 서울대 교수가 그 책에서 ‘거대한 사이비 조직체’로 카프를 비난했다는 사실을 한탄했다.

▲ 청년 임화를 비롯해 한국문학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기술한 역작<네거리의 예술가들> 한국문학사를 인물 중심으로 새로운 시각에서 분석한 <네거리의 예술가들>은 기존 문학비평서와 달리 코뮤니스트 작가 임화를 객관적 시각에서 다룸으로써 한국문학사의 지평을 크게 넓혀준 저작물이다. 저자는 역사학자 김용직의 <임화문학연구>를 인용해 임화가 기존 문단의 인식과 달리 친일활동을 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 김상천(사실과 가치)

게다가 어떤 문학비평가는 <한국문학의 가능성>에서 “카프는 단 한 편의 우수한 작품도 내놓지 못했다”며 이런 막가는 태도에 임화 연구자 늘샘 김상천은 분노했다. 심지어 조동일은 <한국문학통사> 5권에서 “임화는 일본 군국주의의 찬양자가 되었다”고 기술하기까지 했다. 동서양 철학을 섭렵하고 좌우를 아우른 문예비평가 늘샘 김상천의 연구에 따르면 임화는 선구적으로 리얼리즘적 단편서사시를 개척한 인물이다.

그는 대단한 독서가로서 일찍이 <조선지광>에 1929-1930년 발표된 <거리의 순이> <우리 오빠와 화로> <우산 받은 요코하마의 부두> <양말 속의 편지>를 통해 조선적 리얼리즘을 획득했다고 평가했다. 늘샘 김상천은 임화 연구에서 특히 김남천이 임화의 <양말 속의 편지>가 1930년 신간회 평양 집회 당시 노동자들로부터 열렬히 환영받았던 작품이었음을 회고했다며 오래된 자료를 제시했다. 당시 임화의 작품들은 ‘인간해방서사’이자 ‘쟁의서사’로서 식민지 조선 사회가 직면한 노동쟁의 현실을 반영한 작품들이다. 모두 마르크스가 쓴 <임노동과 자본>에 대한 독서의 결과였다고 평가했다.

임화는 우리 근대문학이 이식을 통해 전통을 재창조했다고 보는 이식문학론을 주창했다. 이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론으로 권영민(전 서울대) 교수는 임화를 한국문학사 서술과 문학사 이론에 역사성과 과학성을 부여한 인물로 평가했다. 늘샘 김상천의 연구 또한 임화의 단편서사시 전통은 이후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로, 그리고 김지하의 <오적>으로 이어졌음을 논증했다.

남쪽 문인들이나 문단 내 비평가들은 김일성주의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식민지 조선의 1930년대 ‘조선학운동’을 이끌었던 임화, 김태준을 비롯해 사회주의 계열 문인들에 대해서 혹독하게 폄훼하거나 혹평을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이젠 연구의 게으름을 성찰하고 이데올로기적 폄훼를 멈춰야 한다. 1930년대 ‘조선학운동’이 이른바 민족주의 계열의 전유물이 아니었음에도 학교 교육을 통해서 임화, 김태준이 주도한 30년대 ‘조선학운동’에 대해 한마디 서술이나 언급조차 없었음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일제의 탄압으로 30년대 카프가 해체되는 속에서도 30년대 임화는 <개설 신문학사>를 펴내고 김태준은 <조선한문학사> <조선소설사> <조선가요집성> <춘향전> <청구영언> <고려가사>를 펴냈다. 그들의 뛰어난 ‘조선학운동’에 대해 “왜 대한민국 문단은 그동안 언급하지 않았고 학교는 왜 가르치지 않았을까”를 우리는 성찰해야 한다.

아직도 냉전의 고도(孤島)로 남은 채, 낡은 이념의 굴레에 포획돼 편협한 골목 비평을 더 이상 받아들여선 안 된다. 1945년 10월 미군정 당국이 경성대 학장으로 미 해군 대위를 전격 임명했다. 그러자 12월 경성대 조교들이 <조선소설사>를 쓴 코뮤니스트 김태준을 경성대 학장으로 선출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모두 분단 질서가 낳은 역사 진실의 비틀기이자 은폐이며, 따라서 다분히 불순한 의도가 개입된 것이고 편향된 성격이 매우 짙다고 볼 수 있다. 분단 질서는 그 자체가 역사의 ‘퇴행’으로 ‘죄악’ 그 자체다. 분단 질서는 살아있는 역사의 진실조차 왜곡시키는 이데올로기 모순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이젠 21세기 ‘반쪽짜리 문학사’로는 한국문학, 나아가 K-문화를 풍부하게 숙성, 발전시킬 수 없는 시대다. 한국문학사 서술에서 윤동주와 인연을 맺었던 코뮤니스트들을 있는 그대로 언급해야 한다. 나아가 카프를 배제한 ‘반쪽짜리 우리문학사’를 성찰해야 한다. 성찰이 없는 학문 연구는 하지 않음만 못하기 때문이다.

<2023-02-2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이상화에도, 임화에도 덧씌워진 ‘부당한 색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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