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9월 1일이면 일본 관동지방에서 진도 7.9의 대지진이 일어난 지 백 년이 된다. 일본은 수십 만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고 행방 불명이 되었던 아픔을 기려 이날을 방재의 날로 지정했다.
하지만 6661명(글 아래 ‘못다한 이야기’ 참조)이나 되는 조선인이 대학살을 당한 사실에 대해선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학살의 국가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학살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있기에 100년이 흘렀건만 그 진상은 지금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립국가가 된 지 80년 가까이 되었지만 단 한 차례도 일본에 사과는 커녕 진상 규명조차 요구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학살당한 조선인 노동자를 위한 어떤 기념물도 만들지 않았고 기념 행사도 거행하지 않았다. 그 흔한 조사나 외교부 차원의 성명조차 발표한 적이 없다.
지진 당시 조선인을 형식상으로 대표하는 정부 기관은 조선총독부였다. 사이토 총독은 지진과 학살 소식을 접하고 머리를 싸맸다. 관동에서 일어난 살육 소식이 한반도에 전해지면 조선 민중의 분노가 폭발해 자칫 3·1운동과 같은 저항이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이토는 일본 사법성이 조선인 학살 피해자가 233명이라고 인정했는데도 조선인 피해자는 단 2명뿐이라고 우겼다. 조선총독부는 그해 11월까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관련 보도 601건에 대해 기사 게재 금지 조치를 취했다. 또 조선인의 일본 입국을 막고 학살에서 살아남은 자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헌병을 동원해 입막음을 하고 주변을 감시했다. 유족은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 땅에 남아있던 6661명의 희생자 가족은 생사를 몰라 이제나저제나 일본에서 가족이 돌아오길 수십 년 동안 기다렸다. 8·15해방 후 강제징용과 징병자, 많은 재일동포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잠시나마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이도 잠시, 해방 후의 격동과 한반도의 내전 속에서 관동의 희생자를 찾고 기리는 일은 한가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반공 독재 정권 속에서 유족은 모일 수도 없었고 일본의 죄과를 묻는 일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관동의 비극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흐릿해져 갔다. 희생자와 그 유족 또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고 그 참변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백주년을 맞아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유족 2세 김대원, 조팔만의 사연을 모아보았다. 연이 닿는 유족 3세 권재익, 조광환, 홍동선을 만났다. 그렇게 해서 짧게나마 관동 조선인 학살 피해자의 가슴 아픈 가족사를 구성했다.
지금 일본은 과거에 대한 진정한 사죄는커녕 재무장의 길, 군국주의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때문에 관동대학살은 끝나지 않은 비극이고 지금도 진행중이다. 결코 100년 전의 일이 아니다.
일본인이 조선인을 톱으로 켜서까지 죽여
– 유족 2세 김대원
우선 목포의 김대원이 있었다.
당시 주소로 전남 무안군 안좌면 원산리의 김광진(31), 김광수(28), 김동민(25), 김광삼, 김동진 등 다섯 사람은 도쿄 아사쿠사구 아사쿠사바시(淺草橋)에서 학살의 한가운데로 빨려들어갔다. 김광삼의 양자인 김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김동진이 양복 기술을 배우러 일본으로 먼저 떠났고 나중에 집안 친척을 불러들였다.
참변 속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김광삼의 큰아버지뻘 되는 김동진뿐이었다. 학살 당시 피범벅이 되어 쫒기던 그는 어느 일본 사람 집을 두드렸고 ‘어서 들어오라’며 숨겨준 덕에 살아남았다. 김동진은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와 일본인이 조선인을 톱으로 켜서까지 죽였다고 증언했다.
같은 집안이었던 김대원은 대가 끊긴 김광삼의 양자로 들어갔다. 유골을 수습할 수 없었기에 헛묘를 써서 김광삼의 기일을 챙겼다.
그가 남긴 증언에 의하면 헌병이 김광삼의 집으로 위로금을 가져왔다고 한다.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어린 시절 집안 어른에게 들은 얘기인지라 모호한 부분이 있지만 당시 조선총독부가 저항의 불씨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위로금 지급을 한 것은 사실이다.
