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내가 아주 단판씨름 하러 왔소-김상옥 의사의 의열투쟁과 관련한 몇 가지 논점 정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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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의거 100주년 특집]

내가 아주 단판씨름 하러 왔소

-김상옥 의사의 의열투쟁과 관련한 몇 가지 논점 정리(1)

이순우 책임연구원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 있는 김상옥 의사의 동상(1998년 5월 28일 제막)이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김상옥 의사(정진주 합장)의 묘비석 후면 모습이다.

 

(1)
1890.1 서울 어의동에서 구한말의 군관인 김규현과 경주김씨 점순 여사 사이에 2남으로 출생

1923.1 종로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왜경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1월 17일 재등 총독 주살을 재차 계획한 채 삼판통에서 추격한 왜경과 총격전을 전개한 후 이곳저곳을 신출귀몰하다가 1월 22일 종로 효제동에서 왜경 500여 명에게 포위되어 4, 5채 가옥을 넘나들며 전쟁을 방불케 하는 일기당천의 장렬한 격전을 전개, 수십 명의 왜경을 살상 후 마지막 한 발로 자결 순국

(2)
1889년 1월 5일 서울 효제동 출생
1923년 1월 22일 서울 효제동 최후 격전현장에서 순국
                        배위 1895.10.20. 출생 1967.12.26. 별세
1923년 1월 3차례 서울시가전 전개/ 12일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17일 삼판통 총격전 4명 처단/ 22일 효제동 대격전, 일본군경 천명 4중 포위, 3시간 교전 16명 처단, 자결 순국

 

여기에 제시한 것들은 딱 100년 전 “경성 천지(京城 天地)를 진동(震動)하던 중대사건(重大事件)”의 주인공으로 “항복(降服)은 절대불응(絶對不應)”하며 “최후순간(最後瞬間)까지 대항(對抗)”했던 김상옥(金相玉, 1889~1923) 의사의 마지막 항거 상황을 약술한 구절이다. 우선 (1)은 대학로 마로니에공원(동숭동)에 서 있는 ‘김상옥 열사의 상’에 부착되어 있는 ‘한지 김상옥열사 약력’ 부분에 정리된 내용이다. 이 동상(조각 이승택, 글·글씨 최절로)은 사단법인 김상옥 나석주 열사 기념사업회와 김상옥 열사 동상건립위원회가 세웠으며, 지난 1998년 5월 28일 제막되었다. 그리고 (2)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김상옥 의사(정진주 합장)의 묘비석 후면에 새겨져 있는 내용이다.
여기를 보면 서로 닮은 듯 다른 듯 약간의 차이가 나는 항목들이 몇 군데 눈에 띈다. 우선 부친의 성함이 ‘김규현’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김귀현’을 잘못 새긴 것인 듯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김상옥 의사의 출생년도가 ‘1890년’과 ‘1889년’으로 다르게 서술된 것이 그중의 하나이다. 이에 관해서는 <동아일보> 1923년 3월 15일자(호외), 2면에 수록된 「불평불만(不平不滿)의 34성상(星霜), 순사총살(巡査銃殺)까지의 김상옥(金相玉)」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채록되어 있다.

 

수백 명의 무장경관을 대적하여 빗발같이 쏟아지는 탄환 속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죽은 김상옥은 어떠한 사람인가? 김상옥은 당년 34세의 청년이라, 지금으로부터 34년 전 경인(庚寅) 정월 초5일에 한성 동부 건덕방 어의동(漢城 東部 建德坊 於義洞) 일개 미천한 집에 출생하니 그의 부친은 당시 한국군대의 영문포수(營門捕手) 다니던 김귀현(金貴鉉)이요, 모친은 정씨(鄭氏: 어머니는 ‘김씨’이고 처가 ‘정씨’이므로 이는 잘못된 내용)이라.

 

