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김상옥 의사 순국 100주년, 그의 발자취를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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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의거 100주년 특집]

김상옥 의사 순국 100주년, 그의 발자취를 따라

이순우 책임연구원

17일 오전 5시 시내 〇〇통에서 종로경찰서 타무라(田村) 형사를 총살한 범인은 즉시 남산을 넘어서 왕십리(往十里) 방면으로 도주한 것을 알고 수색중이더니 범인은 다시 시내 효제동(孝悌洞) 73번지에 잠복한 것을 알고 어제 아침 7시반경에 수색대가 그 집을 에워싸고 범인을 체포코자 할 새 범인은 벌써 눈치를 채이고 두 손에 육혈포를 가지고 나와 대항하여 동대문서의 쿠리다 경부(栗田警部)는 뒷어깨에 탄환을 맞아 넘어지고 다시 격투를 계속하여 마침내 범인도 경관의 탄환을 맞고 넘어져 현장에서 죽었더라(경찰부발표). 작일 호외 재록.

중국 상하이 시절에 촬영한 김상옥 의사의 인물사진이다. (<동아일보> 1924년 4월 8일자)

 

이것은 딱 10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동아일보> 1923년 1월 23일자에 등장한 「순사총살범(巡査銃殺犯), 작효(昨曉) 효제동(孝悌洞)에서, 수색대(搜索隊)와 격투후 피살(格鬪後 被殺), 어제 아침 일곱시 반 수색대에게 싸여서, 효제동에서 격투한 후에 총에 맞아 죽어, 동대문서(東大門暑) 쿠리다 경부(栗田 警部) 중상(重傷)」 제하의 신문기사이다. 여기에는 이 내용이 그 전날에 호외(號外)로 발행된 것을 재수록한 것이라는 표시가 들어 있다.
그런데 정작 이 기사에는 ‘범인’의 정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에 관해서는 일제 경찰의 철저한 보도제한조치가 내려져 있었기 때문인데, 실제로 신문기사의 한쪽에는 이러한 구절이 함께 인쇄되어 있다.

 

[근고(謹告)] 이 사건에 대하여는 경찰당국에서 일부만 발표하였으므로 범인의 성명과 기타에 대하여는 도저히 발표할 자유가 없기로 이에 간단한 사실만 보도함.

 

이러한 제한조치는 이보다 닷새 앞서 발생한 ‘삼판통(三坂通, 지금의 후암동) 총격사건’을 알리는 신문보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그 당시의 표현으로 “경성 천지(京城天地)를 진동(震動)하던 중대사건(重大事件)”의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그 이름 석 자가 겨우 밝혀진 것은 두 달가량이 지난 그해 3월 15일의 일이었다. 이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檢事局)의 조서(調書)가 발표된 것을 기점으로 그동안의 ‘게재금지명령’이 해제되었으므로 김상옥(金相玉, 1889~1923)의 이름이 비로소 신문지상에 공개적으로 기재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국내로 잠입한 지 한 달 남짓에 경성 시내를 신출귀몰하면서 일제의 치안당국을 크게 당혹케 하였고 마침내 효제동의 대로변에 접한 가옥에서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리하여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강렬했던 의열투쟁의 나날은 그렇게 마무리되고 말았으나, “항복(降服)은 절대불응(絶對不應)”하며 “최후순간(最後瞬間)까지 대항(對抗)”했던 그의 거사는 이렇듯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불멸의 큰 족적으로 남아 있다.
이에 김상옥 의사의 순국 100주년을 기리는 뜻에서 여기에서는 종횡무진했던 그의 행적을 따라 그 당시의 역사현장들을 하나씩 찾아가 보기로 한다.

[현장 1] 남대문역(경성역)

경성역 신축공사로 남대문정거장에 만들어진 임시 플랫폼의 모습이다. (<매일신보> 1921년 12월 9일자)

일찍이 1920년 여름 미국의원단(美國議員團)이 경성을 방문하는 때에 맞춰 조선총독과 총독부 고관들을 처단하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던 김상옥 의사가 빙판으로 변한 압록강을 도보로 건너 국내로 다시 잠입한 것은 1922년 12월의 일이다. 그리고 국경선을 넘자마자 이내 경의선 철로를 이용하여 일산역(一山驛)에 도착하였고, 그 이후 서울로 숨어들어 와서 각처에 며칠씩 유숙하면서 거사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상황이었다.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의 현장사진이다. (<동아일보> 1923년 1월 14일자)

옛 종로경찰서 자리인 장안빌딩 앞(종각역 8번출구)에 설치되어 있는 ‘김상옥 의거터’ 표석의 모습이다.