1924년 6월 조선총독부 관방외사과에서 제작한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문제>에 보면 “총독부에서는 지진 때문에 죽거나 행방불명이 된 조선인의 유족에 대해서는 1인당 200엔 정도의 조위금을 보내고 지방 관리를 시켜 유족을 위문하도록 했는데 그 인원은 830명이고 조위금 총액은 16만 6000엔이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1922년 당시 일본 관동지방에서 백미 10kg의 소매 가격이 3엔 4전 수준이었는데 200엔이라면 560kg을 살 수 있는 금액이다. 조선의 농민에겐 매우 큰 금액이었다
그런데 김대원은 액수를 200원으로 기억한다. 엔과 원은 차이가 있다. 원이라 하더라도 당시 200원은 오늘날 구매력 기준으로 하면 약 1000만 원 내외에 해당한다. 이 돈이 형제별로 각각 나왔는지 집안 전체로 나왔는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조선총독부의 목적은 유족을 입막음하고 저항의 기운이 퍼지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김대원은 박정희 정권 시절 관동의 진상에 대해서 말조차 못 꺼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김대원은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박지원 대통령비서실장을 찾아가 가족의 사연을 전하고 진상 규명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답을 듣지 못했다. 그는 2009년 일본에서 ‘관동 제노사이드’ 연구자 마에다 아키라를 비롯한 시민운동가들이 목포까지 찾아왔을 때 묘소를 안내하며 감사의 인사와 함께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힘주어 강조했다.
김대원은 관동대학살 희생자 추도 집회에도 참여하고, 요코아미쵸 공원에 있는 조선인 추도비에도 찾아가 조상의 넋이라도 만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2013년 3월 용인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경찰서 앞마당에서 버젓이 학살 자행
– 유족 2세 조팔만
또 조팔만이 있었다. 그는 가메이도 경찰서에서 학살당한 제주도 대정읍 인성리 출신인 조묘송(趙卯松·1891∼1923·당시 32세)의 유족이다. 그의 존재와 가족사는 <연합뉴스> 변지철 기자의 취재로 확인됐다. 조묘송의 죽음은 지진 직후 ‘이재동포위문반’을 만들어 동포들의 피해를 조사했던 최승만의 회고록 <극웅필경>에 담겨있다. 가메이도 경찰서에서 일했던 나환산의 목격담을 정리한 것이다.
나는 조선인 86명을 총과 칼로 사살하거나 참살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봤다. 9월 2일 밤부터 3일 아침까지 가메이도 경찰서 연무장에 수용된 조선인은 300여 명이었으며 이날 오후 1시에는 (계엄령에 따라) 기병 1개 중대가 들어와 경찰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다무라(田村)라는 사내가 지휘를 하게 되었는데, 군인들이 연무장으로 들어오더니 3명을 불러냈고, 연무장 입구에서 그들을 총살해 버렸다. 이때 지휘자는 총소리가 들리면 인근 주민들에게 공포감을 줄 터이니 총 대신 칼로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에 군인들은 일제히 칼을 뽑아 83명을 한꺼번에 죽였는데 그중에는 임신한 부인도 있어서 배를 가르니 태아가 나왔다. 아기가 울자 그 울음소리에 태아까지 찔러 죽이고 말았다. 시체는 다음 날 새벽 2시에 트럭에 실어 어디론가 갔는데, 다른 사람들도 어떻게 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태아까지 죽인 끔찍한 만행이 일본 군대에 의해 경찰서 앞마당에서 버젓이 행해진 것이다. 여기서 조묘성이 학살당했고 이 목격담에 나온 임산부는 조묘송의 부인 문무연(文戊連·1885∼1923·38세)이었다. 또 그의 동생 조정소(趙正昭·1900∼1923·23세) 조정화(趙正化·1904∼1923·19세) 아들 조태석(趙泰錫·1919∼1923·4세)도 함께 살해당했다.
조묘송과 그의 동생들이 한꺼번에 살해당해 집안의 대가 끊기게 되자 조팔만씨가 양자로 들어가 대를 잇게 된 것이다. 그 사연을 조금 줄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주에 남은 조묘송의 여동생들은 가장 가까운 친척인 조팔만씨의 아버지에게 팔만씨를 양자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조팔만씨의 나이는 13세였다. 조팔만씨의 부모는 이를 거절했다. 아들이 고생할 것을 염려해서다.
