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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노예살이에 평생 속앓이” 日 강제동원 생존 피해자들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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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동원 손해배상 원고 중 생존 피해자는 3명 뿐
“기술 배운다” “진학·취업된다”에 속아 전범기업서 노역

무일푼 노동, 비인간적 대우…귀국 후 “위안부냐” 눈총도

90대 고령에도 “동냥 받듯 돈 안 받아” 정부 배상안 반대

[광주=뉴시스] 이영주 기자 =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93) 할머니가 6일 광주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열린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광주전남역사정의평화행동의 기자회견에 참여해 정부가 내놓은 일제강제징용 피해배상 관련 해법인 ‘제3자 대위 변제안’을 비판하고 있다. 2023.03.06. leeyj2578@newsis.com

[광주=뉴시스] 변재훈 기자 = 일제 전범기업을 대신해 한국 기업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손해 배상하는 이른바 ‘제3자 병존적 채무 인수'(제3자 대위변제) 방식의 정부 해법이 공식화됐다.

이를 두고 ‘사법 주권 포기’, ‘식민 지배 정당화 빌미’, ‘굴욕 외교’ 등 거센 비판이 일었고, 생존 강제동원 피해자도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수 십년째 제대로 된 사죄·보상을 받지 못한 강제동원 피해자의 절절한 아픔을 들여다봤다.

12일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에 따른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손해 배상 소송을 벌여 지난 2018년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원고는 15명(3건)이다.

이 가운데 생존 피해자는 이춘식(100) 할아버지, 김성주(95) 할머니, 양금덕(94) 할머니 등 통틀어 3명이다. 20년 가까이 일본·한국의 법정을 오가며 펼쳐진 오랜 소송 과정에서 나머지 원고들은 세상을 등졌다.

이 할아버지는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강제징용 피해 배상 소송 원고 중 유일한 생존자다. 김 할머니와 양 할머니는 갓 초등학교를 마친 14살 어린 나이에 미쓰비시중공업에 끌려간 근로정신대 피해자다.

“기술자 취업인 줄 알았는데”…3년 공짜 노동

이춘식 할아버지는 일제 치하였던 1924년 1월 27일 전남 나주군 평동면(현 광주 광산구)에서 태어나 17살이 되던 해에 나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서울 용산구의 옛 상업고등학교(상공학교) 재학 중 남대문 인근 일본인이 운영하는 석유회사(일미광유)에 취업했다.

석유회사 지점장은 ‘성실하고 똑똑하다’며 이 할아버지에게 일본 현지 기업에 ‘기술자 취업’을 추천했다. 이 할아버지는 ‘공부보다는 잘 사는 일본에 가서 기술을 배우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 순순히 응했다.

대전에서 모인 고등학생 80명과 함께 부산항을 거쳐 시모노세키로 향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1월 이 할아버지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일본 이와테현(岩手縣) 소재 일본제철 가마이시 제철소에 투입됐다.

[서울=뉴시스] 김선웅 기자 =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씨가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신일철주금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상고심 판결에 참석, 선고를 마친 후 법원을 나와 기자회견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대법원은 일본 기업이 강제징용 피해자에 1억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2018.10.30. mangusta@newsis.com

이 할아버지는 동원 직후 ‘5중대’에 배속, 200~300명과 함께 기숙사 합숙 생활을 했다. 일본군 출신 사감과 경비의 엄격한 관리 속에서 이 할아버지는 3년간 고철 공장에서 석탄을 퍼올리고 용광로에서 녹인 철을 빼내는 일을 맡았다. 매일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단순 노동이었다.

1945년 1월 9일에는 일본군 8875부대로 징발됐다. 연합군의 폭격으로 휴교 중인 일본 고베 내 한 학교에서 태평양전선에서 붙잡힌 미군 포로를 감시하는 간수 역할이었다. 강제징용 7개월여 만에 일제가 패망, 부대가 해산되자 가마이시제철소를 홀로 찾아가 3년치 월급을 요구했지만 받지 못했다.

이 할아버지는 구술록을 통해 “공장에서 일한 것도, 군대 간 것도 나라가 다 저금해준다고 했다. 본인에게 한 푼 준 것 없었다”며 “돈 달라고 갔을 때에는 폭탄을 맞아 허허벌판이 됐더라고…”라고 회상했다.

“손가락 잘려도, 동생 죽어도 벗어날 수 없던 감옥살이”

김성주 할머니는 1929년 순천 중앙동에서 ‘한약방집’ 손녀로 태어났다. 순천공립심상소학교(현 순천남초등학교) 재학 중이던 1942년 김 할머니의 아버지는 경남 진해 부근 비행장 활주로 공사장으로 강제 징용됐다. 이후 14살 되던 해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잇따라 여의고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김 할머니는 “일본에 가면 중학교, 고등학교도 보내주고 좋은 회사에 취직도 시켜준다”는 일본인 교사의 말에 속아 1944년 5월 여수항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친할머니의 만류로 뒤늦게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일본인 교사는 “이미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며 묵살했다.

