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기득권의 역사를 민초의 역사로 ‘바로 세우다’
좌파 50인에 들지 못했으니 분발하세요!
”아이! 고얀년 같으니라고!“
허름한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이이화가 휴대폰으로 온 문자를 보고 갑자기 내뱉은 말이다. 함께 술을 마시던 이들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이이화는 껄껄 웃으면서 문자를 읽어주었다.
“이번에 좌파 50인에도 선정이 못되었으니 분발하세요!”
딸에게서 온 문자였다. 아버지가 조선일보 등 보수 세력이 만든 대한민국 좌파 지식인 50인에 들지 못했다고 열받아서 분발하라고 보낸 딸의 문자를 읽어주는 이이화의 모습을 보며 막걸리를 마시던 사람들은 포복절도 하고 말았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대한민국 최고로 특별한 좌파 가족의 한 모습이었다.
주역의 대가 야산 이달 선사의 아들
이이화는 동방 주역(東邦周易)의 대가로 이야기되는 야산(也山) 이달(李達) 선사(禪師)의 아들이다. 야산 이달은 일반인들이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초월적 인간이었다. 그는 어려서 스승없이 우주자연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는 홀로 유학과 역사를 공부하면서 주역을 우리 동방의 역사와 연계하여 홍역학(洪易學)을 창시한 인물이었다.
이달은 자식들의 이름을 모두 주역의 64괘 중 의미 있는 괘로 이름을 붙였다. 이이화의 이는 바로 주역의 30번째 괘인 중화리(重火離) 괘의 이(離)를 쓴 것이다. 이(離)는 위도 불이고 아래도 불이어서 동중정(動中靜)의 자세를 취해 중심을 잘 지켜야 길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실 ‘이(離)’는 불을 뜻하는 것으로, 이 괘 때문인지 이이화는 평생 불같은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 역시 아버지가 지은 이름 때문에 자신의 성격이 불 같았다고 말하곤 했다.
4형제 모두 주역의 괘를 따서 이름을 붙였던 이달은 자신의 후계자로 넷째 아들인 이이화를 선택하였다. 이달의 아들 모두가 자신을 닮아 똑똑하다고 생각하였으나 넷째 아들만한 기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거기에 더해 생김새도 거의 같았다. 이것이 이이화에게는 행운이자 불운이었다.
이달은 제자들과 아들 이이화에게 엄격하고 혹독한 교육을 했다. 충남 논산 대둔산 석천암에서의 주역 공부는 4계절과 밤낮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학습의 연속이었다. 조선시대 스승의 집에서 공부를 하는 학습방식이 그대로 적용되어 유학의 기초부터 시작해서 주역 전반을 외우고 그 의미를 풀어내고 마지막에는 깨달음의 경지로 이르는 공부를 지속하였다.
이이화는 학문적 능력이 대단해서, 아버지로부터 배운 주역을 깨우치고, 상당한 유학의 기반을 닦았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15살이 될 때까지 그의 한학 공부는 계속되었지만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그는 아버지의 강한 교육을 더이상 감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가출을 결심했고 마침내 15살에 아버지로부터 탈출하고 말았다. 그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가장 밑바닥 민중과 함께
이이화의 가출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출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지만 훗날 보자면 그를 위대한 ‘민중주의 역사가’로 만든 위대한 출가이기도 했다. 1950년대에 낯설고 물설은 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식당에서 일하고 ‘노가다’라고 불리는 공사현장에서의 막노동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한문만 공부했던 그는 부산의 고아원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6.25 때문에 서울서 내려온 한영중학교에 시험을 보았는데 무려 1등으로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여학생들을 성폭행하는 등 학교 비리가 심하여 이이화는 학교를 그만두고 광주(光州)로 갔다. 1955년 광주의 한 학원에서 가짜로 발급해준 중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 들어간다는 광주고등학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이이화는 평소 술자리에서 늘 종횡무진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혼나던 이야기부터 목포에서 구두를 닦던 이야기, 그리고 역사학자들과의 술자리에서 일어나 오줌을 갈긴 이야기로 이어진다. 명문대 출신들의 교수들이 폼잡으며 떠드는 이야기를 참지 못할 때면 그는 특유의 광기로 식탁 위로 올라가 바지춤을 내리고 소변을 갈기고는 하였다. 그들에게 주는 일종의 선물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장광설에서 반드시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광주고 시절의 문예반 활동과 경제적으로 어려운 고통스런 삶이었다.
