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다운로드]
민족문제연구소, 3·1절 앞두고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 발간
1991년 설립 이래 30년이 넘는 오랜 기간 학술연구와 실천운동에 매진해온 민족문제연구소가 3·1독립선언기념일을 앞두고 일제의 사찰 관련 문서철을 번역·분석한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이하 『약명부』)를 펴냈다. 일제강점기 전문 연구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외에도 『일제협력단체사전』,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재일조선인단체사전』 등 기초학술 분야에서 꾸준하게 성과를 내왔는데 이번 『약명부』 발간도 그 연장선상의 결실이다.
일제는 강제병합 이전부터 해방 때까지 반일 성향을 지닌 인물들을 요주의 사찰 대상으로 분류해 감시하는 다양한 형태의 요시찰제도를 조선에서 시행하였다.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노동운동가 등은 물론 외국인, 일본인 심지어 사상전향자에다 밀정과 같은 명백한 협력자에 이르기까지 식민통치나 침략전쟁 수행을 저해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인물은 모두 요시찰 대상에 포함시켰다. 3·1운동 관련자 11명도 수록되어 있는데 무려 26년의 세월이 흐른 1945년까지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은 데서 일제의 집요함을 엿볼 수 있다.
일제는 이들을 위험도에 따라 등급별로 분류해 관리하였는데 사회주의자가 가장 우선적인 경계 대상에 속하였다. 사찰과 감시의 주체는 주로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들이었으며, 관련 문건의 생산 또한 이들이 담당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번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번역 발간한 『약명부』의 원본은 『쇼와20년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昭和二十年 朝鮮人要視察人略名簿』 문서철로 일본 국립공문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일제는 도항 과정에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사회문제화하자, 1944년 12월 각의에서 조선인의 ‘내지도항제한제도內地渡航制限制度’를 철폐하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노골적인 단속이 쉽지 않게 되자 고등경찰은 각 도별로 ‘약명부’를 작성해 일본과 조선 등지의 보안 관계자 그리고 연안·국경 지역의 경찰서와 헌병대 치안 책임자에게 배포해 요주의 인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했다.
총 790명이 실려 있는 이 『약명부』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중요한 학술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째, 현재까지 발견된 일제강점기 마지막 조선인 요시찰인 명부로 일제 사찰제도의 전모와 수준을 드러내고 있다.
둘째, 요시찰규정에 관한 문헌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 『약명부』를 통해 사찰의 실제를 유추할 수 있다.
셋째, 『약명부』 수록 인물 중 168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대다수가 항일운동의 행적이 있음을 감안하면 서훈이 소수에 그치고 있어 추가조사를 통한 발굴보훈이 필요해 보인다.
넷째, 역대 권위주의 정권이 자행한 민간인 사찰의 원형으로서 일제강점기 사찰제도와의 연관성 연구에 기초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이 『약명부』가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통제정책 연구에 다소라도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하면서, “앞으로도 기초자료 발간을 체계적으로 계속 추진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책소개]
<바로가기 >>>☞ [도서구매] ㅣㅣ
1945년 3월 생산된 『昭和二十年 朝鮮人要視察人略名簿』를 번역한 자료집이다.
1. 어떤 자료일까.
일본 국립공문서관에는 『昭和二十年 朝鮮人要視察人略名簿』(이하 ‘약명부’)라는 이름의 문서철이 소장돼 있다. 1945년 3월에 식민지 조선의 각 도(道)에서 생산해 일본에 보낸 문서를 일본의 어느 지역(미에현三重縣으로 추정)에서 하나의 서류철로 묶은 것이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이 일본에서 노획해 국립문서보관소(NARA)에 보관하다 돌려준 문서 사이에 섞여 있다가 알려지게 되었으며, 지금은 일본 국립공문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지시를 받아 조선의 13개도에서 작성한 약명부인데, 그중에 전남, 전북, 경남, 충남, 함북 5개도의 약명부가 남아있다. ‘약명부’에는 전남 206명, 전북 131명, 경남 44명, 충남 129명, 함북 280명 모두 790명의 인물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인물 정보는 이름, 창씨명, 별명(이명), 출생일, 본적, 거주지, 얼굴과 신체 특징, 시찰요점으로 구성됐다.
‘약명부’에 기록된 790명은 ‘요시찰’ 대상이었다. 요즘 말로 블랙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집중 감시 대상이었던 블랙리스트, 요시찰 조선인. 이 사람의 기록을 확인해보자.