조묘생의 여동생 4명 중 홀로 살아남은 조술생씨는 1958년 12월 어른이 된 조팔만씨를 다시 찾아갔다. 그녀는 팔만씨에게 양자로 들어와 30년 넘게 구천에서 맴돌며 쉴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돌아다닐 오빠들의 제사를 맡아줄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팔만씨와 그의 아내 신생씨는 두 번이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이후 아들 역할을 맡아 2008년까지 50년 가까이 제사를 지냈다. 집안 사정이 넉넉지 못한 상황에서 해마다 돌아오는 제사와 명절을 챙기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로는 간소하게, 때로는 빚을 져서라도 제사를 지냈다.
가슴 아픈 가족사다. 조팔만이 양자로서 유족으로서 그 안타까움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노릇은 제사였으리라. 후손된 도리로서 일본에 가 희생된 현장을 둘러보고 국화꽃 한 송이라도 바치고 싶다던 조팔만은 안타깝게도 뜻을 이루지 못한 채 2015년 87세로 숨을 거뒀다.
유족 3세가 되는 조팔만의 아들 조영균은 2016년 광화문에서 열린 관동대지진 희생자 공식 추도 행사에서 “일부 시민단체와 언론에 의해 관동 조선인 학살에 대한 조명이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도 국민들이 이 문제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 같다며 답답함을 표시한 바 있다.
자경단 들이닥친 경찰서의 참극
– 유족 3세 권재익
관동대학살이 일어난 지 백 년이 흐르면서 확인된 유족 2세는 대부분 세상을 떴고 몇몇 3세가 할아버지 세대를 기억하면서 아픔을 곱씹고 있다. 그중 한 명인 권재익을 수소문 끝에 지난 2월 경상북도 영주역 앞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영주에서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해온 그는 중학교 때 외할머니로부터 “할아버지가 일본 군마현에서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스치듯 들었다. 고향 사람 하나가 후지오카 경찰서에서 지붕을 뚫고 도망쳐 살아 돌아와 소식을 전해 알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도쿄의 뒤숭숭한 소식은 들었지만 군마현은 멀리 떨어져 있기에 괜찮으려니 생각했는데 들려온 비보였다.
권재익은 그때는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기억이 되살아난 건, 2016년 관동대학살 93주년을 앞두고 8월 20일 광화문광장에서 처음으로 공식 추모행사가 열린다는 기사를 접한 때였다. 이후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가 강효숙 교수가 쓴 논문 <관동대지진 당시 피학살 조선인과 가해자에 대한 일고찰>을 보고 기쁜 마음에 전화를 했고 강 교수의 주선으로 93주년 추도식에 유족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그곳에서 (관동대학살에 관한) ‘일본의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의 사무국장 다나카 마사타카도 만나고 시청 한 편에서 관동대학살의 증언을 담은 다큐멘터리 <감춰진 손톱자국>과 <불하된 조선인>도 보고 또 다른 유족 조영균, 조광환씨 등을 만났다.
그 이후 권재익의 관심은 부쩍 드높아졌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고 유해를 모셔와 헛묘 대신 제대로 된 묘를 쓰고 싶었다. 2017년 오충공 다큐멘터리 감독의 제안으로 부산 강제동원기록관에서 열린 유족 간담회에 나가 교류하며 유족연합회 결성을 모색했다.
2018년에는 오충공 감독의 초청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일본으로 갈 때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가는 배편을 이용했는데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기 위해서였다. 일본에 도착해선 할아버지의 묘비가 있는 군마현 죠도지에서 열린 추도식에 참석했고 할아버지가 일했던 현장으로 추정되는 곳을 둘러봤다.
아라카와 강변에서 재일 동포들이 풍물을 치며 넋을 기리는 행사에도 참여하고 조선인 희생자를 기리는 일본의 봉선화 회원과도 만났다. 중국인 유족과도 교류하며 중국인 유가족 연합회가 일본 외무부와 국회를 항의 방문하고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가 일본에서 느낀 또 다른 아픔은 관동대학살을 기리는 일에서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와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이 따로 움직이는 분단의 현장을 만난 것이다.
권재익의 외할아버지 남성규는 피해자 중 이름과 학살 경위가 밝혀진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로 최승만의 <극웅필경>에는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이 상세히 적혀있다.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돈산리 244번지 출신인 그는 1922년 군마현으로 갔다. 당시 경상북도 사람들이 군마현으로 많이 갔는데 모집인을 따라 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일했던 곳은 군마현에 있는 우에노-타카사키센(上野-高崎線)의 철로 공사 현장, 남성규는 철도성의 청부업체인 녹도조(廘島組) 혹은 신류천 사리(神流川 砂利)라는 회사에서 근무했던 것으로 보인다.