고향이 대구 비산동 출신인 그가 호남 일대 수재들이 다닌다는 광주고등학교에 진학을 했지만, 그에게 따스한 밥한끼와 등따시게 누울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학교에 다니기 위해 여관에서 종업원을 하며 온갖 심부름을 다하면서도 끊임없이 책을 읽었다. 아마도 그의 이런 삶이 그를 더욱더 철저하게 민중주의 역사학자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생활속에서 민중들이 지닌 강인함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명확히 느끼게 된 것이다.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새로운 인생을 열다
이이화가 세상에 이름을 내기 시작한 것은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일을 하게 된 것 때문이다. 광주고등학교 문예부장은 무조건 서울대 문리대 입학이라는 공식이 있었으나, 그는 여러 상황으로 서울대 문리대를 들어가지 않고 서라벌예대(중앙대 예술대) 문예창작학과로 진학했다. 하지만 어머니 병간호 때문에 대학을 그만두고 치료비 마련을 위해 돈벌이를 시작했다.
서라벌예대를 그만둔 뒤에 명동에서 리어카를 끌고 군밤 장사를 했다. 낮에는 군밤장사 허용을 안해줬으니 저녁에 장사를 해야 했다. 낮에는 오늘날 롯데호텔 자리에 있는 국립도서관에 가서 역사공부를 하고 밤에는 군밤장사를 했다. 그때 광주고등학교 동기들이 서울에서 한창 잘나가고 있었을 때 군밤장사를 하는 그는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묘한 오기심으로 오히려 역사공부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역사 공부가 진짜 직업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군밤 장사만으로 돈을 버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힘든 것이다. 몸도 작고 체력이 강한 편이 아니어서 건축 공사현장에서 몸으로 일을 하여 돈을 버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저런 일을 가리지 않고 하던 차에 1967년에 동아일보 출판부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원고를 다듬고 교열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한문을 알고 고등학교 다닐 때 문예반이었기 때문에 문장을 다듬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은 1년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신문사가 일방적으로 부서를 없애 해고했기 때문이다.
이후의 직업이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이이화는 서울 구기동에 있는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사료를 번역하는 국역연수원 1기생을 뽑는 공고를 보았다. 어린시절 아버지에게 배운 한문 실력이 있어 응시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배우다 만 한문 실력이라 그곳에서 일을 잘할 수 있을지 자신감이 들진 않았다. 하지만 노가다로 사는 인생보다는 역사 사료를 보는 일을 하고 싶은 생각에 결국 응시를 했고, 합격이 됐다.
젊은 이이화는 이곳에서 어려운 고전과 자료를 보며 연구자들을 돕는 일을 했다. 그런데 본인은 어린 시절 몇 년 배우지 않은 한학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서 보니 본인의 한문 실력이 최고 수준이었다. 그래서 3년 만에 국역실장이라는 중책을 맡을 정도가 되었다. 이이화는 훗날 아버지한테 도망가지 않고 더 공부했다면 훨씬 내공이 깊었을텐데라고 하는 아쉬움을 여러 번 토로했다.
친일 역사학에 대한 항거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 3년을 일하고 서울대 규장각으로 가서 일을 했다. 서울대 출신들이 생각보다 한문을 잘 읽지 못해서 고전 해제를 할 수 있는 한문 고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서울대 규장각에서 그는 더 많은 자료들을 보게 됐다. 그 자료들 대부분이 아무도 보지 않은 자료들이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 조선시대 관찬사서만으로 역사연구를 하고,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출신의 교수들과 그 후예들이 역사 학계를 장악하여 식민사관의 틀을 깨지 못하던 시절에 이이화는 다양한 사료들에 나오는 민초들과 백성의 영웅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이후 가르쳤던 역사가 진실이 아니고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이화의 제2의 탄생이다.
이이화의 첫 번째 탄생은 아버지 이달로부터 시작한 것이고, 제2의 탄생은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다양한 문집을 보다가 세상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절실함과 용기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의 제2의 탄생은 신생 잡지 ‘뿌리깊은 나무’의 기고로부터 출발했다. 우리가 배웠던 역사에서 역적으로 불리던 자들이 갑자기 민중의 영웅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역적 정여립이 민중의 영웅이고, 허균의 누나로만 알고 있던 허난설헌이 조선시대 가부장적 제도에 저항했던 불우한 천재였다는 사실과 만적이 고려시대 신분 해방을 위해 투쟁한 대혁명가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묘청과 정지상의 자주화 투쟁과 김부식의 사대주의도 이야기했다. 이이화란 인물이 세상에 등장하고 나서 역사연구의 방향이 혁신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기존 학계의 연구자들이 겨우 서라벌예대 중퇴인 자가 무슨 연구를 하느냐고 비아냥 거리다가 그와 마주 대하고는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탁월한 사료 해석 능력과 엄청나게 읽은 자료들은 명문대학 출신의 대학원 졸업생이라고 하는 허명을 그대로 박살내어 버렸다.