여기에 ‘경인년 정월 초5일생’이라 하였으니 이를 근거로 의당 ‘1890년 1월 5일생’으로 통용되어 왔으나, 이정은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이 펴낸 <김상옥평전(金相玉平傳)>(민속원, 2014), 51~52쪽에는 종로구청에서 발급한 「김귀현 호적부」에 ‘조선개국(朝鮮開國) 498년’으로 기록된 사실을 근거로 기존의 출생일자를 ‘1889년 1월 5일생’으로 새롭게 수정하여 서술한 바 있다. 따라서 1889년생이라는 주장은 아마도 이쪽의 조사 결과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다음으로 세부내용에서 차이가 나는 부분은 출생지를 ‘어의동’과 ‘효제동’으로 달리 적고 있는 대목인데, 그렇다면 ‘어의동’은 곧 ‘효제동’이라는 것인가? 하지만 이것 역시 아직은 엄밀하게 지명고증이 이뤄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또한 효제동 총격전 당시의 상황에 대해 한쪽에서는 ‘왜경 500여 명’이라고 적은 데에 반해 다른 한쪽에선 ‘일본군경 천 명’이라고 하여 그 규모가 배로 늘어나 있는 것이 확연히 눈에 띈다. 더구나 왜경(倭警)이라고 하면 일제의 경찰 그 자체만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군경(軍警)이라고 하면 일본군대까지 포함하는 것이므로 그 뜻이 크게 바뀐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부분 역시 왜 갑자기 서술 내용이 변경된 것인지도 잘 알기 어렵다.
또 한 가지 빠트리기 어려운 내용은 최후의 총격전 때 김상옥 의사가 ‘수십 명의 왜경을 살상’하였다거나 ‘일본군경 16명을 처단’하였다는 얘기의 사실 여부이다. 이것은 과연 어디까지가 맞는 내용인 것일까?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가장 강렬했던 의열투쟁의 하나였던 만큼 김상옥 의사의 의거 그 자체는 결코 가벼이 여겨져서도 안 되겠지만 여기에 공연히 그의 공적을 부풀리거나 덧칠하여 되려 누가 되는 결과를 가져와서도 안 될 줄로 믿는다.

세상만사(世上萬事)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이에 아래에서는 김상옥 의사의 순국 100주년을 제대로 기리고자 하는 뜻에서 그의 의거와 관련한 몇 가지 논점을 따져서 문제제기를 겸하여 간략한 정리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논점 1. ‘어의동 생가터’의 위치는 어디인가?
김상옥 의사의 출생지가 “한성 동부 건덕방 어의동”이라는 것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으나, 이것은 일제가 1914년에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시도하면서 지번체계(地番體系)를 도입하기 이전의 주소지 표기방식이므로 정확하게 지금의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를 가려내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하지만 일찍이 ‘사단법인 김상옥 나석주 열사 기념사업회’에서 펴낸 <김상옥 나석주 항일실록(金相玉 羅錫疇 抗日實錄)>(1986)에는 ‘어의동(지금의 효제동)’으로 표시하고 있으며, 이정은의 <김상옥평전>(2014)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곳을 아예 ‘효제동 72번지(최후 순국지와 동일 지점)’라고 단정하고 있다. 독립기념관에서 펴낸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특별판)>(2019), 124~134쪽에 수록된 「김상옥」 항목에서도 — 이 원고의 집필자가 동일한 탓에—역시 ‘효제동 72번지(최후 순국지와 동일 지점)’라고 정리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어의동(於義洞)의 개략적인 위치가 표시된 「경성도(京城圖)」의 일부이다.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한국건축조사보고>, 1904]

 

그런데 이곳의 위치를 규명하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어의동’이라고 하는 동네는 한성 동서(東署; 1894년 갑오개혁 이전의 ‘동부’와 동일)에 있어서 제법 넓게 포진하고 있는 구역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방(坊)에서는 ‘어의동계(於義洞契)’를 이루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그냥 ‘어의동(於義洞)’으로 존재하는 사례가 도합 3곳이나 확인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황을 가장 일목요연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료로는 일제강점기에 경성부청(京城府廳)에서 소장하고 있던 「각서방계동명(各署坊契洞名)」[세부내용은 <경성부사(京城府史)> 제2권(1936), 444~446쪽을 참조]이라는 것이 있다. 여기에서 ‘어의동’과 관련된 흔적을 추출하면, 서울도성 안 동쪽 일대에만 ‘창선방 어의동계 어의동’, ‘창선방 오교계 어의동’, ‘건덕방 어의동계’, ‘숭신방 경이계 어의동’ 등 무려 4가지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그 대상을 ‘건덕방 어의동계’로 좁히더라도 이 지역이 반드시 1대1 대응으로 ‘효제동’으로 바뀌었다고 보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예를 들어, <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4월 27일자에 게재된 경기도 고시 제7호 「경성부 정동의 명칭 및 구역(京城府 町洞ノ名稱 及 區域) 제정」(1914년 4월 1일 시행)을 보면 ‘종전의 어의동’은 ‘종로 5정목(지금의 종로 5가)’ 쪽으로 편입된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당시 일제가 임의로 창안하여 새로이 명명한 ‘효제동(孝悌洞; 인의, 예지, 효제, 충신 등 유교의 덕목에서 추출하는 방식으로 만든 동네이름)’이 옛 건덕방 어의동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맞지만, 알고 보면 ‘종로 6정목(지금의 종로 6가)’과 ‘충신동(忠信洞)’ 쪽 역시 원래 건덕방 어의동계에 속했던 지역을 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어의동’은 곧 ‘효제동’이라는 얘기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볼 수 있다.

