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박종훈
1948년 제주 4·3사건(4·3항쟁)은 1947년 3·1절 기념식을 계기로 폭발했다. 이 일이 남북분단을 반대하는 투쟁으로 발전하면서 미군정 및 경찰에 의한 대규모 양민 학살로 변모했다. 이렇게 된 데는 3·1절 사건에 대한 미군정의 초기 대응도 크게 작용했다.
3·1절 때 제주도민들은 어린이에게 상처를 입힌 뒤 방치한 기마경찰의 처사에 대해 항의했다. 그런 양민들을 향해 미군정 경찰은 무차별 발포를 감행해 6명을 희생시켰다. 이에 대해 미군정이 잘못 대응한 것이 상황을 더욱 확대시켰다.
그해 3월 21일 자 <대동신문>에 따르면, 20일 자 미군정청 담화문 제1항은 “제주감찰청 관내 제1구 경찰서에서 발포한 행위는 당시에 존재한 제반 사정으로 보아 치안유지의 대국에 입각한 정당방위로 인정함”이라고 선언했다.
담화문 제2항은 제주도립병원 앞에서 발포한 이문규 순경의 행위는 “무사려(無思慮)한 행동”이므로 행정처분에 처해야 한다고 했다. 제주경찰감찰청 산하 제주경찰서가 벌인 민간인 살상을 정당방위로 인정하는 한편, 이 엄청난 사건의 책임을 일선 경찰관 1명에게 떠넘기는 꼬리 자르기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군정은 위와 같은 처분의 근거가 자신들의 판단에 기인한 게 아니라는 점을 담화문에서 강조했다. 제주지방검찰청장, 제주고녀(현 제주여중고) 교장, 제주 읍내 주민 등이 포함된 ‘제주도 제주읍 삼일절 발포사건 조사위원회’의 판단에 기초해 정당방위로 결론 내렸음을 담화문에서 언급했다.
진상 왜곡을 주도해 4·3 파국을 초래하는 데 가담한 조사위원장인 박종훈 미군정청 제주지방검찰청장의 인생에는 특징이 있다. 강력한 외국 세력에 가세해 한국 민중의 궐기를 탄압했다는 점이다. 미군정 때뿐 아니라 일정 때도 그는 한국인들에게 불리한 판단을 외국 세력에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박종훈은 1895년 6월 5일 제주에서 출생했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이 시점은 그해 5월 26일 자 칙령 제98호 ‘지방제도 개정 건’에 따른 23부제 시행으로 제주부라는 행정구역이 등장한 뒤였다. 청일전쟁 중에 청나라의 간섭이 끝난 뒤인 1895년 1월 12일부터 조선 군주의 칭호가 주상 전하에서 대군주 폐하로 격상됐으므로, 대한제국 선포 이전인 이 시기는 ‘칙령’이란 표현과 어울리는 때였다.
대한제국 시대에 제주공립소학교에 입학한 박종훈은 국권 침탈 1년 뒤인 1911년 16세 나이로 졸업하고 1913년에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했다. 그런 뒤, 그 시절 로스쿨인 경성전수학교에 들어가 1916년에 졸업했다.
그해에 21세 나이로 전라남도(제주 포함) 서기가 되고 1919년 제주도 서기가 되고 1921년 제주도 속관이 된 그는 1922년에 법원 직원으로 변신했다. 27세인 이때,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 서기 겸 통역생이 됐다. 지방법원 지원이 지청으로 불리던 시기에 서기 겸 일본어 통역이 됐던 것이다. 법원에 일본어 통역이 필요했던 것은 재판석에 앉은 사람 대다수가 한국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친일파 인생
그 뒤 장흥지청과 순천지청으로 옮긴 그는 1925년 30세 나이로 사법관시험에 합격해 진주지청 검사, 대전지청·장흥지청·강경지청·상주지청 판사를 역임했다. 검찰청이 독립되지 않아 지청에 판검사가 함께 있었던 시절이다. 그런 시절에 진주지청 검사분국 검사로 시작해 판사로 전업했던 것이다.
1916년부터 일본제국주의의 밥을 먹은 그는 이 생활을 1936년까지 계속됐다. 금액의 다소를 떠나 20년간 친일재산을 축적했던 것이다. 일제 판검사까지 역임했으니, 영락없는 친일파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일제 식민지배기구에 참여해 이를 작동시키는 데 가담한 것만으로도 친일부역행위가 된다.