 

그가 당초 목표로 삼았던 것은 일본 국회에 참석하고자 조만간 일본으로 건너갈 것으로 알려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였다.
이를 위해 도쿄로 가는 출발지인 남대문정거장(1923년 1월 1일에 ‘경성역’으로 개칭)에서 사이토총독을 폭살 또는 저격하려던 계획에 따라 이 주변의 동태를 계속 점검하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당시는 경성역 신축공사(1925년 10월 15일 준공)가 한창 진행중이었으므로 옛 남대문정거장과 새로 지은 경성역이 모두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현장 2]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의거

김상옥 의사가 경성역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대기중이던 상황에서 1923년 1월 12일 밤 8시 10분에 종로경찰서(옛 한성전기회사 사옥) 서편에 따로 서 있던 급사실(給仕室) 앞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그 앞을 지나던 조선인 행인 7명(매일신보 사원 5명 포함)의 중경상자(重輕傷者)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의 범인은 당연히 김상옥 의사라는 것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긴 하지만, 그 당시의 기록으로도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이견이 계속 있었던지라 관련 논란은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상태이다.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에 관해서는 그 역사적 의미와 위상을 감안하여 일찍이 1988년 12월에 서울특별시에서 ‘김상옥 의거터’ 표석(일련번호 제40호)을 설치한 바 있다. 그러나 최초에는 종로경찰서의 위치를 잘못 고증한 탓에 옛 제일은행 본점 자리(1929년 이후의 종로경찰서 위치)에 이를 두었다가 관련 민원의 제기에 따라 2007년에 장안빌딩(종로 2가 8번지) 앞으로 이를 바로잡아 옮겼으며, 지금은 2016년 4월에 교체 제작한 신형 표석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인 순사부장을 사살한 삼판통 총격사건의 현장이다.(<동아일보> 1923년 3월 15일자 호외)

김상옥 의사의 항거지인 고봉근 집터(후암동 304번지)의 현재 모습이다.

 

[현장 3] 삼판통 항거지 (고봉근의 집터)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을 계기로 범인색출에 혈안이 된 일제의 경찰에 의해 김상옥 의사가 돼지고기 행상을 하던 매제(妹弟)인 고봉근(高奉根, 1896~1961)의 집에 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탐지되어 그해 1월 17일 새벽 5시에 경찰대가 이 집을 포위하는 상황이 전개되자 이를 뚫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 시절 ‘안정사’는 고기와 생선을 파는 풍기문란의 현장이기도 했다. (<매일신보> 1923년 5월 5일자)

김상옥 의사의 피신처로 사용된 왕십리 ‘안정사(현재 재개발로 철거 소멸)’의 전경이다.

이때 김상옥 의사가 발사한 육혈포(六穴砲, 권총) 총탄에 맞아 일본인 순사부장 타무라 쵸시치(田村長七, 종로경찰서 형사부장)가 즉사하고, 이마세 킨타로(今瀨金太郞) 경부(종로경찰서 사법계 주임)와 우메다 신타로(梅田新太郞) 경부보(동대문경찰서 고등계 주임)가 중상을 입고 함께 쓰러졌다.
이곳을 급히 뛰쳐나온 김상옥 의사는 곧장 집 뒤로 이어진 남산자락을 맨발로 박차고 올라 순식간에 눈이 덮인 남산 성벽을 타고 넘어 장충단공원(奬忠壇公園) 쪽으로 피신하였다. 이 사건의 현장인 ‘삼판통(三坂通, 지금의 후암동) 304번지’ 옛 고봉근의 집터 앞에는 2019년 8월 13일에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용산구청에서 설치한 ‘김상옥 의사 항거 터’ 안내표지판이 남아 있다.

