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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국치 ― 그 치욕이 되풀이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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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 3·1절 기념사 평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왜냐면] 고정휴 |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명예교수

부끄럽다. 참으로 부끄럽다.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이자 이 나라의 역사를 가르쳤던 선생으로서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돌이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 초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21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일어나고 있다. 한 세기 전, 대한제국의 고종과 순종은 국가를 자기의 소유물처럼 생각하고 일본에게 제국의 주권을 넘기는 대신 일신의 안일을 도모했다. 이때 망국의 대가와 그 치욕은 목숨과 재산을 바쳐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백성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백성들은 9년 뒤 왕이 아닌 국민이 주권자가 되는 나라를 세웠다.

3·1운동의 역사적인 의의는 비단 공화정부의 수립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힘이 곧 정의가 되는, 그리하여 문명의 이름을 내걸고 약소민족을 침탈했던 제국주의 시대의 종언을 고하고자 했던 데 더 큰 의의가 있었다. 대내적으로는 군주 주권을,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를 청산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3·1운동은 이중의 혁명이었다. 수천, 수만 명이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희생당했다. 우리는 그 소중한 역사적 유산 위에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부정하는 행위들이 지금 이 순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발단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있다. 그는 ‘제104주년 3·1절 기념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과연 그러한가? 청일전쟁, 러일전쟁, 이른바 만주사변, 중일전쟁,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이 그들의 ‘군국주의 침략’ 역사를 진정으로 반성한 적이 있었던가? 일본은 미국에게만 고개를 숙였을 뿐 일본의 침략과 지배의 직접적인 희생자였던 아시아 국가와 국민들에게 제대로 된 사죄와 배상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일본이 어떻게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서 ‘보편적 가치’란 또 무엇을 일컫는가? 그것이 자유와 인권, 또는 평화라면 이웃 나라에 대한 침략과 지배의 역사를 부정하는 나라와 어떻게 이들 가치를 공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잘못된 역사 인식은 잘못된 결정을 낳는다. 일본은 과거사는 물론이고 현재 교착 상태에 빠진 한·일 관계의 모든 책임을 한국과 한국인에게 돌리고 있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오히려 한발 더 나아가고 있다. ‘유사시’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진입도 공언하고 있다. 그들이 군사대국화의 길로 들어섰다는 우려와 비판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는 일제 침략전쟁에 강제 동원됐던 한국인들에 대한 배상을 한국 기업들이 책임지게 하겠다고 나섰다.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그리하겠다는 것인가? 국가의 일차적 책임은 국민 개개인의 안전과 행복 그리고 인권을 보호하는 데 있다. 그런데 현 정부는 자기의 모든 것을 던진 투쟁 끝에 얻어낸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정당한 법적 권리마저 외면하고 있다. 그러면서 ‘미래지향적인 결단’이라고 내세운다.

이러한 태도의 밑바탕에는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이라는, 따라서 국가의 결정에 개인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전체주의적인 사고가 깔려 있다. 일본의 군국주의가 그러했다. 민권보다는 국권이 항상 먼저였고, 그 결과는 침략전쟁에서의 패망이었다. 우리가 이러한 역사로부터 배워야 하는 교훈이 있다면, 국민 개개인의 생존과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국가만이 그 존재 의의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떠받드는 종복이지 국민 위에 군림하는 통치자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2023-03-13> 한겨레

☞기사원문: 국치 ― 그 치욕이 되풀이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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