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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연맹론에 이끌린 조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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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글방]

동아연맹론에 이끌린 조선 사람들

권시용 선임연구원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저는 얼마 전까지 연구소에서 <재일조선인단체사전>과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 발간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다가 식민지 시기 일본에서 활동한 몇몇 조선 사람들에게 관심이 생겼습니다. 바로 ‘동아연맹론’에 이끌린 조선인들입니다. 동아연맹론은 무엇이고 거기에 이끌렸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동아연맹론
동아연맹론을 주창한 사람은 이시하라 간지(石原荒爾)입니다. 그 이름은 먼저 만주사변을 떠올리게 하죠. 일본 육군성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다가 만주 주둔 관동군 핵심 지휘관으로 활동했습니다. 만주국 수립에서 중일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이시하라가 내놓은 주장이 동아연맹론입니다.
동아연맹론의 내용은 흔히 ‘국방의 공동화(共同化), 경제의 일체화, 정치의 독립’으로 표현됩니다. 국방의 공동화란 일본, 만주국, 중국 세 나라가 통일된 방침 아래 군대를 만들고 운영하는 체제를 말하며, 경제의 일체화란 세계의 어떤 다른 국가군(國家群)과도 대항할 수 있는 일종의 자급자족 경제단위의 구축을 의미합니다. 정치의 독립이란 맹방(가맹국)들이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정치체제의 구축을 말하는 것으로 설정 되었습니다. ‘일본 천황의 내면적 지도’라는 단서가 달렸지만, 중국 침략에 나설 때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전향적인 모양새죠. 도식화하면 이런 모양샙니다.

국방의 공동화 = 일중만(日中滿) 3국이 통일된 방침 아래 군대를 육성 운영하는 체제
경제의 일원화 = 구미와 소련의 어떤 국가군과도 경쟁할 수 있는 경제단위 형성
정치의 독립 = 3국이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것

이시하라 간지의 동아연맹론에 대해선 여러 가지 역사적 평가가 있습니다. 한국 학계에서는 물론 비판적이죠. 다만 약간의 뉘앙스 차이는 있습니다. 우선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처한 난관을 타개하려는 온건파들의 정치적 주장이며, 조속한 종전을 목적으로 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호기롭게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이 베이징, 난징을 점령하며 전투에서는 승리하고 있었지만, 정작 전쟁의 끝은 요원한 상황이었습니다.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자기들이 처한 형편에 맞게 끈질기게 저항했습니다. “중일전쟁은 지구전이고 종국적 승리는 중국의 것”이라는 마오쩌둥의 말은 유명하죠. 결국 중국과 일정하게 타협하고 전쟁을 마무리하자는 생각이 나온 겁니다. 표면적으로는 중국의 정치적 독립을 인정하고, 중국에 대한 안정적인 경제 수탈을 확보하며, 일본이 주도하는 공동국방의 군사적 기지로서 중국을 활용한다는 것을 주된 목표로 내세웠습니다.
일본 천황의 ‘내면적 지도’를 실현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었죠. 그래서 중일전쟁의 조속한 종결을 원하는 일부 정치세력들에게 수용됐습니다. 일본 수상 고노에 후미마로의 대중국 성명(近衛聲明, 1938.11)
이 동아연맹론의 주장을 일부 수용한 것이란 평가입니다.
좀 더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동아연맹론이 만주국 수립의 명분을 제공했고, 일본이 추진한 침략정책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활용됐다고 봅니다. 표면적으로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수평성과 자치 및 독립을 표방하지만 일본의 내면적 지도라는 일본중심적인 패권적 사고를 전제로 하는 것이니, 결국 이른바 ‘대동아공영권’ 구축이 궁극적 지향점이라는 평가입니다. 동아연맹론 그 자체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입니다. 만주사변을 일으킨 대륙침략의 선구자 이시하라란 인물이고 보면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이죠. 이시하라가 본인의 지론인 ‘세계최종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전술적으로 만들어낸 논리에 지나지 않다고
보는 겁니다.

