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인명사전’ 편찬 조문기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외…미 군정 평가가 근거
부민관 의거의 주역인 독립운동가 조문기(1927~2008)만 빼놓고 이 의거 주역들을 2023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것에 대한 국가보훈처의 3월 1일 자 해명은 독립운동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 2월 28일 자 <오마이뉴스> 기사 ‘이달의 독립운동가’서 조문기 선생 배제… “독립투사 모독”(https://omn.kr/22wg5)에 대한 답변으로 나온 이 해명은 그런 문제점을 내포한다.
국가보훈처는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사이트에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시 특정인·특정단체 배제?···사실 아냐'(https://www.korea.kr/news/actuallyView.do?newsId=148912258)라는 제목으로 올린 3월 1일 자 답변에서 조문기가 미군정 포고령 제2호 위반으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은 사실을 언급한 뒤 “국가보훈처는 광복 이후 수형 사실이 있는 경우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에서 제외”한다는 해명을 내놓았다.
일제가 패망한 뒤인 광복 이후의 전과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서 제외한다는 답변은 언뜻 들으면 그럴싸하다. 하지만 실상은 역사 인식의 불철저를 드러내는 답변이다.
분단 반대 운동했다는 이유로
1999년부터 2008년까지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일하며 2009년에 나온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기여한 조문기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8권에서 그를 독립유공자로 선정한 이유와 관련해 “1943년 5월 일본 천기시(川岐市)에 있는 일본강관주식회사에 취업 중인 한국인 노무자들의 민족 차별 반대 시위에 참여하여 이를 주도하였다”라고 한 다음, 그가 18세 때 일으킨 부민관 의거를 이렇게 설명한다.
(1943년 시위 뒤) 피신하여 귀국 후인 1945년 5월 서울 관수동의 유만수 집에서 유만수·우동학 등과 함께 대한애국청년당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국내에서의 대일 투쟁을 결의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1945년 6월 24일 서울 부민관에서 아세아민족분격대회라는 친일어용대회가 열리며 이를 주최하는 자가 친일 민족 반역자인 박춘금이라는 소식을 듣고 부민관에서의 거사를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7월 24일, 동지들과 함께 대회장에 폭탄 두 개를 투척하여 그곳을 수라장으로 변하게 하였다.
국권 침탈 3년 전인 1907년 16세 나이로 일본에 건너간 박춘금은 일제에 대한 한국인들의 저항을 진압해주고 돈을 버는 친일 폭력업자였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박춘금 편은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반일 운동과 농민 운동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고 말한다.
청부 폭력으로 재산을 축적해 1932년과 1937년 일본 중의원 의원이 된 박춘금은 한국인들을 학도병·지원병으로 강제 동원하는 데도 가담했다. 1943년 부민관에서 거행된 ‘학병 격려 대강연회’에서는 “4천이나 5천이 죽어 2천 5백만 민중이 잘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라며 한국 청년들에게 그 ‘4천이나 5천’ 중 하나가 될 것을 독려했다.
그가 벌이는 친일 행사를 겨냥해 조문기·유만수·강윤국·권준·우동학이 의거를 준비했고, 해방 3주 전에 지금의 서울시청 건너편인 부민관(현 서울시의회)에서 폭탄을 던졌다. 하지만, 생명을 겨냥한 것은 아니어서 아수라장 속에서 박춘금은 무사히 살아남아 해방 뒤 ‘그의 조국’으로 피신해 재일동포 사회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다가 1973년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의거의 주역인 조문기를 독립유공자로 선정했다. 노태우 정부 때의 일이다. 그런데도 보훈처는 부민관 의거 주역들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면서 사건 주역인 조문기만 배제했다.
보훈처는 조문기가 미군정 포고령 제2호 위반자라는 점을 내세웠다. 남북 분단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북한산에서 봉화 시위를 벌여 미군정 경찰에 체포된 일을 근거로 이달의 독립운동가에서 배제했던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달 27일 배포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조문기를 배제한 이유를 묻는 윤영덕 국회의원실의 질의에 대해 보훈처 관계자는 “강도 범죄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사실”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랬다가 언론의 취재가 시작되자 “1심에서는 강도 범죄로 실형을 받았고 2심에서 해당 혐의는 무죄가 난 것을 확인했지만, 맥아더 포고 2호 위반으로 1년 6개월 형 받은 것을 확인해 심사 진입 단계에서 제외했다”는 새로운 답변을 내놓았다.
조문기는 회고록인 <슬픈 조국의 노래>에서 “서울을 둘러싼 삼각산의 연봉 6개소에 사제 시한폭탄을 설치해 동시에 봉화를 올리는 것이 신호탄”이었다며, 봉화가 올라 미군정과 경찰이 산으로 몰려가면 “그때를 노려 우리는 서울 시내의 고층 빌딩 수십 곳에 미리 설치해놓은 두루마리 현수막을 내리는 것”이 거사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통일정부 이룩하자’, ‘(남한만의) 단일정부 수립 반대’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내려 분단을 반대하는 한민족의 의지를 보여주자는 것이 21세 청년 조문기의 포부였다. 하지만 동조자의 밀고로 봉화만 올리는 데 그치고, 플래카드는 내리지 못한 채 붙들리고 말았다.
