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 글방 1]
대한독립에 바친 이름, ‘지대형’의 ‘지청천’ 되기
김명환 선임연구원
일제강점기를 수놓은 독립운동가 중에는 이름까지도 독립의 제단에 바친 사람들이 있다. 의열단원 이원록은 3년의 옥살이를 한 후 이육사가 되었고, 고향 안동에서 계몽운동을 하던 김긍식은 서간도로 망명한 후 김동삼이 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들을 본명보다도 이육사와 김동삼으로 기억한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지청천(池靑天)도 본명을 대한독립에 바쳤다.
청년시절까지 본명으로 살던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이청천(李靑天)’으로 이름을 고쳤다. 해방 이후 소원하던 독립이 완성되었다고 기뻐하며 본명으로 돌아갔으나, 곧 ‘지청천’으로 개명하였다. 본명보다 이청천으로 살아온 날이 길고 강렬해서 개명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그의 이름 ‘지청천’은 오랜 항일역정과 민족국가 건설의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필자가 어쩌다 지청천의 이름에 집착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특별히 그의 본명을 찾아본 기억은 없는데, 어느 순간 머릿속에 ‘지청천의 본명은 지대형(池大亨)’이 들어앉았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필자는 독립운동 전공자도 아닌데 말이다.
어느 날 일 때문에 정신없이 문헌을 뒤지던 중 지청천을 소개한 글이 눈에 들어왔다. 독립기념관에서 발행한 <한국광복군 총사령 지청천>이라는 책이었는데, 여기에서 지청천은 “관향(貫鄕)은 충주, 관명(冠名)은 석규(錫奎)였고, 아명(兒名)은 수봉(壽鳳)”이라고 소개되었다. ‘이런, 지대형이라는 본명이 빠졌네’라는 생각이 들어 그의 항일역정을 알만한 사람들에게 본명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데 젊은 연구자 중에는 지청천의 본명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답한 사람이 꽤 있었다. 만주와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된 인물인데도 말이다. 필자로서는 의외였다. 혹시 필자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국외용의조선인명부(國外に於ける容疑朝鮮人名簿)>(1934)를 펴보았다. 거기에는 ‘본명 지대형(池大亨), 별칭 이청천(李靑天)․지용기(池龍基)’로 기록되어 있었다. 필자의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본명을 확인하던 중 여러 문헌과 매체는 지청천의 이름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웹사이트를 뒤지고 여러 책을 펼쳐본 결과 매체마다 결락의 폭이 꽤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가보훈처는 2019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지청천을 선정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소개글을 남겼다. 이 소개글에는 그의 이름이 비교적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지청천은 1888년 1월 25일(양력 3월 7일, 수요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지석규(池錫奎) 또는 지대형(池大亨)으로 알려져 있는데, 후일 이청천(李靑天)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명은 수봉(壽鳳)이었는데, 일본 육군사관학교 시절에는 지석규라는 이름을 썼다. 국내에는 지대형이라는 이름이 본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본관은 충주인데 충주 지씨(池氏)는 조선 후기에 대체로 무관을 배출한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후일 만주(중국 동북지방)로 망명하면서 압록강을 지날 때 호를 백산(白山)이라고 지었는데, 이는 백두
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면서 본명인 지석규 대신 ‘이청천’이라는 이름을 쓰
게 되었다.
요즘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하나의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가지만, 한 세기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지청천도 마찬가지여서 앞의 글을 보면 시기에 따라 여러 이름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앞의 글에서는 본명이 ‘지석규’와 ‘지대형’ 두 가지로 되어 있는 점이 특이해 보인다. “국내에는 지대형이라는 이름이 본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라던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면서 본명인 지석규 대신”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지석규를 본명으로 상정하고 쓴 것으로 읽힌다. 여기에서도 어쩐지 ‘지대형’이라는 이름은 서자 취급을 받은 듯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역사 자료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하는 호기심
이 일었다. 다음은 필자가 확인한 사실 몇 가지이다. 자료 몇 가지만 들춰보아도 그의 이름 역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국가보훈처의 소개글을 보면 일본육사 시절에는 ‘지석규’라는 이름을 썼다는 내용이 있다. 실제로 그러했던 것 같다. 다음은 <매일신보> 1911년 8월 20일자 기사 중 일부이다.