군마현에서 자경단의 만행이 심해질 때 그는 신류천 사리회사의 사장 다나카 치요키치(田中千代吉)의 주선으로 다른 조선인 노동자 14명과 함께 군마현 후지오카(藤岡) 경찰서로 피신했다. 이 소식을 듣고 후지오카촌의 자경단 대표 13명이 경찰서로 몰려와 “조선인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이때 경찰서장은 신마치(新町)로 출장중인 상태였다.
후지오카 경찰은 서장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했고 오후 여섯 시경이 되자 자경단은 200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자경단 내에서 누군가 “해 버리자”고 외치자 자경단은 경찰서 안으로 밀고 들어가 유치장에 있던 조선인 노동자를 일본도와 죽창, 엽총으로 찌르고 베었다. 9월 7일 검사국에서 학살 당한 사람의 신원을 조사했는데 이때 남성규도 목숨을 잃은 것으로 밝혀졌다
남성규는 같은 마을에서 온 김철진(41), 조정원(43), 김백출(29) 그리고 같은 상주군에서 온 김인수(22), 허일성(25)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검사국 조회가 끝나고 짐 마차에 실려 어디선가 화장을 당했다. 이때 1886년생인 남성규의 나이는 38살이었다.
고향에는 부인 송산동과 아들 위득(8), 사득(5), 딸 득녀(2)를 남겨 놓은 상태였다. 남편을 잃은 부인 송산동은 두 아들과 딸을 데리고 시댁이 있는 영주로 갔다. 여기서 시댁의 도움으로 어렵게 살림을 꾸려갔다. 권재익은 바로 송선동이 낳은 남득녀의 아들로 남성규의 외손주, 유족 3세가 되는 것이다.
권재익은 정부가 진상규명에 나서서 돌아가신 조상의 원한을 풀어주길 바랄 뿐이다. 그는 “우물에 독을 탔다. 불을 질렀다는 거짓 유언비어와 혐의를 몰아내지 않으면 유족은 폭도의 후손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유족들이 앞에 나서는 걸 꺼려하는 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지진 후 일본 사법성의 조사에서도 조선인의 방화나 습격은 단 한 차례도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지진이라는 대참화로 곤경에 처한 일본 민중의 불만이 자칫 천황제에 대한 항거로 분출할까 전전긍긍했다. 그들은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택했다.
‘조선인 습격설’을 명분으로 계엄령을 선포했고 조선인이 적이라고 선포하고 일본민중에게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과 싸우고 조선인을 해치우라고 선동한 것이다. 나라 잃은 조선인을 그 누구도 보호해주지 않았다. 조선인은 만만한 먹잇감이었을 뿐이다. 조선인은 폭도가 아니라 일본 국가 범죄의 희생양이었을 뿐이기에 마땅히 그 누명에서 벗어나야 한다.
권재익은 평화의 반대말이 전쟁이 아니라, 혐오와 증오라고 생각한다. 혐오와 증오가 쌓이면 내부를 향해서건 외부를 향해서건 주먹과 총을 쓰게 되기 때문이다. 조선인에 대한 멸시와 차별이 쌓이고 쌓여 인류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잔학한 학살이 자행된 것이 관동대학살의 진실이라고 그는 바라본다.
권재익은 100주년을 맞아 지난 2월에 일본대사관 앞에서 처음으로 1인 시위를 했다. 100주년이 되는 9월 1일까지 꾸준히 해나갈 작정이다.
무당 통해 말 전한 큰할아버지
– 유족 3세 조광환
또 다른 유족 3세 조광환을 만난 건 찬바람이 매섭던 2월 중순, 그가 산불 감시원으로 일하는 함양군 기백산의 용추사 앞 초소에서였다. 조광환의 큰 할아버지 조권승은 1893년 2월 9일생으로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231번지에서 태어났다. 조권승은 군마현으로 갔다가 1923년 9월 2일 그의 나이 30세에 참변을 당했는데, 고향에 남겨둔 아들 조병준이 다섯 살때였다.