[현장 4] 왕십리 안정사(청련사)

삼판통 총격전의 현장을 벗어난 그날 저녁에 김상옥 의사가 피신처로 선택하여 숨어든 곳은 왕십리 지역 무학봉(舞鶴峯) 안쪽 골짜기에 자리한 안정사(安靜寺, ‘안장사’는 표기오류)였다. 그 당시 서울 근교의 사찰들이 대개 그러했지만, 이곳 역시 기생들이 시중을 들며 술과 고기를 파는 음식점 영업이 성황을 이루는 공간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도망자의 몰골이 역력한지라 그는 “노름을 하다가 경관에게 발각되어 여기까지 도망하여 왔으니 사람을 좀 살려 달라”고 짐짓 애걸하는 시늉으로 하룻밤 묵을 것을 청하는 기지를 발휘하였다. 이렇게 허락을 받아 잠시 머물면서 기력을 회복하였고 다시 그 다음날 저녁나절에는 짚신 한 켤레와 목출모자(目出帽子, 털실로 짠 방한모)를 얻어 쓰고 그곳을 빠져나오게 된다.
그가 머물렀던 ‘안정사’는 통칭(通稱)이고, 이 절의 정식 명칭은 ‘청련사(靑蓮寺,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였다. 실제로 <조선총독부관보>에 수록된 ‘주지취직인가(住持就職認可)’ 의 내역을 보면 줄곧 ‘청련사’로 표기되어 있으며, 참고로 이 당시의 주지승은 윤영상(尹永相, 1921.5.5~1923.10.7 재임)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곳 절터는 아쉽게도 지난 2009년 주택재개발지역에 포함되면서 경기도 장흥으로 사찰 자체가 옮겨갔고, 그 바람에 지금은 완전히 철거되어 사라진 상태이다.

마지막 총격전이 벌어진 현장(효제동 73번지)의 주변상황이다. (<동아일보> 1923년 3월 15일자 호외)

일제의 총탄에 쓰러진 김상옥 의사의 최후 모습이다. (<매일신보> 1923년 3월 16일자)

마지막 은신처였던 이태성의 집(효제동 73번지)의 모습이다. (<조선일보> 1923년 3월 16일자)

 

큰길을 옆에 끼고 있는 효제동 순국현장의 주변배치도면이다.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 1929)

 

김상옥 의사가 숨진 ‘효제동 72번지’의 현재 모습이다.

 

김상옥 의사가 몸을 숨겼던 ‘효제동 73번지’의 현재 모습이다.

 

[현장 5] 최후의 효제동 총격전 현장(이태성의 집)

안정사를 떠난 김상옥 의사는 그날 다시 왕십리 근처에서 하루를 유숙하고, 마침내 1월 19일이 되어 동대문 밖 창신동(昌信洞)에 있는 본가를 찾아가 모친을 잠깐 뵌 후에 다시 효제동 73번지 이태성(李泰晟, 이혜수 동지의 부친)의 집을 은신처로 삼아 그곳으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틀을 머물며 또 다른 거사를 계획하고 있던 상태에서 앞서 체포된 전우진(全宇鎭)의 자백으로 인하여 김상옥 의사의 소재지가 들통났고, 이에 따라 1월 22일 새벽 3시에 경성 전역에서 동원된 수백 명의 경찰이 효제동 인근을 완전히 포위하며 체포를 시도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에 맞서 김상옥 의사는 옆집을 잇달아 넘나들며 3시간 가까이 맹렬한 총격전으로 응전하다가 마침내 ‘효제동 72번지’의 가옥에서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이 와중에 일본인 경부 쿠리다 세이조(栗田淸造, 동대문경찰서 고등계주임)가 어깨와 배 쪽에 관통상을 입어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이진옥(李鎭玉, 효제동 72번지)이라는 이웃집 노인도 유탄에 맞아 부상자가 되었다.
김상옥 의사가 최후의 격전을 벌인 ‘효제동 현장’은 원래 어의궁(於義宮)과 경모궁(景慕宮) 방향으로 곧장 올라가는 큰길이 예로부터 존재했던 지점이었다. 그러다가 193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지금의 대학로(연건동~종로 5가)에 해당하는 신작로(新作路)가 처음 개설되면서 통행이 무척 한적한 곳으로 변하였는데, 지금처럼 주택가 안쪽의 좁은 뒷골목처럼 남게 된 것은 이러한 공간변화의 탓이라고 하겠다.

장지인 이문리공동묘지로 떠나는 김상옥 의사의 장의행렬이다. (<동아일보> 1923년 3월 15일자 호외

미와 경부의 성묘 소식이 담긴 <경성일보> 1924년 1월 23일자의 보도내용이다.