동아연맹론의 주창자 이시하라 간지

동아연맹론에 이끌린 사람들
그렇다면 동아연맹론을 놓고 일본과 중국,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일본에서는 동아연맹협회가 결성됐습니다. 1939년 10월 도쿄에서 기무라 다케오(木村武雄)에 의해 결성되었다고 합니다. 이시하라의 동아연맹론에 공명하면서 평등의 원칙에 입각해 연맹을 결성하고 오족협화에 의해 만주국을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40년 12월에는 일본 귀족원과 중의원에서 ‘동아연맹촉진의원연맹’이 결성되었고, 사회운동으로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동아연맹론이 일본 내에서 하나의 정치주장으로써 세력을 형성했던 것입니다.
중국에선 베이징에서 중국동아연맹협회(1940.5), 광둥에서 중화동아연맹협회(1940.9), 난징에서 동아연맹중국동지회(1940.11)가 결성됐습니다. 1941년 2월에 가면 지역조직들을 통합해 중앙조직이 만들어지고 곧이어 다른 지역에도 분회가 생겼습니다.
중국에서 동아연맹론을 받아들인 것은 친일협력자들이었습니다. 그 대표자가 왕징웨이(汪精衛, 본명은 汪兆銘)입니다. 정치적 라이벌인 장제스(張介石)와 함께 국민당 정부를 이끌던 왕징웨이는 장제스와는 다른 선택을 합니다. 일본과 몰래 협상하고는 충칭을 뛰쳐나와 난징에 친일괴뢰정부를 세웠죠. 그는 쑨원(孫文)의 진정한 후계자를 자처하며, 쑨원의 대아시아주의와 동아연맹론을 같은 것으로 선전했습니다.
조선의 지식인 가운데도 동아연맹론에 이끌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시하라의 말을 들어볼까요.

 

“조선에서 내선인(內鮮人)의 대우는 조금도 같지 않다. 일선(日鮮) 양 민족 간의 대우에는 심한 차별이 있다. 예컨대 조선인으로서 관리가 되어 고등관 대우를 받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내선일체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조선인의 정치적 차별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합리적으로 철폐하는 것
이 필요하다.”
“정치에서 민족적 차별을 철폐하고 또한 민족감정, 생활습성을 존중하여, 그 범위에 속하는 행정적인 문제들은 조선인들의 자치에 맡겨야 한다.” (동아연맹건설요강, 1939.11)

 

이시하라는 조선인에 대한 민족적 차별과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일본이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조선 민족에 대한 차별 철폐, 조선인 자치를 공식적으로 제기합니다.

동양지광
조선에서 동아연맹운동에 접근한 것은 ‘동양지광’ 그룹이었습니다. 동양지광 주간을 맡아봤던 김용제가 1978년에 “고백”한 대로라면, 그들은 동양지광 안에 ‘동아연맹 조선본부’란 비밀단체를 만들고 지하독립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지탄받던 친일파의 뒤늦은 변명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의 독립’, ‘자치’란 말에 반응했습니다. 이미 1920년대부터 참정권 청원운동과 함께 조선인 정치운동의 한 축을 차지했던 것이 자치운동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인정하는 전제 아래 조선 사람도 일본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달라거나, 한반도에서는 조선인들의 자치를 허용해 달라는 운동이었습니다. 동아연맹운동에 이끌린 동양지광 그룹의 움직임 역시 그런 자치운동의 연장선에 있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합니다.
사실 일본 정부는 동아연맹론과 동아연맹운동이 조선인들에게 미칠 여파를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벌인 전쟁의 원만한 종결을 노린 것이든, ‘세계최종전쟁’에 대비해 ‘대동아공영권’을 구축하려는 전술이든, 그 의도나 본질과는 상관없이 동아연맹론이 조선인들을 움직일 동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우려한 것입니다.
일본에서 발행되던 동아연맹협회의 기관지 기사는 내용이 조선 치안에 방해가 된다고 삭제 처분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일본 경찰 당국은 “동아연맹론에 이상한 관심을 가지고 그 운동에 편승해 조선의 자립, 독립을 몽상, 책동하는 자가 암암리에 생긴다”, “이른바 동아연맹론자들에게 나오는 말투, 언동 등이 학생사상 악화의 한 원인이 된다”는 등의 판단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조선총독부는 동아연맹론을 불온사상으로 분류하고 조선 내 유포를 막았습니다.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에는 일본인이 딱 한 사람 실려 있습니다. 돗토리현 출신 등전 원태랑(藤田源太郞, 1914년생)입니다. 1945년 3월에는 함북 청진의 일철(日鐵) 협화료(協和寮)라는 기숙사 사감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시찰 요점은 “민족협화와 정치의 독립을 표방한 동아연맹협회의 지도정신을 신봉하고 정치에 관해 불온언동의 우려가 있다”였습니다. 일본인 ‘등전원태랑’이 요시찰 대상이 된 이유가 바로 동아연맹운동이었습니다