조권승의 소식은 한동네에 있다가 생환된 이가 가지고 왔다. 살아 돌아온 그도 일본도에 뒷머리를 베이면서도 목숨을 건진 것으로 알려졌다. 집안에서는 조권승의 옷가지를 넣어 헛묘를 만들고 기일인 7월 22일(음력)에 제사를 지냈다. 제사의 마지막 순서는 일본 쪽을 향해 묵념을 올리는 것이었다.
조권승이 죽자 그의 집안은 무너져내렸다. 조권승의 동생 조기승이 보증을 잘못서는 바람에 남아 있던 땅마저 잃어버렸다. 조광환에게 큰할머니가 되는 조권승의 아내는 독자인 병준을 데리고 직접 들일에 나섰다. 문중의 땅이나 집안의 땅 가진 사람 논을 부치면서 입에 풀칠을 했다. 집안의 가장을 잃은 채 평생을 청상과부로 고생한 조권승의 아내는 1968년 1월 15일 숨을 거뒀다. 그리고 조권승의 헛묘에 묻혔다. 비록 조권승은 아니지만 무덤은 주인을 맞은 셈이다.
조광환에게 조권승은 큰할아버지이지만 어려서부터 집안 제사에 참여했고 일본 쪽을 향한 묵념을 빼놓지 않았기에 그리 먼 느낌이 아니었다. 2013년에도 하나의 계기가 있었다. 국무총리실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서 유족 확인 조사를 나온 것이다. 주일한국대사관에서 ‘관동대지진 피살자 명부’가 발견되었고 이를 국가기록원으로부터 넘겨받은 위원회가 현장조사에 나선 터였다.
조권승이 이 명부에 오르게 된 것은 1953년 내무부에서 관동대지진 피살자 조사를 할 때 조권승의 동생 조기승이 형의 죽음을 신고했기에 기록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큰할아버지의 직계 외아들이며 조광환에게 사촌 형인 조병준과 그의 아들 조용진이 사망한 터라 조광환이 조사원을 상대했다. 큰할아버지의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조광환에게 잊지 못할 큰할아버지의 기억은 굿을 할 때 당신이 종종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거창에서 조씨 집안은 어려울 때마다 당골을 통해 집안 굿을 했다. 이때 평소 술을 좋아하고 활달했던 큰할아버지는 “내 일본 다녀오겠다. 까짓거 무서울 게 무에냐”라며 무당의 공수(무당이 죽은 사람의 넋이 하는 말이라고 전하는 말)를 통해 또렷이 음성을 들려주었다.
조광환을 유족으로서 역사의 현장에 나오게끔 이끌어준 사람 역시 오충공 감독이었다. 오충공 감독이 자신이 만든 <감춰진 손톱자국>에서 증언자로 나온 조인승의 고향을 찾아 거창에 온 적이 있었다. 조인승은 조광환과 마찬가지로 창녕 조씨였다. 오 감독은 조인승의 족보며 일가친척을 찾아 조인승이 일본에 오기 전 행적을 발굴하려던 참이었다.
동네에선 자연스레 그때 숨진 조권승과 유족 조광환의 얘기를 들려주었고 그게 계기가 되어 오충공 감독과 만났다. 조광환은 오충공 감독을 만나기 전날에 큰할아버지 무덤이 환하게 빛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오충공 감독은 마침 유족의 얘기를 담은 세 번째 작품을 촬영중인 터라 조광환은 오 감독을 조권승의 무덤으로 안내하고 창녕 조씨의 족보도 건네며(안타깝게도 조인승씨는 대가 끊긴 탓인가 족보에 올라가 있지 않다) 관동의 진실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
조광환은 2018년 오 감독의 초청으로 권재익 등 다른 유족과 함께 도쿄의 아라카와 강변과 치바 관음사에서 열린 추도식에 참석했다. 이때 그에게 인상 깊었던 것은 재일동포 3세, 4세들이 관동대학살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는 모습이었다.
며느리에게 담배 가리킨 시아버지
– 유족 3세 홍동선
경기도 남양주에 사는 또 다른 유족 3세 홍동선씨를 만난 건 그가 운영하는 ‘신토불이’라는 떡공장에서였다. 한창 성수기인 설이 막 지난 때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3형제 중 맏이로 이름은 홍철유였다. 1898년 충남 당진, 지금의 면천면에서 태어난 그는 마을 사람 네 명과 함께 취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아내의 뱃속에 3개월 된 홍사인을 둔 상태였다.