전라남도에서 작성한 ‘약명부’ 속 이규호는 1913년 3월 28일생이다. 본적은 ‘한성부 회현방 미동’이었고, 현재 주소는 ‘광주형무소’였다. 이규호의 [인상/특징]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키는 5척 3촌에 보통 체격이다. 머리카락은 짧았고 둥글고 흰 얼굴에 이마가 넓다. 눈썹이 짙고 수염은 조금 있다. 목소리가 형형하다. 오른쪽 눈 아래에서 윗입술까지 약 2촌(寸) 길이의 흉터가 있다.” 이규호는 왜 ‘약명부’에 실렸을까. [시찰요점]에 그 이유가 나온다. 그는 무정부주의자로서 1935년 상하이에서 조선인회 부회장 이용로를 살해한 엄순봉의 공범으로서 징역 13년을 받고 복역 중이었다. 이용로는 이회영 선생의 위치를 일본 경찰에 알려준 밀정으로 지목돼 처단된 인물이다.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 일제에 의해 ‘특요(특별요시찰인)’로 분류된 요시찰 조선인 이규호, 그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이규창, 바로 이회영 선생의 아들이었다.
2. 요시찰제도란?
일제는 통치에 저항하거나 저항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감시하는 ‘요시찰제도’를 시행했다. 조선인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운동가로서 독립운동가는 물론 협력자, 전향자, 외국인도 감시대상이었다. 조선 안(한반도)의 요시찰인은 물론 일본에 건너간 조선인, 중국이나 러시아에 망명한 조선인도 감시 대상으로 삼아 관리했다. 1928년부터는 요시찰인(특별, 정치, 노동, 보통)과 요주의인(사상, 보통)으로 분류했다. 요시찰인의 사상과 이념을 구분하고 과격한지 온건한지 정도에 따라 세분한 것이다.
요시찰은 경찰서 고등계의 업무였다. 메인 데이터라고 할 수 있는 ‘요시찰인원부(要視察人原簿)’를 제작해 관리했으며, 필요에 따라 별도의 명부를 만들어 사용했다. 예를 들면, 일본에 건너간 조선인 요시찰인을 따로 뽑은 ‘내지편입 조선인요시찰인명부’, ‘유학생 명부’, ‘외국인 명부’, ‘신문기자 특파원 통신원 명부’, 그리고 ‘요시찰인 삭제명부’ 같은 것도 있었다. 사람뿐이 아니라 신문 잡지 등의 출판물과 간행물, 단체와 신사(神社)도 관리 대상이었다.
3. ‘약명부’를 왜 만들었을까.
이번에 소개하는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는 어떤 배경에서 제작되었을까. 거기에는 ‘내지도항제한제도’ 폐지가 있다. ‘내지도항제한제도’는 식민지 조선인이 내지(內地) 곧 식민통치 본국 일본에 자유롭게 건너가지 못하도록 제약을 가하는 제도를 말한다. 강제병합 이후 일제는 말로는 ‘내선융화’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식민지 조선인을 일상적으로 차별했다. 일본에 건너가려는 사람들을 제한하고 관리할 목적으로 시행한 여행증명서 제도, 도항증명서 제도, 일시귀선증명서 제도 등도 그런 차별의 한 형태였다.
1944년 12월 일본 내각회의는 ‘조선과 대만 동포에 대한 처우 개선’이란 안건을 결정했다. 이미 태평양전쟁은 일제의 패전이란 종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도쿄는 연합군의 공습을 받는 상황이었다. 식민지 조선인은 징용, 징병 등 갖은 형태의 강제동원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유롭게 일본에 가고 싶어 할 사람도, 갈 수 있는 사람도 있을 리 없는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일제는 전쟁에 식민지 조선인의 협력을 더 끌어내기 위한 이른바 ‘처우 개선’의 하나로서 1945년 3월 1일부터 ‘내지도항제한제도’를 폐지한 것이다.
형식적이긴 하지만 조선인이 일본에 건너가는 것에 제약이 없어지자 일제 경찰 당국으로선 요시찰인 관리에 허점이 생긴 셈이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각 도에 ‘약명부’를 제작하라고 지시한 것, 그렇게 만든 ‘약명부’를 조선과 일본 각 지방관청과 경찰서, 헌병대 등 적어도 80여 곳 이상 보낸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4. 요시찰 대상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첫 번째 대상은 지금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주소는 ‘형무소’였다.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송정섭(155쪽)과 김병화(167쪽), 익산 출신 조남헌, 김제 출신 조세경은 1940년부터 1943년 5월까지 전주천 제방에서, 하숙집에서, 직장에서, 전주사범학교 부속 소학교 운동장에서, 경기전 옆 도로에서, 경성 덕수궁과 박물관 앞 잔디밭에서, 전주역 근처 도로에서 자주 만나 민족의 독립을 의논했다. 이들은 ‘일본의 조선인 차별이 심해 내선일체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조선민족의 행복을 위해 조선독립을 목표로 매진해야 하며, 우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 일이 긴요하다, 한글은 민족문화를 지키는데 꼭 필요하니 한글서적을 수집하자, 만주에 있는 조선인은 민족의식이 짙고 조선독립을 희망하고 있는데 일본과 소련이 전쟁을 한다면 그 기회에 서로 호응해 독립이 쉬워질 것이다, 징병제도는 조선인을 희생해 전쟁을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을 위해 피를 흘릴 수 없다, 창씨개명해도 결코 조선인의 혼을 잊으면 안된다, 민족을 위해 활동하게 될 때를 대비하자’ 등의 의견을 나눴다. 경찰에 잡힌 이들은 1944년 6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받았다. ‘약명부’에는 송정섭과 김병화가 전주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네 사람 중 조남헌과 김병화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지만 나머지 둘은 아직 훈장을 받지 못했다.