1914년 4월 현재 경성부 정동 명칭 구역 개정 내용(어의동 관련 지역)

그런데 김상옥 의사의 출생지를 ‘어의동’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적어놓은 기록도 엄연히 남아 있다. <조선일보> 1923년 3월 16일자(3면)에 수록된 「파란중첩(波瀾重疊)한 그 일생(一生), 지장운단(志長運短)한 34세(歲)」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채록되어 있다.

 

전기한 바와 같이 효제동에서 경관과 맹렬히 격투하다가 즉사한 김상옥은 원래 시내 종로 6정목에서 출생하였는데 그 후에 시내 창신동(昌信洞) 480번지[487번지의 오류]로 이거하여 금일까지 살아오던바 그의 부친 김귀현(金貴鉉) 씨는 본래 가세가 곤궁하여 나막신을 파서 생활하므로 아들은 3형제나 두었으나 공부를 시키지 못하고(하략)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종로 6정목’은 ‘효제동’과 마찬가지로 ‘옛 건덕방 어의동계’에 걸쳐있던 지역이므로 김상옥 의사의 실제 출생지가 이곳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와 관련하여 <김상옥 나석주 항일실록>(1986), 168쪽을 살펴보면 “맏형 춘옥(春玉)은 특별한 기록이 없고 다만 일제시대의 호적을 찾아봤더니 경성부 종로 6정목에서 개국(開國) 490년에 출생했으나 …… 운운” 하는 내용이 있는데, 먼저 태어난 형의 출생지가 정말 이곳이라면 김상옥 의사의 출생지인 ‘어의동’이 곧 ‘효제동’일 거라는 등식이 그대로 성립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고 하겠다.
더구나 <김상옥평전>(2014), 148쪽에 정리된 자료를 재인용하면 부친 김귀현(金貴鉉, 1851~1918)의 경우, 호적부(戶籍簿)에 경성부 종로 6정목 210번지(호적지) → 종로 6정목 211번지(1915.6.1) → 종로 6정목 153번지(1916.8.10) → 창신동 551번지(1916.12.4)로 주소지 변동내역이 나타나 있다. 종로 6정목으로 표시된 지번들의 위치는 모두 옛 건덕방 어의동계에 속했던 지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만큼 이곳 역시 실제 생가터의 유력한 후보지로 간주되기에 충분하다.
아무튼 김상옥 의사로 출생지로 알려진 ‘어의동’이 곧 ‘효제동’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은 속단이며, 현재로서는 개략적인 후보지역을 유추하는 것만 가능할 뿐 아쉽더라도 구체적인 지번은 여전히 알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논점 2.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의 ‘진짜 범인’은 따로 있는 것인가?
1923년 1월 12일 밤 8시 10분에 종로경찰서 청사(옛 한성전기회사 사옥) 서편에 따로 서 있던 급사실(給仕室) 앞에서 폭탄이 터진 사건은 두말할 나위 없이 김상옥 의사가 행한 주요한 의거의 하나라는 것이 당연한 상식과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그 현장에는 서울특별시에서 ‘김상옥 의거터’라는 표제로 만들어 세운 역사문화유적표석(2016년 4월에 신형 표석으로 교체)까지 버젓이 자리하고 있는 마당에, 이른바 ‘진짜 범인’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참으로 면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폭탄투척사건이 벌어진 종로경찰서(옛 한성전기회사 사옥)의 모습이다. 왼쪽에 보이는 낮은 건물이 투척 지점이다. (<동아일보> 1929년 9월 4일자)