陸軍 鮮人 留學生 成績
陸軍 朝鮮人 日本 留學生으로 來 9月 1日부터 各 新學級에 編入할 中央幼年學校 在學 生徒의 氏名 及 成績 等을 今回 陸軍省에서 軍司令部에 通牒하였는데, (중략) 今 其 成績의 順序에 依하여 氏名을 列擧하던대, 左와 如하더라. (중략)
本科 第1學年 修了者 13名
1. 洪恩翊, 2. 李應俊, 3. 申泰英, 4. 廉昌燮, 5. 池錫奎, 6. 劉升烈, 7. 安鍾寅, 8. 權寧漢, 9. 李昊永, 10. 趙哲鎬, 11. 朴勝薰, 12. 金俊元, 13. 閔德鎬 以上 9月 1日부터 本科 第2學年에 編入
지청천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왔는데, 이 자료는 그의 유학시절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육군중앙유년학교 시절 ‘지석규’로 불린 것을 알 수 있다. 성적순으로 열거하였다고 하므로 그는 조선인 생도 13명 중 5등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잘 알려진 대로 지청천은 일본육사 졸업 후 일본군에 복무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일본군을 이탈, 현역 장교 신분으로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진영에 가담하였다. 이때 그가 이름을 고친 일화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한국광복군총사령 지청천>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1919년 중국 만주로 망명하면서 일본 당국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이름을 바꾸었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이씨로 고쳤으며, 그의 이름 중 ‘청(靑)’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푸른 하늘에 맹세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죽을 때까지 변함없을 것이라는 뜻이었으며, ‘천(天)’은 하늘의 대공무사(大公無私)함을 본받을 것을 거듭 맹서하는 의미였다. 호 백산(白山)은 뒤에 독립군 동지들이 헌사한 것으로 그 뜻은 바로 백두산, 즉 영원히 조국을 지키고 있는 상징의 의미였다고 한다.
지청천의 서간도 망명 및 독립진영 가담을 일본군도 곧바로 파악하고 있었다. 관동군참모부의 1919년 12월 19일자 「선인소요사건(鮮人騷擾事件)」 보고 중에 ‘육군보병 중위 지대형(池大亨)’과 ‘육군기병 중위 김광서(金光瑞)’가 1919년 4월 휴가를 얻어 귀향 후 독립단에 가입하여 중국으로 갔다는 내용이 있다. 이 문서를 통해 그가 일본군 복무시절에는 ‘지대형’으로 불렸고, 망명 직후 곧바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을 알 수 있다. 아직 고친 이름 ‘이청천’은 등장하지 않았다.
1921년 이후에는 일본군의 기밀문서에서 ‘이청천’이 자주 발견된다. 독립군이 활발하게 활동할수록 ‘이청천’은 기밀문서에 더 많이 등장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지대형’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가령 1922년 4월 12일자 하얼빈총영사의 「불령조선인의 수령 주소 보고의 건(不逞朝鮮人ノ首領株所在報告ノ件)」에는 ‘지대형’으로 기록되어 있고, 1923년 10월 27일발 「노국관헌의 원조하에 불령선인무장단 조직의 건(露國官憲ノ援助下ニ不逞鮮人武裝團組織ノ件)」에서는 “상해 국민대표회에 출석한 高麗革命軍 特立聯隊 代表 李靑天(전 일본 사관학교 졸업생 보병중위 池大亨)”이라고 되어 있다. 일본군도 이청천이 지대
형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변성명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1930년대 들어 그는 만주를 떠나 중국 관내로 들어가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으로 취임하여 군무를 총괄하였다. 해방이 되자 임정요인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과 중국대륙을 떠돌던 한인들이 서둘러 귀국하였다. 그때에도 그는 중국에 남아 광복군 병력 확충을 위한 확군작업에 몰두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1947년 4월 21일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귀국감상을 당시 신문은 이렇게 전하였다.