[서울=뉴시스] 이영환 기자 =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가 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굴욕적인 강제동원 정부해법 강행 규탄! 일본의 사죄배상 촉구!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2023.03.07. 20hwan@newsis.com

김 할머니는 한 달여 동안 군대식 제식 훈련을 받았고 철판 녹을 닦고 못 박는 일 등을 배웠다. 이후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 도토구 공장에 파견돼 전투기 외장재(철제판)를 자르는 일을 했다.

작업 도중 왼쪽 집게 손가락이 절단기로 빨려 들어갔지만 마땅한 봉합 수술을 받지 못했다. 일본인 남성은 잘린 손가락 마디를 공중에 던지며 조롱까지 했다. 6살 난 남동생의 죽음에 고향을 다녀오겠다고 했지만 “계약기간이 남았다”며 사실상 노예 생활을 했다.

도난카이 지진(1944년 12월 7일 진도 7.9 강진)으로 고향 친구 6명을 잃는 아픔도 겪었다. 김 할머니는 당시 삶을 “감옥살이였고 노예살이였다”고 자서전에 썼다.

김 할머니는 1945년 10월에야 제대로 된 급여 없이 귀국했다. 이후 열아홉 되던 1948년 결혼했지만 남편은 김 할머니를 ‘위안부(일본군 성노예)’로 오해하며 “사실을 숨긴 채 결혼했다”고 모진 구박을 일삼았다.

동생 김정주(92) 할머니도 일본 후지코시 강재 주식회사에 강제징용, 귀국 뒤 결혼했으나 ‘위안부’ 오해를 받아 이혼했다. 김정주 할머니는 2013년부터 후지코시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아직 대법원 계류 중이다.

“한 푼 못 받는 중노동…홧병으로 떠난 부친에 죄책감”

나주 출신인 양 할머니는 당시 초등학교 6학년생(14살)으로 “일본에 가면 일도 하면서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일본인 교장의 꾐에 넘어가 동급생 등 24명과 함께 일본에 갔다.

양 할머니는 비행기 부품을 만드는 미쓰비시중공업 공장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식사 한 끼 제대로 하지 못했고 ‘가미카제(神風)’라고 쓰여진 머리띠를 이마에 두른 채 24시간 감시를 받으며 중노동을 강요 당했다.

출고 전 군용기를 도색하며 밤낮 없이 일했지만 18개월 치 월급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사측은 타향에서 고된 일을 하는 소녀들에게 “저금해놨다가 주소지에 보내줄테니 걱정 말라”고 속였다.

[광주=뉴시스]변재훈 기자 = 23일 오후 광주시의회 시민소통실에서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지원회’ 다카하시 마코토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대법원 강제동원 배상 판결과 한·일 갈등에 대한 간담회가 열리고 있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다카하시 대표가 찾아낸 ‘미쓰비시 사보 40년사’ 사본도 공개됐다. 사보 내 직원근무 현황에는 (사진 빨간 선 안) ‘여자정신대’, ‘반도인 징용’ 등이 명시돼있다. 2019.09.23. wisdom21@newsis.com

도망을 치다 붙잡힌 동료가 모진 매질을 당했던 기억이 아직도 머릿 속에 생생하다고 양 할머니는 전했다.

해방 이후 가까스로 고향에 돌아왔지만 양 할머니 역시 ‘일본에 다녀 왔다. 위안부 아니냐’는 따가운 눈초리에 시달리며 숨죽여 살아야 했다. 양 할머니는 아버지가 자신 탓에 홧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며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양 할머니는 최근 공식화된 정부 배상 해법에 “”동냥해서 (주는 것처럼 하는 배상금은) 안 받으련다. 그런 돈은 죽어도 안 받는다”며 수용 불가 입장을 분명히 했다. 100세를 바라보는 고령에도 정부의 배상 해법을 반대하고자 또다시 국회와 거리로 나섰다.

앞서 박진 외교부 장관은 지난 6일 2018년 대법원 확정판결 3건의 원고에게 판결금·지연이자를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지급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재단이 한·일 청구권 협정의 수혜기업으로부터 출연금을 받아 배상 확정판결 피해자 15명에게 배상한다는 것이 골자다. 배상 대상인 피해자에게 피고인 일본 전범기업이 지급해야 할 판결금은 지연이자까지 40억여 원 규모로 추산된다.

그러나 일본의 직접 사과는 불발됐다. 대신 일본은 식민 지배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담은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 등을 계승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할 예정이다.

[광주=뉴시스] 김혜인 기자 = 광주전남역사정의평화행동이 11일 오후 광주 동구 충장로에서 ‘윤석열 정부 강제동원 해법 무효 범국민서명운동 선포식’을 열고 정부의 일제강제동원 배상안 폐기를 촉구하고 있다. 2023.03.11.hyein0342@newsis.com

<2023-03-12> 뉴시스

☞기사원문: “노예살이에 평생 속앓이” 日 강제동원 생존 피해자들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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