서당 공부를 한 후 면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친 그는 일본어를 잘했다. 그런 탓인가 홍동선은 할아버지가 토목공이나 노무자가 아닌, 사무원으로 일하는 직장을 구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동네 사람 3명은 떨어져 돌아왔고 홍철유만 남아 직장생활을 하면서 야간대학을 다녔다. 홍철유는 벌이가 좋았는지 “뱃속에 있던 홍사인이 태어났다는 편지를 받고” 집으로 미쓰비시에서 만든 미싱과 담요를 보내왔다.
유복자였던 홍사인은 홀로 성장해서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많은 자식을 생산했는데 4남 4녀, 그중 홍동선은 일곱째다. 홍동선은 집안에 남아있던 할아버지 홍철유의 면천공립보통학교 졸업식 사진 덕분에 유족임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 이기정은 사진을 가리키며 할아버지가 동경에서 돌아가셨다고 종종 말씀하셨다. 하지만 전후 얘기는 깜깜했다. 일본에서 전보를 받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적혀있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동경에서 할머니 이기정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게 남 보기 창피하다고 읽고서는 태워버렸단다. 그중 하나라도 남아있으면 발신지를 찾아가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더듬어볼 수 있을 텐데 모두 없애버린 게 두고두고 한이 되었다.
이기정은 남편 홍철유를 잃고 유복자인 홍사인을 엄하게 키웠다. 그런 어머니의 기대와 달리 홍사인은 엇나갔다. 정미소를 했을 정도라 나름 재산이 있었지만 일을 뒷전에 두며 술과 노름으로 한 평생을 보냈다. 늑막염으로 18년간 고생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 유복자였던 그에게 홀어머니는 인생의 큰 그늘이 되었던 게다.
이기정은 아들을 자신 앞에서 떠나보낸 후 홍동선이 14살 때 세상을 등졌다. 평생을 청상으로 산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졸업 사진을 함께 묻어달라고 했다. 할머니의 유언에 소년 홍동선의 코끝은 찡했다. 그는 삼 년간 초하루와 보름에 할머니 제사를 지냈다.
할머니의 가슴 아픈 얘기는 또 있다. 울화가 쌓여서인지 평생 속병으로 고생했는데 이를 보다 못한 홍동선의 증조 할아버지, 즉 홍철유의 아버지가 며느리인 이기정에게 담배를 가르쳤다고 한다. 담배로나마 위안을 삼으라는 뜻이었으리라.
안타깝게도 홍철유의 기록은 한 조각도 없다. 그는 야간대학을 다니며 어쩌면 당시 동경에서 고학했던 아리랑의 장지락을 만났을지 모른다. 혹여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만나 식민지의 해방을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댔을지 모른다. 아니면 야간대학을 졸업한 후 조선에 돌아와 식민지에서 출세할 길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알 수 없다. 일본이 학살 사실 은폐를 위해 혈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9월 4일 임시내각회의에서 “불령 조선인의 시체는 군대의 손으로 소각할 것”이라는 방침이 정해졌다. “근위 3연대 병사는 300명의 시체를 산처럼 쌓아놓고 폭발물을 투입하여 1.8M 정도의 도화선을 붙여 폭발시켰다”는 기록처럼 조선인의 사체는 산산이 부서지고 태워졌다. 홍철유의 유족에게 남아있는 사실은 그가 동경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뿐이다.
홍동선은 현재 관동학살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종수 목사를 우연히 만나 2016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추도식에도 나가고 유족도 만났다. 더불어민주당 유기홍 의원과도 만나 그를 통해 ‘관동대학살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추진 소식을 알게 되었고 몇 차례 면담도 했다. 그의 바람은 소박하다.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유해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다. 유족으로서 최소한의 바람이리라.
윤석열 대통령은 알고 있을까
1923년 관동대학살을 접하고 상해 임시정부의 조소앙 외무장관은 강제수용된 조선인의 석방, 재난 지역 한인들의 생사여부 조사, 학살 가해자의 엄중 징계 등을 요구하는 항의문을 보냈다. 물론 일본 정부는 이 문서를 철저히 무시했다. 해방 후 독립 정부가 되었지만 우리는 국가적 차원의 피해 조사를 하지 못했다. 이재동포위문반을 조직해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 관헌의 감시를 뚫고 목숨을 걸고 동포들의 피해를 조사했던 것에 비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일본은 2022년 12월 방위에 관한 3대 전략 문서를 공개했다. 여기에서 사실상 선제 타격이 가능한 반격 능력을 천명했다. 이로써 평화헌법은 휴짓조각이 되었고 일본은 언제든 전쟁 가능한 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일본과 군사동맹을 서슴없이 맺으려 하고 있다. 일본의 인도태평양전략, 일본의 패권국가 전략에 몸을 담그고 한국군을 자위대의 예속 군대로 만들려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관동대학살은 결코 100년 전의 문제가 아니다. 전쟁 범죄를 사죄하지 않는 일본은 언제든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관동의 제노사이드”를 다시 저지를 수 있다.
