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톺아보기 47]
식민지 조선을 장악한 헌병경찰
–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 속의 전국 경찰서
지난 민족사랑 2월호 ‘소장자료 톺아보기’에 소개된 사진 중 「반도의 명사」는 강제병합 당시 조선인 주요 관료들과 ‘영향력 있는 인물들’로 구성된 부분으로 친일 인사들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저기 순사 온다”라는 말에 우는 아이의 울음도 뚝 그치게 만들었던 무단통치의 핵심인 일제의 헌병경찰. ‘순사’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악랄하고 무서운 이미지로 각인된 것은 칼 찬 제복 차림으로 민중들의 사소한 일상까지 감시, 탄압함으로써 가장 직접적이고 광범위하게 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은 무단통치를 실행한 식민지 조선의 경찰서 현황을 담은 사진첩이다. 항일 의병을 가혹하게 탄압했던 헌병사령관 겸 경무총장 아카시 모토지로를 필두로 하여 본부의 직원과 경성, 광주, 대구, 평양, 신의주 등 13개 권역의 지방 경찰서와 그 직원들의 사진을 볼 수 있는데 마지막에는 조선의 경찰 연혁과 직원명단이 기록되어 있다.(민족사랑 2019년 6월호 참조)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후 전국적으로 항일 의병투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한국주차군헌병대로 편성되어 있던 헌병을 증강하고 조선인 4천여 명을 헌병보조원으로 모집해 병력 규모가 2배 이상 확대되었다. 주차군헌병사령관, 즉 군대의 수장은 경찰 수장인 경무총장을 겸하도록하여 민간인까지 탄압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겸직은 1910년 9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그대로 이어져 악명 높은 헌병경찰제도가 탄생한 것이다.
각 지방도 사정은 마찬가지로 경무부와 경찰서가 설치되어 도(道) 헌병대장이 경무부장을 겸직했다. 경찰서장은 재판절차 없이 즉결처분을 할 수 있었는데 이는 조선인들을 가혹하고 신속하게 처벌할 수 있는 것이어서 막강한 경찰력에 조선인들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13년 조선주차군사령부가 간행한 <조선폭도토벌지>에 의하면 1906년부터 1911년까지 6년간 조선의병 1만 7천여 명을 학살했다고 한다.
무력을 앞세워 이토록 잔인하게 학살한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아직까지도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는 정당한 통치’라고 하며 사죄와 반성은커녕 조선인 강제동원의 사실을 부정하듯 ‘조선인 학살’ 또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한국 정부는 역사를 거꾸로 세우고 있다. ‘미래’와 ‘공동의 이익’을 운운하며 100여 년 전 대한제국을 일본에 팔아넘긴 ‘친일파’와 같은 대한민국의 대통령 앞에서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잊지 말자. 제대로 청산하지 않으면 치욕의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사실을.
• 강동민 자료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