‘약명부’에는 주소가 형무소이거나 현재 ‘예심 중’, ‘입감 중’, ‘취조 중’인 사람이 48명으로 확인된다.
한 번이라도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했던 사람은 잊지 않고 리스트에 올려놓고 감시하고 있었다. 1920년대 중반 암태도 소작쟁의를 주도했던 서창석(102쪽)은 징역 1년을 받고 목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약명부’에는 서창석이 여전히 전남 무안군 암태면 기동리에 살고 있으며 직업은 포목상이라고 기록했다. 요시찰 이유는 “노동 소작문제에 관해 불온 과격한 언동을 한다”였다. 1926년 6월에 출옥한 서창석을 1945년 3월에도 여전히 감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항일운동을 그만두고 전향을 선언한 사람도 요시찰 대상인건 마찬가지였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은 언제든 다시 배신할 수 있다는 생각여서일까.
함북의 최판옥(372쪽)은 1930년대 초반 영암농민조합 사건으로 검거되었다가 남보다 먼저 전향을 표명한 사람이다. 그는 재판정에서 동지들에게 구타까지 당했던 인물이다. 출옥 후 거주지를 함북 청진으로 옮긴 최판권을 경찰은 여전히 “총독정치에 불만을 품고 배일사상이 농후하며 공산주의를 신봉”한다며 의심하고 있었다. 사상범보호단체인 광주대화숙의 서기 조형식과 유성황, 사상전향의 강제 기관인 광주보호관찰소의 서기 김판권, 사상전향자 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광주지역 간사 임영춘 등은 모두 사상전향의 좋은 선전 사례였지만 여전히 요시찰 대상이었다. 님 웨일즈 『아리랑』에도 나오는, 의열단원으로서 상하이 황포탄 의거 주역이었으며 중국공산당, 동북항일연군에서도 활약하다가 일제의 모진 토벌에 그만 꺾여 버렸던 오성륜은 ‘만주국 치안부 특별공작반’에 주소를 두고 있다. 그 역시 일제에 협력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요시찰 대상이었다.
요시찰 조선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건 사회주의자였다. 이 자료에서 ‘특별요시찰’로 구분된 이들의 대부분이 사회주의자였다. 그들의 시찰요점에는 “공산주의”,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공산·민족주의”, “무정부주의”, “배일공산주의”, “공산주의에 공명하여” 등의 표현이 항상 따라붙었다.
조선공산당의 주역 박헌영(270쪽)에게는 “화요회계 공산주의자로서 러시아와 상하이에서 활약,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년, 집요한 투쟁경력을 가진 자”라고 시찰요점을 기록했다. 당시 박헌영의 소재를 모르던 경찰 당국은 박헌영의 본적지인 충남에서 요시찰 명부를 관리하게 했다. 또 조선공산당재건사건으로 잡혀 온 강석준과 신승혁(392쪽)에게는 “농후한 공산주의자로서 조선공산당 재건에 광분 중 검거하여 취조 중”이란 시찰요점이 붙었다. 그런데 신승혁의 인물정보에는 두 줄의 사선이 쳐졌다. 그리고 위쪽 빈 공간에는 “4월 1일 사망”이란 메모가 남겨졌다. ‘약명부’가 제작되던 중 사망한 신승혁. 경찰, 검사의 취조와 고문을 못 이기고 사망한 것이 아닐까. 1910년 6월 23일에 태어나 함경남도 이원에서 사회주의 계열 소년운동, 청년운동을 한 신승혁의 사망 사실은 이 자료만이 기록하고 있다.
5. 자료집 간행의 의미
이 ‘약명부’ 간행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요시찰인 명부 가운데 제일 마지막에 제작된 것이다. 일제가 운영한 요시찰제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수록 인물 790명 중 168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됐다(2022년 11월까지). 일부 전향자와 협력자를 뺀 ‘약명부’ 속 대다수에게는 항일운동의 행적이 있다. 이를 감안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서훈을 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이 ‘약명부’는 추가조사를 통한 발굴보훈의 근거자료가 될 것이다.
한편 역대 권위주의 정권이 자행한 민간인 사찰의 원형으로서 일제강점기 요시찰제도와의 연관성을 연구하는데 기초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 press_0228_100.pdf (907.32 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