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손해배상 판결을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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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손해배상 판결을 환영한다

장완익 변호사·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1. 2000년 12월 일본 도쿄에서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 열렸다. 개별 전범들에 대한 형사책임과 일본의 국가책임을 묻는 법정이었다. 1946년 4월부터 1948년 11월까지 도쿄에서 열렸던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일본군 성노예 전범에 대한 역사의 법정이 열렸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제소한 현실의 법정에서는 일본군‘위안부’를 포함한 모든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졌다.

한국에서는 2000년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을 시작으로 2005년에는 일본제철(당시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소송 등이 제기되었고, 마침내 2016년에는 일본군‘위안부’의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이 제기되었으며 일부는 승소, 일부는 각하 내지 패소라는 결과를 낳았다. 극히 일부 피해자만이 한국법원에서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소하여 승소한 것이다. 그나마 확정판결에 따라 강제집행까지 마친 소송은 단 한 건도 없다.

서울중앙지방법원 1심 판결문(2023.2.7.)

2004년 설립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 결과가 나오면서 피해자들이나 유족들은 한국전쟁 전후시기의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한국 정부의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였고 피해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판결도 일부 있었지만, 한국 정부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다수의 판결이 쏟아져 나왔다.

필자도 여수·순천 10·19사건이나 한국전쟁시기 보도연맹 사건의 유족들을 대리하여 한국정부의 책임을 묻는 몇 건의 소송을 담당하였다. 대부분 승소하였고,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고 패소한 소송도 몇 건 있었지만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하고 다시 재심 소송을 통하여 최종 승소하였다.

2017년에는 제주4·3 수형인 재판이 진행되었고, 2019년 1월에 제주4·3 당시 군법회의 판결에 대하여 사실상 무죄와 같은 취지의 공소기각 판결이 났다. 그리고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개정되어 제주4·3사건에 대하여는 특별재심이 가능하고, 희생자에 대하여는 보상금을 지급하게 되었다.

2. 필자가 위와 같은 민간법정이나 소송에 관여하면서 변호사로서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사건에 대하여도 한국 정부의 책임을 묻는 소송 제기였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한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피해자와 유족이 한국 정부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면, 당연히 베트남 피해자들이 한국 법원에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사법적 판단을 받는 것도 가능하여야 하고, 그것은 그들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2015년 4월 6일 국회 정론관에서 베트남 학살 피해자인 응우옌티탄 씨가 회견을 갖고 당시 상황 민간인 학살 상황 등을 설명하고 있다. 출처 한겨레

그 첫 단계가 2018년 4월 서울에서 열렸던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하 시민평화법정)이다. 시민평화법정은 두 명의 베트남 피해자가 원고가 되어 한국 정부의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대개 민간법정이 형사책임을 묻는 데 비하여 시민평화법정은 한국정부가 ‘피해자에게 배상하고, 진상조사를 실시할 것을 권고’하라고 결론지었다(시민평화 법정을 준비할 때 필자도 잠시 관여하였으나, 2018년 3월부터 변호사 업무를 잠시 그만두었기 때문에 시민평화법정이나 민사소송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시민평화법정의 이름이 같은 두 원고 중의 한 명이 시민평화법정으로부터 2년이 지난 2020년 4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장을 접수하였다. 한국군이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퐁니 마을에서 원고의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 이모, 이모의 아들 등 5명을 총과 총검으로 학살하고 원고와 오빠에게 총을 쏴 상해를 입혔으므로 한국 정부가 국가배상책임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원고 승소 판결이 2023년 2월 7일 있었고, 1심 판결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사실관계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아마 정부는 항소할 것이고, 상고도 할 것이다. 법리적 문제에 대하여 상급심이 판단을 달리할 수도 있겠고, 대법원이 몇 년 동안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고 귀중한 시간을 허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1심이 인정한 사실이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다.

판결문이 2월 16일 원고 대리인에게 송달되었다. 속히 판결문이 베트남어, 영어 그리고 일본어로 번역되어 원고 등 피해자와 많은 세계인들이 꼭 읽었으면 한다.

1968년 2월 학살 당시 원고의 어머니는 34세(1934년생), 이모는 32세(1936년생), 언니는 11세(1957년생), 남동생은 6세(1963년생), 이모 아들은 생후 약 9~10개월(1967년생)이었고, 총상을 입은 원고의 오빠는 15세(1953년생), 그리고 원고는 8세(1960년 7월 12일생)였다. 원고는 당시 복부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나 오빠와 함께 구조되었다. 원고의 이름은 응우옌티탄이다. 우리는 이들을 모두 기억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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