「이청천 장군이 귀국감상담을 피력」
21일 중국 蔣主席의 애용기 자강호로 이승만과 함께 조국에 개선한 이청천(본명 池大亨) 장군은 숙사 소복여관에서 기자에게 환국감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29년 만에 조국에 돌아오니 아직 국내사정도 잘 모르거니와 듣건대 현재 민생문제가 도탄에 빠져 긴급하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섭섭하며 이런 형편이므로 공사를 물론하고 환영회 같은 것을 일체 거절하겠다. 귀국이 지연된 것은 사무처리 때문이고 정치적 이유는 없다. 그리고 나는 정치가가 아니므로 아직 아무 계획도 없으며 앞으로 조선에 대해서 공부하겠다. (<조선일보> 1947년 04월 23일)
그는 군인이었으나 해방된 조국에서 군인으로 활동할 수는 없었다. 광복군이 연합군으로부터 교전단체로 인정받지 못하여 개인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하였고, 당대의 최우선 과제인 민족국가 건설에 큰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였다. 그는 조국통일의 유일한 길은 청년운동에 있다고 믿었으므로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청년단체 통합에 기여하였다. 1948년 5·10 총선거 때에는 대동청년단 소속으로 서울 성동구에 출마하여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되었다. 5·10 총선거에 그는 ‘이청천’으로 출마하였다. 여전히 그는 혁명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UN은 그해 12월 12일 열린 총회에서 대한민국을 승인하였다. 지청천은 UN의 대한민국 승인을 의미있게 받아들인 듯하다. 이때 그는 중대한 결심을 하고 이를 내외에 공표하였다. 1948년 12월 22일의 일이었다.
「지대형으로, 이청천 장군 복명」
전 대동청년단 단장 이청천씨는 대한민국의 유엔 승인을 계기로 지대형이라는 옛 성명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고 한다. 이청천이라는 성명은 씨가 조국광복의 뜻을 품고 30년 전 압록강을 건너 망명의 길을 떠날 때 어머니의 성을 따라 이씨라 하고 강 건너는 달밤이 낮과 같이 밝았으며 청천백일과 같이 공평무사한 지성으로 혁명운동에 이바지할 것을 맹서하여 청천이라 지었던 것이라고 한다. 조국이 광복하는 날 지대형이라는 옛 본 이름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하였던 것인데 이제 대한민국이 유엔승인을 얻어 씨의 소원이 성취되었으므로 앞으로 지대형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경향신문> 1948년 12월 22일자)
일찍이 서간도로 망명하며 이름을 ‘이청천’으로 고친 것은 혁명운동에 이바지하기 위함이었는데, 이제 조국이 UN의 승인을 얻어 소원성취를 하였으므로 본명인 ‘지대형’으로 돌아가고자 한다고 천명한 것이다. 오랜 변성명의 시기를 끝내고자 한 것이다. 1947년 봄에 귀국한 이래 그는 ‘이청천’으로 소개되고 또 불렸다. 당대의 모든 신문과 문서에 그렇게 기록되었다. 반면 그의 본명인 지대형 혹은 지석규로 기록된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시절에 그는 본명으로의 복귀를 선언한 것이었다.
복명선언을 하자 그의 뜻대로 ‘지대형’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신문사들은 그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며 ‘지대형’으로 적었다. 1949년의 신문기사를 검색해보면 이제는 이청천을 찾아보기 힘들다. 바야흐로 ‘지대형’의 시대였다. 그러다가 1950년 1월 그는 다시 중대결심을 하였다. 짤막한 기사 한 줄이 그 사실을 보여준다.
「지대형씨 개명」
國會 全院委員長 지대형씨는 27일 지청천으로 개명하였다 한다.(<동아일보> 1950년 1월 29일자)
신문기사에는 개명의 이유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오랜 항일역정과 정부수립에 매진하던 시기에 그는 이청천으로 살았고, 또 사람들도 그를 이청천으로 알았기 때문에 개명을 결심한 것이 아닌가 한다. 개명 사실이 보도된 후 각 신문들은 지대형도 이청천도 아닌 ‘지청천’으로 기사를 쓰기 시작하였다. 개명을 했으므로 1957년의 부고기사도 「지청천씨 별세」로 나갔다. 생의 마지막에 불리던 그 이름으로 우리는 그를 기억하고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별다른 이유가 없다면 본명으로 기억되고 기록된다. 그렇지 않다면 특이한 사례일 텐데, 그렇게 된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연구자라면 이런 부분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청천은 어려서 ‘수봉’으로 불렸고 청년기를 본명 ‘지대형’으로 보냈다. 그러다가 1919년 독립운동에 가담하면서 ‘이청천’으로 살기 시작하였다. 일본이 망한 후에도 그는 ‘이청천’으로 민족국가 건설에 매진하였다. 생의 가장 빛나던 시절 30년을 변성명으로 산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의 인식 속에 그가 ‘이청천’인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염원하던 독립의 소원을 성취하고 그제야 본명 ‘지대형’으로 돌아갔으나, 길고 강렬했던 변성명 시기의 기억을 이기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로서도 그렇고 사람들도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청천’은 남고 ‘대형’은 잊혀진 것이다.
본명까지도 대한독립의 제단에 바친 그의 뜻과 인생역정을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