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노래 함께 보기 3]
신흥무관학교의 노래 (3) : 실낙원가
이명숙 선임연구원
신흥무관학교에서 만들어 부른 노래로는 앞서 소개했던 <신흥무관학교 교가>와 두 개의 <신흥학우단 단가>만이 알려져 있었다. 오늘 소개할 노래는 필자가 처음으로 발굴한 ‘신흥무관학교의 노래’이다.
새 노래 발굴의 힌트는 앞서 소개한 〈신흥학우단가〉에서 얻었다. 이 노래가 신흥학우단의 단시(團是)를 변용했을 것이라 전제했을 경우, 또 다른 신흥무관학교의 시나 글들도 노래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기존 자료 속에서 신흥무관학교의 노래로 변용된 경우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는 현재까지 신흥교우단·신흥학우단의 기관지인 <신흥교우보> 제2호(1913.9.15.), <신흥학우보> 제2권 제2호(1917.1.13.)와 제2권 제10호(1918.7.15.)이다. 신흥교우(학우)단의 중요 사업 중 하나로 꼽힌 ‘각종 간행물을 통하여 혁명이념의 선전과 독립사상을 고취’하고자 한 계획이 <신흥교우보>·<신흥학
우보>의 발간을 통해 실현되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내용은 주로 ‘논단(論壇)’, ‘강단(講壇)’에 잘 나타나며 한편으로 조국의 역사와 국문 연구에 관한 글들도 꾸준히 소개되었다.
‘문림(文林)’란에는 시, 한시, 소설 등의 창작 문학 작품도 실렸다. 특히 운율이 있는 시는 노래 가사로 변용될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 <독립신문> 수록 시가의 항일가요 변용에 대해 연구한 한 논문(김경남, 「상해 <독립신문> 소재 시가와 항일 가요 연구」, 2018)에서 분석 시가 90여 개 중 노래로 확인되는 것이 20여 편 정도였고, 그 중 현재까지 전해진 노래도 10여 편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러한 연구에 힘입어 각 교우보・학우보에 실린 시들을 주요하게 살펴보았다.
<신흥교우보> 제2호에는 대우강(大愚姜)의 ‘오늘밤’, 이규훈(李圭勛)의 ‘시내물두고’, 고주(孤舟)의 ‘실낙원곡(失樂園曲)’, 이찬희(李贊熙)의 ‘합니하의첫가을’이 실려 있다.
<신흥학우보> 제2권 제2호에는 송종근(宋鍾根)의 ‘기럭이’, 제2권 제10호에 촌바위의 ‘이날밤’이 실려 있다. 이들 작시가 대부분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또는 신흥교우단·신흥학우단 관계자였다. 필명으로 기록된 고주와 촌바위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신흥교우보> 목차의 ‘실낙원곡’과 본문 ‘실낙원’
이 시들 속에서, 우선 고주의 시 ‘실낙원곡’이 눈에 띄었다. ‘실낙원곡’은 목차 상의 제목인데, 그 명칭에서부터 노랫말을 연상시키고 있다. 다만 본문에서는 ‘실낙원(失樂園)’ 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으며 제목에 ‘(詩)(寄書)’가 덧붙어 있어 이 시를 ‘기서’ 즉 편지 등으로 기고받았음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작시가인 고주에 대해서도 주목되는 바가 있었다. ‘孤舟’를 필명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는 이광수(李光洙)가 대표적으로, 같은 뜻의 한글 ‘외배’도 그의 필명 중 하나다. 하지만 <신흥교우보>의 내용만으로는 고주가 곧 이광수라 단정지을 수는 없었다. 이광수가 ‘고주’란 필명을 사용한 비슷한 시기의 작품을 찾아 보았다. 1910년 12월 발간된 <보중친목회보(普中親睦會報)> 제2호의 ‘기서(寄書)’란에 실린 「참英雄」이 확인되었다.
이 시기 이광수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보중친목회보>를 발행한 보중친목회는 1907년 보성중학교 학생 일동이 학교 내에 조직한 토론회로 시작해 1908년 명칭을 변경한 것이었다. 교내에서 토론회와 보중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역임한 이는 윤기섭(尹琦燮)이었다. 1910년 4월 발간을 예정했다가 6월에 발간된 <보중친목회보> 제1호에서도 윤기섭이 회장이자 편집부 편집인으로 확인되었으며, 보성중학 제1회 졸업생을 소개하는 글에서도 확인되었다. 고주의 「참영웅」이 실린 <보중친목회보> 제2호에서는 회장과 편집인에서 빠지고 대신 제술원(製述員)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더불어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했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같은 해 4월 보성중학을 졸업한 윤기섭이 <보중친목회보> 제2호가 발행되는 12월 이전에 오산학교에 부임해 이광수와 함께 교편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윤기섭은 1911년 5월 오산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8월 서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초대 학감을 맡으며 이후 10여 년을 신흥무관학교와 함께 했다. 같은 해 이광수는 ‘105인사건’으로 구속된 이승훈의 뒤를 이어 오산학교의 실질적인 책임자로서 학감을 맡아 1913년 11월까지 재임했다. 결국 1913년 9월 발간된 <신흥교우보> 제2호에 ‘기서’한 ‘고주’는 이 둘의 인연을 감안했을 때 이광수로 보기에 충분했다. 즉 윤기섭과 이광수의 <보중친목회보>로부터의 인연이 정주 오산학교로, 다시 <신흥교우보>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광수의 시 ‘실낙원’은 <신흥교우보> 51쪽부터 54쪽까지 모두 4쪽에 걸쳐 총 20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상님들이 물려주신 낙원과도 같던 우리 민족의 터전이 멸망의 지옥이 된 상황을 묘사하며, 젊은이들의 민족적 정신을 일깨워서 무궁화 만발한 낙원을 되찾고 낙원곡을 높이 부르자고 하였다. 특히 시 내용에서 화자인 자신이 “실낙원곡을 높이 불러서 깊이 잠든 내 동생들 깨여야하지”라는 부분이 있어 이 시를 노래로 부르기를 강조하고 있었다.