‘최 아무개’라는 청년이 ‘진짜 범인’으로 지목되어 있는 <조선일보> 1929년 3월 26일자의 보도내용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냥 흘려듣기 어려운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다는 점도 함께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 1929년 3월 23일자에 수록된 「오개성상(五個星霜) 지난 금일(今日), 김상옥 사건에 의운(疑雲), 일시 세상을 진동한 김상옥 사건에 종로서 폭탄범은 다른 사람이라고, 종로서 폭탄범(鍾路署 爆彈犯)은 타인(他人)?」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일시 조선 천지를 놀래게 하던 김상옥(金相玉) 사건이라 하면 벌써 만 5주년 전의 일이지만 사건이 워낙 세상을 경동시켰을 만큼 아직도 일반의 기억에 새로운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하여 최근에 한 새로운 사실이 발각되어 시내 모 경찰에서는 방금 그 천명(闡明)에 활동 중이라 한다. 김상옥이가 무덤에 들어간 지 5년 후인 오늘날에 새삼스럽게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은 김상옥이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진범인으로 지목받아 김상옥 사건에 유일한 공로자인 삼륜(三輪, 미와) 종로서 고등계 주임은 경관의 최고의 표창인 공로장(功勞章)까지 탔었는데 실상은 폭탄투척의 진범인은 김상옥이가 아니라는 것이 그 후에 우연히 발각되었으나 그 당시의 경찰부장이던 마야정일(馬野精一, 마노 세이이치) 씨는 공을 이룸에 급급하여 김상옥을 진범인 줄만 여기고 이때까지 지내왔으나 그 사실 진상이 차차 드러나자 필경은 모 경찰에서도 이 사건의 진상을 적발코저 방금 진범인을 수사 중이라더라.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이라고 하며 이미 김상옥 의사의 소행인 것으로 널리 알려진 상태이고, 더구나 그 사건의 공로자로 종로경찰서의 경부(警部)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 고등계 주임)가 표창까지 받은 상태(<매일신보> 1923년 8월 14일자에 수록된 「양경관(兩警官)의 표창(表彰), 삼륜 율전 양씨」 제하의 관련기사를 참조)였으므로, 여기에 수록된 기사 내용은 그 자체가 세상 사람들을 참으로 어리둥절하게 만들 만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사람은 따로 있을 거라는 얘기는 1923년 사건 당시부터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되어온 사항이었다.

1) <동아일보> 1923년 3월 15일자(호외), 「폭탄사건(爆彈事件)과의 관계(關係)는 아직 판명되지 안했다고 경무국(警務局) 야마구치 고등과장 담(山口 高等課長 談)」 제하의 기사2) <조선일보> 1923년 3월 16일자, 「신출귀몰(神出鬼沒)한 폭탄범인(爆彈犯人), 상금(尙今) 누가 함인지 막연부지(漠然不知), 전기의 사실 내용을 볼 것 같으면 김상옥은 정녕 폭탄범이 아니다」 제하의 기사3) <동아일보> 1923년 5월 13일자, 「궁상(窮狀)에 동정(同情)하여 금백원(金百圓)을 주었을 뿐이요, 피고 윤익중 진술」 제하의 기사

이와는 별도로 <조선일보> 1923년 8월 14일자에 게재된 「잔소리」 코너에는 명확한 확인도 없이 공적명세서에 김상옥을 범인으로 기록하고 경무국에서 공로자표창까지 하였다면서 이러한 일제경찰의 행태를 꼬집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 지난봄에 종로경찰서 폭탄이 떨어진 후로 연하여 삼판통 사건과 효제동 사건이 났으나 김상옥은 총에 맞아 죽은 결과 김상옥 사건의 연루의 공판이 끝이 나도록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범인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하더니
▲ 작일에는 이상 사건에 공로자로 삼륜(미와) 경부와 율전(쿠리다) 경부에게는 경무국에서 포창을 하였다는데 그 공적명세서에는 김상옥이가 그 범인인 것으로 기록하였다 한다. 본래 큰 사건이니까 범인도 많겠지만은
▲ 황옥의 밑에는 상해에서 김원봉에게 들었다는 말이 그 범인이 상해에 있었으나 자기 생명을 아끼여 못 잡았다고 하였는데 그것도 한 의문이오, 연루자 공판 때까지도 그런 말은 조금도 없던 것이
▲ 공로자 포창할 때에야 비로소 나는 것을 보면 경관의 공로라는 것이 본래 비밀에서 많이 나는 것이니까 그러한지도 모르지만은 일반의 의심을 없게 하자면 김상옥이 죽던 날 그 사람이 종로경찰서 폭탄범이라고 세상에 발표한 것만은 아주 못하다고 하겠는걸. 자기네가 포창을 하는데 그보다 더 큰 공로가 있다기로 관계할 일은 못되지만은 하도 말들이 많은 세상에 의심스러운 일은 자미가 없단 말이야.