비밀결사 ‘우리들’
이렇게 조선에서는 이시하라 간지의 동아연맹운동에서 기회를 찾으려는 전향자들의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했고, 동아연맹론이 조선인들에게 ‘ 안 좋은 시그널을 줄까’ 하는 조선총독부의 우려가 공존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는 어떨까요? 일본의 조선 사람들 중에도 동아연맹운동에 반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김창옥, 홍영기, 박석우, 강수원은 도쿄에서 만났습니다. 이들은 동아연맹 조선학생좌담회에서 만나 서로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의기투합했습니다. 민족 독립을 위해 활동하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동아연맹운동 관계자인 강영석, 최은환과 상의하고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1940년 12월 초 강영석의 집에서 열린 좌담회에 앞서 몰래 따로 상의했습니다. 네 사람은 “동아연맹운동으로는 조선문제 해결의 가능성이 없으며, 아울러 조선 민족의 행복을 위해서는 제국의 굴레를 벗어나 자주독립하는 것 외에는 없다”는 뜻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조선독립운동을 추진할 비밀결사 ‘우리들’을 조직했습니다. 비밀결사 ‘우리들’ 멤버들은 합법을 가장하기 위해 동아학생연맹에 가입하고,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제1단계로서 각자 학생의 입장에서 전문 분야를 연구했습니다. 이들은 1941년 8월에 체포되어 1944년 10월 야마구치지방재판소에서 김창옥, 강수원, 박석우는 징역 3년, 홍영기는 징역 2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일제의 조선인 감시 명부인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에는 홍영기와 강수원에 대해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시찰요점 : 민족의식이 농후해서 조선독립을 기구(冀求)하며 비밀결사를 조직할 우려가 있음” 비밀결사 ‘우리들’ 멤버 네 사람은 모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았습니다.

동아연맹운동을 접촉했지만, 그 본질을 꿰뚫어 보고는 동아연맹운동으로는 조선 독립으로 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죠.
여기까지는 고민거리가 안 됩니다.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金昌沃 등 4인 판결문(1944.10.6) 첫 페이지

 

동아연맹을 이용한 재교토 조선인 민족주의그룹
조영주, 조은제, 양인현은 교토에 유학하며 조선인 유학생학우회 회장이나 간부를 맡아봤습니다. 모두 교토 조선인 유학생 사회를 이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몰두했던 것이 동아연맹운동이었습니다. 학습회를 열고, 다른 학생들에게 이를 알리고 함께 하자고 권했습니다. 1940년 4월 28일 교토 아라시야마공원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동아연맹운동 이론을 설명하고 조선 민족의 ‘정치적 독립’ 획득을 역설했습니다. 1940년 6월 동아연맹운동에 회의적인 조선 학생들을 데리고 이시하라 간지를 찾아가 ‘동아연맹론과 조선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941년 1월 졸업생 송별회에서 조영주는 동아연맹운동에 의한 조선 민족 해방을 시사했습니다. 1941년 6월부터 11월까지 약 60차례 학습회를 열었습니다. 1942년 3월 세 사람은 동아연맹운동을 이용해 조선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잡혀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조영주와 조은제는 1943년 12월에 각각 징역 2년, 징역 1년 6월(모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풀려났습니다. 양인현은 1943년 4월에 징역 1년 6월을 받고 복역했습니다.