시 ‘실낙원’ 전문
시 ‘실낙원’ 초반부를 <신흥교우보>에 편집된 형태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형식에 있어 4・4・5의 글자 수가 일정하게 반복되어 운율감이 느껴지는 시였다. 노래로 변용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석주 이상룡의 손부 허은이 10대 시절 불렀다는 ‘제목을 알 수 없지만 독립군들이 부르던 노래’로 기억하는 한 노래에서도 동일한 구절이 확인되었다. 위 시 ‘실낙원’의 밑줄 친 부분이 그것이고, 아래는 허은이 부른 노래의 가사이다.
이 가사는 위 시 ‘실낙원’에서 밑줄 친 1연, 3연과 거의 동일했고 3연에서 가사의 순서는 달라져 있었다. <신흥교우보>에 실린 시에 곡을 부쳐 노래로 불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이다. 즉 신흥무관학교나 신흥교우단의 누군가에 의해 시 ‘실낙원’이 노래가 되었고, 이를 허은이 ‘독립군이 부른 노래’로 기억했던 것이다. 신흥 관계자에 의해 시가 노래로 변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노래의 자취는 1920년대 만주 지역에서 부른 노래들을 모은 가사집에서도 확인됐다. 상해대동민보사(大東民報社)의 대동인쇄국에서 편찬 발행해 중국 동북 각 지방에 배부한 <가곡선집(歌曲選集)<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자료가 온전히 전해진 것은 아니며, <가곡선집> 중 일부를 “주편(主編)”한 복사본 자료가 남았다. 주편자인 김한산(金漢山), 김희산(金希山)이 학창시절 불렀던 <가곡선집>의 노래를 기억나는 대로 기록한 이 자료에는 전체 24곡이 수록돼 있으며, 항일노래로 잘 알려진 「국치기념가(國恥記念歌)」, 「도강가(渡江歌)」, 「망향가(望鄕歌)」 등이 실려 있어 1920년대 중국 동북 각지의 민족해방운동을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가곡선집> 목차에서는 7번곡 「실낙원가」가 확인됐지만 안타깝게도 본문에서는 「망향가」(정사인[鄭士仁] 작곡의 「내 고향을 이별하고」와 동일 가사)가 수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8번곡인 「체육가」의 바로 윗부분에 「망향가」가 아닌 다른 가사의 일부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가사는 시 ‘실낙원’, 허은의 ‘독립군들이 부른 노래’ 가사와 유사하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앞서 본 시 ‘실낙원’의 “동천의∼몃번이런고”와 거의 같은 가사였다. 목차에서의 곡명 「실낙원가」의 8절 가사인 것이다.
또 “떠러지는 나뭇잎 슬슬도하다”라는 가사는 시 ‘실낙원’의 4연 중 “거츨한 마른풀 쓸쓸도하다”와도 유사했다. 이상에서 노래 「실낙원가」가 실존했으며, 노래로 또 일부 가사로 전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존재 여부가 분명해진 「실낙원가」는 또 다른 자료에서도 추가로 확인되었다. 조선혁명군 소위 출신인 계기화(桂基華)가 1920년대에 애창했던 곡을 정리해 제공한 <새배달 노래>가 그것이다. 첫 번째 곡으로 실려 있던 「실낙원」은 전체가 15절이나 되는 긴 가사로 이뤄져 있으며, 시 ‘실낙원’과 비교했을 때 열 개 절의 내용이 거의 같았다. 특히 앞부분 1절부터 9절까지는 시 ‘실낙원’과 순서까지 같았다. 앞서 제시한 시 ‘실낙원’과 같은 부분인 1∼4절 가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위 밑줄 친 부분의 단어들은 바뀌어 있지만, 시 ‘실낙원’이 노래로 불렸다는 사실은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결국 1913년 9월 발행된 <신흥교우보>에 실린 시 ‘실낙원’이 누군가에 의해 곡조가 부쳐져 노래가 된 후, 허은의 회고록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 동북 지역에까지 항일노래로서 전승되었던 것이다. 시에만 머무르지 않고 노래가 된 「실낙원」은 1920년대에 여러 독립운동 진영에서 불려 현재까지 그 자취를 남기며 신흥무관학교 역사의 한 부분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현재 그 곡조는 알 수 없지만 신흥무관학교에서 창작한 또 하나의 노래로 확인된 것이다. 언젠가 「실낙원」의 곡조가 확인되어 노래로 부를 수 있기
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