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도 기억·기록해야 되풀이 않는다.”
‘일제는 식민통치와 독립운동 탄압의 첨병인 경찰들이 무도와 검도를 단련할 수 있도록 주요 경찰서에 무덕관 혹은 무도관 등의 이름으로 연무장을 설치했다. 그 중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곳이 옛 이천경찰서 무도관이다…대표적 항일독립운동가인 이수홍, 유택수 지사도 이천경찰서에 수감된 뒤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사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역사와 교육의 측면에서 보존 활용해야 할 일제 유형잔재의 하나로 평가된다.’(이천시 창전동 ‘카페 꼬꼬동’ 앞에 설치된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 내용 중 일부)
올해로 광복 78주년, 3·1운동 104주년을 맞았지만 친일잔재의 상징물은 아직도 대한민국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이미 현대적인 옷을 입었거나 기념비처럼 인식돼 제대로 된 설명 없이는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친일잔재 상징물에 역사적 기록을 명확히 담은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의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 설치사업’이 2021, 2022년 두 해에 걸쳐 도내 17곳에 안내판을 설치하고 이 달 사업을 마무리해 학계와 타 지자체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안내판은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용역’을 통해 파악된 친일잔재 상징물에 친일 행적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설명을 담았다. ‘친일잔재’ 안내판을 관의 이름으로 세운 최초의 시도다. 본보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기록한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 설치사업’ 2년간의 여정을 5회에 걸쳐 따라간다. 그 끝엔 역사를 바로 알리고 세우는 종착역이 있길 바라며.
■ 3·1운동 100주년 ‘친일잔재 청산 사업’에서 태동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2019년, 일제·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경기도의 움직임은 그 어느 지역보다 선도적이었다.
그해 11월5일 친일잔재청산특별위원회(위원장 김경호)를 구성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친일잔재 조사를 시작했다. 도의회에선 2021년 5월 ‘경기도 일제 잔재 청산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일제잔재 청산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용역’을 의뢰해 6개월여간 대대적인 자료 조사와 수집 등이 진행됐다. 그 결과 친일 인물(257명), 친일 기념물(161개), 친일 인물이 만든 교가(89개), 일제를 상징하는 모양의 교표(12개) 등이 확인됐다. 그 성과물은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아카이브 포털서비스’를 통해 도민에게 제공하고 있다.
친일 기념물이 161건 확인됨에 따라 친일잔재임을 알리는 안내판 설치 사업이 시행됐다. 안내판은 해당 기념물에 설치돼 기념물에 대한 소개와 함께 기념물이 친일 행적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를 설명한다. 대상별 특징과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2021년 친일 인물을 중심으로, 지난해엔 일제수탈 시설물을 중심으로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을 세웠다.
2021년엔 ▲하남 ‘전 광주수리조합장 방공규환 기념비’(하남 창우 양수장) ▲수원 ‘치산치수지비’(수원박물관), ‘홍난파 동상’(수원 올림픽공원), ‘홍난파 노래비’(수원 팔달공원), ‘혼다 코스케 권모범장장 흉상좌대’(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부 본관 앞) ▲안성 ‘서상준 안성군수 청덕불망비’(안성 대덕면사무소), ‘최태현 안성군수 청덕애민선정비’(안성 대덕면사무소) ▲용인 ‘팔굉일우비’(용인문화원), ‘현감송공병준선정비’(용인문화원), ‘백작송종헌영세기념비’(용인문화원) 등 총 10곳에 안내판이 세워졌다.
지난해엔 ▲수원 ‘수인선 철도’, ‘권업모범장 경계석’, ‘잠업시험소·여자잠업강습소 표지석’, ‘수원농림학교 터’, ‘수룡수리조합기념비’ ▲양평 ‘북한강철교’ 뿽이천 ‘옛 이천경찰서 무도관’ 등 7곳에 설치해 총 17곳에서 안내판을 볼 수 있다. 민간단체에서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을 설치한 적은 있으나 공공기관에서 안내판을 설치한 곳은 경기도가 유일하다.
안내판을 설치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지역 주민이나 토지 소유주, 기관 등의 동의를 얻는 과정에서 관계자들은 ‘친일잔재’를 공식적으로 규정하는 것에 우려가 컸다. 이에 재단과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부정적인 역사를 제대로 기록해야 역사가 올바로 기억된다”라고 설득하는 데 노력했다.
■ ‘부정적 역사’도 기록해 인식 제고… 올바른 역사 세워야
이러한 2년간의 노력 끝에 설치된 안내판은 시민들에게 어떤 인식 개선을 할 수 있을까.
이를 확인하고자 지난달 23일 수원시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부 내에 역사학자와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관계자 등이 이른 아침부터 모였다. 지난 2년간 설치된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 현장 답사를 하기 위해서다. 조상형 경기도 문화종무과장, 송창진 경기문화재단 지역문화교육본부장, 이학성 재단 정책사업팀장 등 도와 재단 관계자를 비롯해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박진우 민족문제연구소 수원지역위원장, 강진갑 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 김도형 문화재 전문위원, 김해규 평택인문연구소장 등 역사·친일 연구 관계자들이 함께했다.
현장답사단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쌀을 수탈하는 데 두뇌 역할을 한 ‘권업모범장’과 이와 관련된 인물인 ‘혼다 코스케 권모범장장 흉상좌대’, ‘잠업시험소·여자잠업강습소 표지석’ 등이 있는 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부를 시작으로 수원 팔달공원(홍난파 노래비), 수원 올림픽공원(홍난파 동상), 용인문화원(팔굉일우비, 송병준 선정비, 송종헌 영세기념비)을 거쳐, 옛 이천경찰서 무도관을 끝으로 현장 답사를 마무리했다.
친일잔재를 버리고 없애는 게 아니라 친절하게 안내판까지 달아주는 이유는 뭘까. 부정적인 역사도 우리 역사의 한 축이고, 기록하고 기억하고 교육해야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긍정적인 역사이든, 부정적인 역사이든 지역주민들이 남겨진 지역역사문화를 콘텐츠로 활용하거나 역사 특강도 할 수 있다고 본다. 안내판이 세워진 것 자체가 굉장히 의미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아직도 무수히 남은 친일잔재 상징물에 비하며 안내판이 설치된 17곳이 적게 느껴질 수 있지만 경기도에서 의지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사업을 추진한 매우 뜻깊은 결과”라며 “앞으로도 이러한 친일잔재 청산과 관련된 작업들이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부(負)의 유산이란 식민지나 전쟁 등 과거의 과오를 보여주는 유산으로 부정적 문화유산(dark heritage)으로도 불린다.
정자연 기자 jjy84@kyeonggi.com
<2023-03-01> 경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