관동대학살의 유족 문제는 단지 핏줄의 문제가 아니다. 1920년대 일본 땅을 밟았던 노동자들은 대부분 일본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땅을 빼앗긴 농민이었다. 이들은 일본 땅에서 일본 노동자의 반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으며 탄광노동, 토목노동 같은 가장 힘든 노동에 종사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수탈당하고 일본 땅에서도 극심하게 착취 당하다 지진의 한가운데서 조선인을 적대시하고 차별하던 일본 제국주의의 총칼에 스러져간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다.
일본이 사죄하지 않고 전쟁 범죄를 되풀이하려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관동대학살 피해자의 정신적인 유족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유족 3세로 끝날 일이 아니다. 유족 4세, 5세가 되더라도 기필코 일본에 그 학살의 죄과를 물어야 할 일이다. 그래야 일본의 군국주의 행보를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다.
며칠 전 3.1절 기념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이 침략자에서 협력 파트너로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동 일원을 떠도는 6661명의 혼령은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 역사적 진실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을까?
<못다 한 이야기>
① 관동조선인대학살의 피해자수에 관해서는 2명(조선총독부사이토총독)에서부터 2만 3058명(독일 외무성 보고)까지 편차가 크다. 여기서 거론한 6661명이 나온 경과는 다음과 같다.
독립신문사 사장 김승학은 지진 당시 나고야에 있던 한세복을 지진 지역으로 보내 동포들의 피해에 대한 조사를 지시한다. 한편 재일조선 YMCA의 총무 최승학과 천도교 간부 박세직 등이 주도하여 ‘한인피해조사회’를 만들려 했으나 일본 경찰은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최승학 등은 대안으로 ‘이재동포위문반’을 만들었고 여기에 조선유학생학우회, 동아일보 특파원 이상협, 그리고 한세복 등이 참여했다. 일본 관헌이 피학살자의 시체를 암매장하거나 몰래 화장을 하는 등, 방해를 뚫고 조사보고서를 만들었다. 이 내용을 한세복이 김승학에게 편지 형식으로 보고했고 이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에 1923년 12월 5일 자 1면에 실렸다. 일본 정부가 진실을 은폐하고 조사를 방해하는 속에서 거둔 의미 있는 조사이고 지진 직후의 상황을 반영한 조사라는 점에서 가장 유력한 피해자 조사 중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② 김대원의 증언은 2009년 일본의 시민운동가들이 목포를 찾았을 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촬영한 영상이 있다. 이 영상기록과 신문을 통해 정리했다.
③ 200원의 구매력에 대한 판단은 광운대 김광열 교수가 쓴 논문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시 학살된 한인과 중국인에 대한 사후조치>에서 인용했다.
④ 1923년 전후 200원의 구매력은 얼마일까? 당시 기록을 보면 1919년 수원의 4인 가족 생활비는 25원, 같은 해 관청에 근무하는 일본인 하급 서기의 월급은 본봉 30원, 수당 20원 합하여 50원 정도다. 1920년 일용노동자 하루치 임금은 조선인이 1원 10전, 일본인 1원 50전이었다. 1920년 동아일보 1개월 구독료는 60전, 1924년 신문사 지방부 기자 월급이 40원, 정치부 기자가 50원이었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1923년 1원의 구매력은 오늘날 대략 7~10만 원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⑤ 최승만은 1987년 경기도 안산에서 태어안 최승만은 1917년 동경관립 외국어학교 노어과에 재학하다 유학생 최팔용과 함께 2·8독립선언을 발표했다. 지진 당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의 총무로서 이재동포위문반의 일원이 되어 피해조사를 다녔다. 이때의 경험을 <극웅필경>이라는 책자로 남겼다. 해방후 연희대학교수, 제주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민병래 기자
<2023-03-04>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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