1980년대 광주민주항쟁 이후 1987년 호헌철폐 투쟁으로 시작된 6월 항쟁이 승리하면서 민중들은 역사속에서 박종철과 이한열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이이화는 리영희 교수와는 또 다른 사상의 은사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책은 나오면 큰 성공이었고, 노동의 현장과 대학의 광장에서 그의 책을 끼고 다니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 그가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에 합류하면서 그의 역사관은 더욱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민중주의 역사학이 우리 세상에서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이이화의 민중주의 역사관
이이화는 철저하게 민중적이었다. 그는 역사의 발전은 민중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지배 계층 혹은 소수의 몇몇 지도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집중적으로 연구한 것이 바로 19세기 민란(民亂)이자 동학(東學)이었다.
이이화는 1800년 6월 위민군주 정조(正祖)의 죽음 이후 조선의 개혁은 사라지고 지배층의 부정부패가 민중을 고통속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다. 이때 전국에서 수많은 민란이 일어났고, 마침내 동학이 일어났다.
사실 그의 민중주의는 보이지 않게 부친 이달 선생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달은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주역의 대가였다. 주역 사상의 근본은 ‘변화’다. ‘역(易)’이 바로 ‘바뀌는 것’ 아닌가! 주역의 변화로 보자면 역사도 변하는 것이다. 신분차별, 양반, 상놈, 부자와 가난뱅이 이런 것이 다 바뀌는 것이 ‘역’이다. 이 ‘역’의 사상을 이달은 가지고 있었고, 이 혁명의 사상인 ‘역’을 아들 이이화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당시 야산 이달은 일제강점기 시기에 백범 김구처럼 투쟁을 하지 못하지만 ‘주역 이론으로 의식을 개조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주역 이론이 품고 있는 ‘혁명의 사상’이 아들 이이화에게 전해져 그는 민중의 혁명을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역사가에서 민주주의 전사로
이이화는 역사가 곧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역사 연구자가 단순히 연구실 안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살아 숨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민주화운동의 현장과 인권 운동의 현장으로 나오게 됐다. 오랫동안 억눌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운동판으로 역사가가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바로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떠한 기득권과도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자유롭고 거침없이 친일청산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이이화의 친일청산 주장을 젊은 역사연구자들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운동가 그리고 개혁적 정치인들이 받아들이면서 한국 사회에서 친일청산의 요구가 높아졌다.
이이화는 한국전쟁 때 발생된 민간인 학살운동 진상규명을 적극 추진했다. 한국전쟁 기간에 무려 100만 명 가까운 민간인이 학살당했는데, 이에 대한 진상규명은 전혀 논의조차 진행되지 않았다. 친일파에서 친미파로 변신하여 오늘날까지 기득권을 유지하는 이들에게 한국전쟁 기간중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만을 위한 진상규명위원회 설치를 정부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고 판단한 그는 노무현정부 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이 일을 규명하는 기반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이이화의 적극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한국전쟁 기간중 민간인 학살의 진상 규명은 아예 이루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리고 이이화는 동학농민혁명의 새로운 조명을 시도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고 녹두장군 전봉준이 사형당해 효수된 자리에 그의 동상을 세우는 일을 했다.
이이화는 이 세 가지 일이 바로 인권운동이자 민주화운동이라고 생각하였다. 카랑카랑한 그의 목소리로 민주주의와 역사바로세우기를 강의할 때면 마치 우레가 치는 듯한 강렬함이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시민들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 마다 환호하고 그의 말대로 잘못된 세상을 혁파하고 민중의 나라, 민주주의가 가득한 나라 만들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야말로 그는 민주주의 전사인 것이다.
3월 18일은 이이화 선생의 3주기이다. 평생 친일 역사학과 기득권 역사학자들과 싸운 그가 세상과 이별한 지 3년이 된다. 그 사이 대한민국은 일본의 새로운 식민지 국가로 전락하는 것 같고, 나라 경제는 망해가고 있다. 일본에 대한 굴종외교에 대해 역사학계의 상당수 단체들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지만 누군가 나서서 이 망령스런 정부에게 제대로 된 쓴소리를 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이이화가 살아 있었다면 어떤 모습을 했을 것인가? 그는 거대한 포효를 울리며 윤석열 정부를 질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이이화 선생이 그립다. 정말 그립다.
김준혁은 역사학자다. 정조(正祖)가 건설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경제적 기반인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화성의 복원 등에 참여하였고,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을 지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리더라면 정조처럼> 등 정조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오랫동안 수원에서 시민운동을 하였고, 촛불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2023-03-16> 뉴스버스
☞기사원문: 친일역사학에 대한 항거, 이이화의 민중주의 역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