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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보] [친일잔재, 부(負)의 유산으로 기록되다] ②현장의 기록들-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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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코스케 권업모범장장 흉상 좌대석에 대한 기록을 담은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 앞에서 전문가 위원이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정자연기자

②현장의 기록들- 수원
: 역사의 진실과 마주하다

수원 곳곳을 거닐다 보면 친일 잔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시민들이 오가는 공원에서, 혹은 우리에게 익숙한 상징적인 장소에서, 길가 등 일상에서 친일 잔재의 흔적은 마치 기념비처럼 스며들었다. 기념비인가 치욕스러운 일제의 산물인가. 명확히 알기 어려웠던 상징물들은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2021년과 2022년 설치한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으로 역사적 사실의 옷을 입고 시민들을 마주하게 됐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역사적 사실을 보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역사적 사실이 기록된 친일잔재의 상징물들을 찾아가봤다. 첫 번째 지역은 안내판이 9곳 설치된 수원이다.

(왼쪽부터)①수원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설치된 ‘수룡수리조합기념비’와 ‘치산치수지비’. ②치산치수지비와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 서강준기자

■ 조선의 식량을 수탈하기 위한 흔적들
일제는 조선의 쌀과 식량 생산량을 증대시켜 수탈하려 했다. 그 행위는 현재 수원시 권선구 소재의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부 인근에서 찾을 수 있다. 이곳에는 혼다 코스케 권업모범장장 흉상 좌대, 권업모범장 경계석, 잠업시험소·여자잠업강습소 표지석 등 친일잔재 상징물이 남아있다.

일제는 일본 농업 체계를 조선에 강제로 이식했다. 더 많은 쌀을 생산해 일본으로 수탈하기 위해서다. 권업모범장은 이러한 조선의 쌀 수탈을 위한 일본의 두뇌 역할을 한 곳이다.  ‘권업모범장 경계석’은 수원 권업모범장의 영역을 표시하는 경계석 중 하나로 1910년에서 1929년 사이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혼다 코스케는 이러한 권업모범장의 수장을 맡은 인물. 흉상은 도쿄미술학교 아사쿠라 후미오 교수가 제작했으나, 현재 흉상은 사라지고 좌대만 남았다. 좌대 앞면에는 ‘혼다 코스케 선생’을 일본어로, 뒷면에는 건립 내력이 ‘해강 김규진’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김도형 문화재 전문위원은 “1910~1920년대까지 일본식 우량 품종이라 명명한 것을 한국에 가져와 강제 보급하면서 우리의 전통적인 재래품종을 강제로 뽑아버리기도 했다. 일본식 품종은 많은 비료, 인력을 필요로 하고 우리 환경과 풍토에는 맞지 않았다”면서 “3·1운동 때 농민들이 반발한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전통적인 품종을 짓밟은 데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고 밝혔다.

일본 품종이 우리나라 환경에 맞지 않아 생산량이 오히려 떨어지자 조선총독부는 산미증식 계획을 시행했다. 1920~1925년 일본식 쌀 품종을 보급하는 1차 정책에서, 1926~1931년 저수지를 만드는 수리조합운동으로 나아갔다. 김 위원은 “애초 우리나라는 쌀뿐만 아니라 보리 등 곡식을 골고루 생산했지만, 지금 쌀이 미작 중심이 된 것은 이러한 일제시대의 쌀 중심 농법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상징물은 현재 서둔동 ‘수원농림학교 터’와 영통구 수원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세워진 ‘수룡수리조합기념비’와 ‘치산치수지비’에서 찾을 수 있다.

‘수원 농림학교 터’는 농업교육을 통해 일제의 농어기술 체계를 조선에 이식하는 농업 기술자를 양성하던 곳이다.

‘수룡수리조합기념비’는 당시 용인군 수지면 하리에 축조한 여천(원천)저수지와 신대저수지 두 곳의 준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수룡수리조합은 당시 경기도의 대표적인 수리사업으로 대지주들이 수익을 독점해 중소지주와 소작농의 몰락을 앞당겼다. 

‘치산치수지비’는 수원 지역 치산치수사업의 완료를 계기로 1941년 10월 수원군 일왕면장 이석래가 주도해 건립한 일제 기념물. 이러한 수탈물들은 철도를 타고 흘러흘러 일본에 다다랐다. 그중 대표적인 통로가 ‘수인선 철도’다. 경기도 해안 지방에서 만들어진 소금과 경기 동부 지방에서 생산되는 곡물까지 인천항으로 실어 일본으로 반출하는 역할을 했다. 

일제의 쌀 수탈과 관련된 상징물들은 오랜 세월 마치 기념비처럼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최근 ‘친일잔재 상징물 기념 안내판’이 설치되면서 상징물의 탄생 배경과 시대적 상황이 시민들에게도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수원 올림픽공원에 있는 ‘홍난파 동상’. 서강준기자

■ 친일 인물 과오 명확하게
수원특례시청 맞은편 수원 올림픽공원 주차장에서 10m가량 떨어진 곳에는 ‘홍난파 동상’과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널리 애창됐던 가곡 ‘봉선화’와 동요 ‘고향의 봄’의 작곡가인 홍난파. 일제강점기 음악계에 큰 업적을 남긴 그는 친일 행적으로 그 명과 암이 뚜렷하게 갈리는 인물이다.

동상은 1989년 10월14일 제38차 JC 전국회원대회를 기념해 한국청년회의소가 건립했다. 하지만 이후 관리가 되지 않았고 친일 논란이 불거지면서 철거 등이 논의되기도 했지만, 최근 역사적 사실을 담은 안내판이 세워지면서 친일잔재 상징물로 남게 됐다. 

수원 팔달구 팔달산에도 홍난파 노래비가 세워 있다. 노래비는 난파 홍영후가 태어난 지 70년이 되던 해를 기념해 1968년 건립됐다. 

홍난파는 1998년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됐으나 학계에서 친일 행적을 알리면서 최초로 서훈이 취소된 인물이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홍난파 노래비 앞에 친일잔재임을 알리는 상징물을 세우자고 여러 차례 주장했는데 민간에서 이를 설치하면 철거와 설치가 반복됐을 것이다. 하나의 역사적 문제를 놓고 사회적 갈등이 이어졌을 것”이라며 “경기도가 관에서 안내판으로 친일잔재임을 명확히 명시한 것으로 매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사단법인 난파기념사업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오랜 기간 논쟁을 이어오며 협의한 부분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오현규 난파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논쟁은 정확한 사실 기재와 그 사람의 모든 과오를 밝혀 역사에 맡기는 게 맞다”라고 판단해 ‘새로 쓴 난파 홍영후 연보’를 새로 만드는 등 무조건적인 찬양이나 비판보다는 인물의 ‘과오’를 명확히 알리는데 힘썼다. 

이러한 경기도에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이 설치된 것은 총 17곳이다. 이 중 수원에 설치된 상징물 안내판만 절반 이상인 9곳에 달한다.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사회적 공감대를 꼽는다. 

이동근 수원박물관 교육홍보팀장은 “수원은 2017년부터 3.1운동 100주년 사업을 준비하며 이와 관련된 일들을 시민과 함께 하겠다고 밝히고, 성금 모금 등을 진행했다. 그 과정 속에서 어느 정도의 문제의식과 공감대가 형성된 측면이 있다”면서 “친일잔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의식 확산, 공감대 형성을 통한 시민·사회적 합의가 잘 이뤄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정자연 기자 jjy84@kyeonggi.com

<2023-03-08> 경기일보

☞기사원문: [친일잔재, 부(負)의 유산으로 기록되다] ②현장의 기록들-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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