<슬픈 조국의 노래>에 나오는 “평소 존경하던 독립운동 선배들은 모두 통일정부 수립에 힘을 합치고 있다고 했다”는 대목에도 나타나듯이, 조문기와 동지들은 독립을 완성할 목적으로 분단 반대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로 인해 미군정 포고령 위반자가 된 것을 이유로 보훈처가 “심사 진입 단계에서 제외”했던 것이다. 독립운동이 분단 반대 운동으로 이어진 맥락을 보훈처가 감안하지 않았던 것이다.
3·1운동 정신이 통일운동으로 연결된다는 명제는 전두환도 동의했을 정도로 보편적인 것이다. 일례로, 1984년 3·1절 기념사에서 전두환은 “3·1운동이 우리에게 부하하고 있는 책무를 다하여 선진 통일조국을 완성하는 날 우리는 빛나는 민족의 영원한 영광을 구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렇게 전두환도 인정한 것처럼, 조문기는 3·1운동의 책무를 다하고자 북한산 봉화 시위에 착수했다가 미군정하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런데 보훈처가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유만수 역시 실형을 살았다. 위의 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는 “보훈처는 또 유만수 지사는 기소유예를 받은 데 그쳐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라고 한 뒤 “유만수 지사도 같은 사건으로 1년 징역형을 받고 복역했다는 조문기 지사의 회고를 보면 보훈처의 부실한 검증과 의도적인 왜곡이 너무나도 뚜렷해 보인다”라고 비판했다.
이 보도자료는 “국가보훈처는 진보적인 시민단체에 불이익을 주고 관련자를 배제하는 블랙리스트를 운영하고 있는지 또는 유사한 지침을 전파했는지 진상을 밝혀라”라고 요구했다.
조문기는 “유만수 동지가 제일 먼저 합류하여 나를 도왔고”라고 회고했다. 유만수 역시 열성적으로 북한산 시위에 참여했다가 형을 살았다. “광복 이후 수형 사실이 있는 경우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에서 제외”한다는 보훈처의 해명은 유만수도 형을 살았다는 조문기의 회고 때문에도 타당성이 깎이지만, 또 다른 이유에서도 타당성을 크게 상실한다.
미군정 평가 근거로 독립운동가 배제
보훈처는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후’의 수형도 아니고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의 수형을 근거로 독립운동가 조문기에 대한 평가를 떨어트렸다. 이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1919년 3·1운동에 두는 역대 헌법 전문에 배치될 여지가 적지 않다.
미군정의 평가를 근거로 독립운동가를 재단하는 것은 독립운동보다 미군정을 우위에 두는 것이 된다. 이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미군정이 아닌 3·1운동에 둔 역대 헌법에 부합하지 않는다.
정부 수립 직전에 미군정하에서 제정된 1948년 헌법 제100조는 “현행 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라고 함으로써 미군정 법령을 대한민국 체제로 포용하되 이를 대한민국 헌법의 하위에 두었다. 바로 이 헌법의 전문은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선언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독립운동에 두었다. 전문의 이 규정은 역대 헌법에 계승됐다.
이처럼 역대 헌법이 독립운동 가치를 미군정 법령보다 상위에 두었는데도, 보훈처는 미군정 법령을 근거로 독립운동가를 재단했다. 이런 일이 계속될 경우, 조문기뿐 아니라 그 외의 무수한 독립운동가들까지 독립운동사에서 배제될 위험이 있다. 이는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다.
1945년 8월 15일과 1948년 8월 15일 사이에 치안권을 행사한 곳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미군정·조선총독부다. 총독부도 해방 이후 한동안 공권력을 행사했다. 이 기간에 총독부나 미군정에 붙들린 사람들 중에는 존경받거나 추모돼야 할 사람들이 많았다.
분단 반대를 외치는 제주도민들의 궐기를 미군정과 경찰이 폭력적으로 진압한 제주 4·3 사건(4·3항쟁)의 희생자들 속에는 독립운동가들이 섞여 있었다. 헌법 전문을 무시하고 미군정 관점으로 독립운동을 재단하게 되면, 4·3사건 희생자들과 그 속의 독립운동가들을 올바로 조명할 수 없게 된다.
또 해방정국하에서 미군정과 대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건준의 역사적 의의도 제대로 인식하기 어렵게 된다. 통일에 걸림돌이 된 미군정과 통일을 지향한 임정·건준 중에서 미군정을 우선시하게 되면 미군정의 배척을 받은 두 조직을 범죄시하게 되어 독립운동의 결실을 통일정부 수립으로 연결하려 한 이들의 노력을 올바로 평가할 수 없게 된다.
경북 구미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로 미군정의 부조리에 맞서 1946년 대구 10·1항쟁을 이끈 박상희 역시 미군정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미군정 법령을 독립운동 가치보다 우선시하면, 박상희 같은 인물도 올바로 조명할 수 없게 된다. 동생 박정희 그늘에 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박상희에게 미군정 그늘까지 가리는 이중의 폭거가 된다.
보훈처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3·1운동에 부여한 헌법 전문을 근거로 독립운동가들을 최대한 찾아내야 할 부서다. 광복 이후에 총독부나 미군정에 붙들린 인물들 속에서도 제2, 제3의 조문기를 끊임없이 발굴해야 할 국가기관이다.
그런데도 하필이면 3·1절에 미군정 법령을 독립운동 가치보다 우선시하는 답변을 내놓으며, 조문기를 배제한 조치를 합리화하려 했다. 오는 6월 국가보훈부로 승격될 보훈처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다.
김종성 기자
<2023-03-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하필이면 3·1절에 나온 국가보훈처의 이상한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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