김상옥 의사의 유해가 국립묘지에 안장될 당시의 사진자료이다. (<조선일보> 1966년 5월 19일자)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모셔진 김상옥 의사(정진주 합장)의 묘지이다.

 

[현장 6] 김상옥 의사의 묘지

무수한 총탄이 박힌 김상옥 의사의 유해는 가족에게 넘겨졌고, 그해 1월 26일 아침 장례절차를 거쳐 이문동공동묘지(里門洞共同墓地)에 안장되었다. <동아일보> 1924년 4월 8일자에 수록된 묘지탐방기에는 이때까지도 묘표(墓標) 하나 없는 상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김상옥 나석주 항일실록>(1986)에 이르기를 “미아리공동묘지에 방치해두었던 …… 운운”이라 하고, <김상옥평전>(2014)에는 “1940년 부득이 이문동공동묘지에 있는 산소를 열어 화장해서 절에 모셨는데 …… 운운”이라고 하여 각각 달리 적은 내용이 눈에 띈다.
해방이 되고 1966년 5월 18일에 이르러 김상옥 의사를 포함한 순국선열 애국지사의 유해 25위가 한꺼번에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이때 <조선일보> 1966년 5월 19일자의 관련보도에는 “광복회는 이날 미아리공동묘지 등에 묻혀 있던 김상옥 의사 등 스물 다섯분 선열의 유해를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모시고 묘비를 세웠다”고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1년 7개월가량이 지나 김상옥 의사의 부인인 정진주(鄭眞珠, 1895~1967) 여사가 숨지자 이곳에 합장(合葬)되었다.
그런데 약간 특이한 흔적으로는 김상옥 의사의 행방을 뒤쫓는 것에 큰 공적을 세웠다는 종로경찰서의 경부(警部)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 고등계 주임)가 순국 1주기가 되는 때를 맞춰 직접 김상옥 묘지에 성묘(省墓)했다는 대목이다. 이에 관해서는 <경성일보> 1924년 1월 23일자에 수록된 「경관대(警官隊)를 괴롭혔던 김상옥(金相玉)의 묘(墓)에 참배, 그 영혼을 위로한 종로서원(鍾路署員), 죄(罪)를 미워해도 사람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작년 1월 22일은 세상 사람의 이목을 용동(聳動)시켰던 예(例)의 김상옥(金相玉)이 경관대의 포위(包圍)를 받아 마침내 효제동(孝悌洞)의 은가(隱家)에서 우리들의 흉부(胸部)를 정예(精銳)한 모젤식(式) 권총(拳銃)으로써 멋들어지게 타관(打貫)하고 무참(無慘)한 최기(最期)를 마친 당일(當日)인데, 종로서 미와 고등주임(三輪 高等主任)은 죄를 미워해도 그 사람을 미워 말라는 아름다운 마음에서 고등계(高等係) 수명(數名)과 함께 22일 오후 3시경 동대문외이문리(東大門外 里門里)의 공동묘지(共同墓地)에 매장(埋葬)된 김상옥(金相玉)의 묘(墓)를 조문하였으며, 미와 주임은 말하되 “22일이 마침 김상옥의 일주기(一周忌)에 해당하므로 당시 관계했던 고등형사(高等刑事) 수 명과 묘지에 참배(參拜)했습니다. 물론 처음엔 승려(僧侶)를 데려가 정성껏 독경(讀經)할 생각이었습니다만 묘지(墓地)가 어딘지 알 수 없어서 그만두고 이장(里長)의 안내(案內)로 겨우 전묘(展墓)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운운(云云).”

 

그런데 <조선일보> 1925년 1월 24일자에 게재된 「자명종」을 보아하니, 2주기 때도 미와 경부가 수선화와 만수향을 사가지고 김상옥 의사의 무덤에 성묘(省墓)를 다녀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글의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덧붙여져 있다. “‘죽은 후까지야 원수 될 것이 무엇이랴’는 생각으로 성묘를 한 것이겠지만은, 죽은 사람으로서는 ‘죽은 후에도 영원한 원수’가 아니라고 누가 능히 보증할 수가 있을까?”

[연재 예고] 어의동 생가터의 위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의 ‘진짜 범인’, 최후 총격전 당시 사살자 존재 유무 등 김상옥 의사의 행적과 관련한 몇 가지 논점들을 정리한 글이 다음달 호에도 계속 이어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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