 

그런데 듣자 하니 역사학계의 한쪽에서는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의거의 당사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꽤나 제기되고 있는 모양이다. 조선측 정부위원(朝鮮側 政府委員)의 자격으로 제국의회(帝國議會, 1월 23일 개회)에 참석하기 위해 곧 일본으로 떠날 사이토 총독과 그를 전송할 총독부 고관들을 상대하여 경성역(京城驛)에서 저격 또는 폭살할 계획을 실행하려던 것이 김상옥 의사의 주된 목표였으므로, 이처럼 중차대한 거사를 앞두고 있던 찰나에 그 자신이 공연히 위험에 노출되는 상황을 자초하는 일을 벌일 까닭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 이러한 판단의 근거이다.

1923년 새해 첫날부터 종전의 ‘남대문정거장’은 ‘경성역’으로 개칭되었다. (<매일신보> 1923년 1월 1일자)

삼판통 항거가 있던 바로 그날 아침에 사이토 총독은 경성역을 빠져나가 자기의 본국으로 향했다. (<매일신보> 1923년 1월 18일자)

 

실제로 <매일신보> 1923년 1월 18일자에 수록된 「사이토 총독(齋藤總督), 17일 조(朝) 동상(東上)」 제하의 기사에는 사이토 총독이 경성역을 무사히(?) 빠져나간 상황이 이렇게 정리되어 있는데, 이날은 바로 삼판통 총격전이 벌어지던 바로 그날이기도 했다.

 

사이토 총독은 예정과 여(如)히 17일 오전 10시 경성역발(京城驛發) 마츠무라 비서관(松村祕書官)을 수(隨)하고 동상(東上)의 도(道)에 취(就)하였는데 역두(驛頭)에는 총독부 각국부장(總督府 各局部長)을 시(始)하여 조선귀족(朝鮮貴族) 급(及) 기타 관민유지(其他 官民有志)의 전송(餞送)이 다(多)하였더라.

 

종로경찰서 폭탄사건으로 인하여 일제 경찰이 대대적인 범인색출과 검문검색에 나서는 상황이 촉발되었고, 결국 닷새 후에는 자신의 매제(妹弟)인 고봉근(高奉根, 1896~1961)의 삼판통(三坂通, 지금의 후암동) 집에 은신하고 있던 김상옥 의사의 신변이 탐지 노출되는 바람에 이곳에서 총격전을 벌인 끝에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사이토 총독이 일본으로 출발하기 위해 경성역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이 삼판통 총격전이 벌어진 몇 시간 이후의 일이었으니, 결과적으로 조선총독을 처단할 기회는 그것으로 저절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의 ‘진짜 범인’에 대한 마지막 기사는 <조선일보< 1929년 3월 26일자에 수록된 「종로서 폭탄범(鍾路署 爆彈犯), 최모(崔某) 잠입활동설(潛入活動說), 사오 년 동안의 운에 싸인 일」 제하의 기사인데, 여기에는 좀 특이하게도 그 주인공으로 ‘최 아무개’라는 청년을 거명하는 구절이 들어 있어서 크게 주목을 끈다.

 

지금부터 약 6개년 전에 시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사건은 아직까지 세상 사람의 기억에 새로운 터인바 그때에 소관 종로서에서는 범인을 아무리 탐지하여 보았으나 종래 알 길이 없던 차에 마침 김상옥사건이 일어났으므로 폭탄사건의 진범인으로 인정하고 세간에 대하여 공표하여 오던 중 최근에 이르러모 방면으로부터 그때 진범인은 김상옥이 아니고 실상은 최〇〇라는 청년으로 다시 해외로 도망하여 버린 것을 모르고 그리한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요즈음에 전기 최〇〇이 다시 조선 안에 들어온 형적이 있다 하여 경찰당국에서는 그를 체포하고자 크게 활동중이라는데 일설에 의하면 최의 가족이 시내 모처에 아직 있다더라.

 

여기에서 지목하는 진범에 대한 후속기사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결론이 어떻게 맺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잔뜩 궁금증만 남겨놓았을 따름이지 자세한 내막까지 확인할 재간은 없다. 그렇다면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의거의 당사자는 과연 누구라는 것일까? 확실히 ‘진짜 범인’이 따로 있기는 한 것이었을까? 특히 마지막 기사에 등장하는 ‘최 아무개’라는 인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러한 물음들은 많이 늦었지만 지금에라도 우리가 하나씩 풀어나가야 할 과제들인 셈이다.

 

[연재 예고] 원고 분량이 넘쳐 최후 총격전 당시의 ‘사살자’ 존재 유무와 ‘마지막 단발’의 ‘자결’ 여부에 관한 논점은 다음 호에 나눠 수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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