박종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시국사건 재판에도 참여해 독립운동 탄압을 합리화하는 데 가담했다. 4·3 때 ‘현지인들의 판단’을 제공해 미군정의 탄압을 합리화했던 것처럼, 일제 때는 ‘한국인 판사의 판단’을 제공해 일제 재판에 대한 반감을 줄이는 역할을 했다.
그가 처리한 독립운동 재판 중 하나인 광주학생운동 소송과 관련해 <친일인명사전> 제2권 박종훈 편은 “장흥지청 판사로 재직 중이던 1931년 8월, 김무삼·정석규·김몽길의 재판을 맡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집행유예를 취소하고 징역형을 선고했다”라고 설명한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발행한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은 위에 언급된 독립투사 김무삼(1908년 생)과 관련해 “1929년 6월 하순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김상환·김보섭·김대원 등이 주도하여 결성한 독서회에 참여하였다”고 한 뒤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해 저항하는 비밀결사 조직이었다”라고 해설한다. 그런 다음, 광주학생운동 당시의 활약상을 이렇게 서술한다.
“같은 해 10월 30일 나주에서 한일 학생 간의 충돌을 계기로 11월 3일 광주에서 항일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김상환·김보섭 등 독서회 회원들과 함께 가두시위에 참여했으머, 11월 12일 2차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김무삼은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난 뒤, 독서회 활동으로 다시 붙들려 새로운 형을 선고받았다. 이 때문에 집행유예형을 취소하는 재판을 박종훈이 맡게 됐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운영하는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에 따르면, 판사 박종훈은 “대구복심법원이 소화 4년 5월 30일 피고인 김몽길에게, 소화 5년 5월 15일 피고인 김무삼, 정석규에게 각 내린 집행유예의 언도는 이를 취소한다”라고 선고했다.
위 선고는 1926년부터 사용된 히로히토 일왕(천황)의 연호인 쇼와(소화)라는 표현을 사용해가며 일제의 한국 지배를 사법적으로 대리하던 박종훈의 모습을 보여준다. 판사가 된 다음 달인 1928년 11월 ‘쇼와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은 그는 위와 같은 ‘공로’들이 인정돼 1934년 12월 일본 훈장인 서보장을 받게 됐다.
제주도민의 분노 촉발시킨 박종훈
1936년 7월 판사직을 그만둔 박종훈은 일제를 위해 살아가는 자신의 본성을 1939년부터 다시 보여줬다. <친일인명사전>은 “1939년 10월 제주경방단 부단장을 맡았으며, 11월 제주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라고 설명한다.
2018년에 <한국행정사학지> 제43호에 실린 역사학자 김상욱의 논문 ‘일제강점기 소방기구의 변천과 역할’은 “화재 진압을 위해서 일본에서 만들어진 소방조는 한국에서는 화재 진압은 물론 일본인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경찰보조 역할을 담당하였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1915년 조선총독부소방조규칙이 발포되면서 소방조는 일제의 식민통치 보조기구로 변화되었다”라고 한 다음, “1937년 4월 2일 공포된 방공법의 제정으로 경방단이 발족되면서 소방은 전쟁총력체제의 솔선 단체로 탈바꿈하였다”라고 서술한다.
박종훈은 사법부 판사로 일제에 부역하다가 판사를 그만둔 뒤 소방 및 일본인 보호를 위한 경방단에 가입했다. 일제 판사를 그만둔 뒤에도 제국주의를 보조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1945년 8·15 해방은 그가 판사로 컴백하는 계기가 됐다. 일본인들이 비운 판검사 직을 한국인들이 채우는 분위기 속에서 그해 10월 제주지방법원 검사가 됐고 잠시 그만둔 뒤 제주지방검찰청장으로 복귀했다. 그런 다음, 제주도민들에 대한 경찰의 발포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제주도민들의 분노를 촉발시킨 박종훈은 해방된 제주를 4·3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데 일조했다. 친일 못지않은 범죄를 해방 뒤에 다시 저지른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은 “1956년 5월 제주도에서 변호사 업무를 재개했으며, 그해 제주자동차주식회사사장을 지냈다”라고 말한다. 자기 고향에 4·3의 아픔을 줬으면서도 거기서 변호사 업무를 재개했던 것이다. 친일파치고도 양심이 너무 무딘 편이었다.
김종성 기자
<2023-03-05>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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