일본 특고(特高)는 이들에게 ‘동아연맹을 이용한 재교토 조선인 민족주의그룹 사건’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위 도쿄의 비밀결사 ‘우리들’과 차이점이 있죠. 동아연맹운동에 접근했지만 ‘우리들’ 멤버들이 그 본질을 깨닫고 빠져나왔다면, 교토의 세 사람은 그렇지 못했죠. 동아연맹운동에서 조선 민족의 독립을 기대한 겁니다.
첫번째 고민입니다. 그럼 교토의 세 사람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탄압을 받았다는 점에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지니지만, 일제의 힘을 빌려 독립을 실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허황된 꿈을 쫓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판단 미숙으로 헛된 꿈을 꾸었지만 독립을 이루겠다는 순수한 마음이었고, 그래서 일제로부터 고초를 겪었다고 볼까요? 실제 조은제의 행적을 독립운동으로 평가하는 연구도 있습니다.


1 모두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강수원(1990), 김창옥(1993), 홍영기(1995), 박석우(1990)]을 받았습니다.

 

강영석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도쿄의 네 사람이 만난 행사, 동아연맹 학생좌담회를 개최한 사람이 강영석입니다. 그리고 교토의 세 사람도 도쿄의 강영석을 만나다가 일본 경찰에 노출됐다고 합니다. 두 사건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강영석입니다.
1941년 3월 9일 도쿄에서 강영석이 일본 경찰에 잡혔습니다. ‘특고’ 보고서인 <특고월보>는 강영석의 혐의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공산주의운동에서 전향한 강영석은 1939년 10월 스스로 동아협화이념연구소를 설치하고 이시하라 간지를 만나 동아연맹이론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 1940년 5월 이래 동아연맹론에 편승해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동지를 결집하고 의식 앙양에 암약해 왔다.

 

1942년 6월 1일 검찰에 넘겨진 강영석은 6월 12일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습니다. 강영석은 전남 광주의 유명한 사회주의 운동가 집안의 일원이었습니다. 1930년 후반 전향한 후에는 박희도가 운영하던 친일잡지 <동양지광>에서 주로 활동했습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지만 친일혐의가 드러나 2010년에 서훈을 박탈당했죠.
전향 후 동양지광에 몸담았던 강영석은 동아연맹론에 이끌려 도쿄에 왔습니다. 동아연맹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한 것 같습니다. 1945년 3월에 만들어진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에는 강영석이 “도쿄시 이타바시구 네리마미나미정”에 산다고 나옵니다. 전향한 사람도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일제의 꼼꼼함을 확인할 수 있으며, 강영석이 그때까지도 도쿄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고민은 강영석입니다.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훈장도 박탈됐죠. 그런데 1940년대 도쿄에서의 행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부분은 <친일인명사전>에 실리지 않았습니다. 동아연맹운동을 이용하려는 활동은 자치론의 연장이니 역시 친일협력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할까요?
요즘 제 고민을 늘어놔 봤습니다. <재일조선인단체사전>과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를 발간하며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새로 발굴하는데 일조할 것’이란 기대를 밝혔죠. 독립운동가를 한 사람이라도 더 찾아내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독립운동의 범주를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는 큰 과제입니다. 한편에선 독립운동과 친일행위의 경계는 어떻게 그을까 하는 문제도 있죠. 제 고민을 함께 나눌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문헌]
김희주, 「중일전쟁기 在京都 조선인의 동아연맹운동과 조은제」, <경주사학> 27, 2008
박영준, 「일본 군국주의의 한 내면 –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에 있어 ‘세계최종전쟁론’과 ‘국방국가론’」,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37집 2호, 2016
배경한, 「중일전쟁 시기 중국에서의 동아연맹운동과 왕정위정권」, <중국현대사연구> 21, 2004
변은진, 「일제 전시파시즘기(1937-45) 조선민중의 현실인식과 저항」,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1999
이혜진, 「전시 변혁론으로서의 동아협동체론과 동아연맹론」, <실천문학> 95, 2009
채수도, 「동아연맹론의 정치적 의미에 대한 고찰 – 비판적 분석을 중심으로」, <대한정치학회보> 2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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