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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4.3 희생자 추념식에 다시 나타난 서북청년단…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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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의와 반발 받고 현장 떠난 서청 재건위… 역사를 안다면 이래선 안 된다

▲ 4·3희생자 추념식이 열리는 제주4·3평화공원 앞 도로에서 제주시민사회단체의 반발로 차량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는 서북청넌단 ⓒ 제주도사진기자회

2023년 서북청년단(아래 서청)이 다시 제주에 나타났다. 그것도 제주도민에게 가장 슬프고 엄숙한 4월 3일 희생자 추념식이 열리는 평화공원 앞에 등장했다.

3일 오전 7시 30분쯤 제주4.3평화공원 앞 도로에 서청 단원들이 탄 승합차가 도착했다. 그러자 제주시민사회단체가 차량을 막았고, 양측의 충돌을 우려한 경찰이 출동했다.

오전 8시 40분 제주시민사회단체의 거센 반발로 차량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던 서청 승합차는 유족회의 설득으로 행사장 앞 도로에서 떠났다. 그러나 서청은 과거 서청 사무실 터와 제주시청 앞에서 계속 집회를 이어나가겠다고 밝혔다.

제주에 상륙한 서청, 그들의 끔찍한 만행

▲ 4·3진상규명을 위해 발간된 ‘서북청년단 만행’ 관련 자료 ⓒ 4·3도민연대 출처 : 아이엠피터뉴스

제주도민에게 서청은 공포의 대상이자 아픔을 떠올리게 하는 트라우마의 상징이다. 4.3 사건 당시 육지에서 온 경찰들의 만행이 주요 원인으로 꼽힐 정도로 잔혹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육지경찰’은 서청을 뜻한다.

제주에 서청이 등장한 것은 1947년이다. 3월 1일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이 사망하고 시위와 총파업이 벌어진다. 당시 도지사로 부임하는 유해진은 서청 단원 7명을 경호원 자격으로 데려온다. 이를 계기로 서청 단원들이 대거 제주로 들어온다.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는 서청의 만행과 횡포는 제주도 전역에서 발생했다. 이들은 무전취식은 기본이며 이승만 사진과 태극기 등을 강매하며 돈을 뜯어냈다. 4.3사건 당시 고성리와 난산리 주민 33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서청의 이승만 대통령 초상화 강매를 거부한 고성리 청년들에 대한 보복 학살이었다.

서청은 처녀를 겁탈해 현지처로 삼거나 배급 식량이나 구호 물품을 제멋대로 가져가기도 했다. 구호 물품을 더 달라는 요구를 제주도 총무국장이 “서청은 구호 대상이 아니다”라며 거부하자 린치를 가해 그를 죽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무실로 사용하는 적산가옥을 통째로 갖기 위해 제사상에 오줌을 떨어뜨리고 이를 항의하는 집주인을 폭행하기도 했다. 서청은 당시 제주의 유일한 신문이었던 <제주신보>도 강제로 접수했다.

서청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유일한 논리는 ‘빨갱이’라는 말이었다. 서청 제주도위원장 안철은 “제주도는 한국의 작은 모스크바”라며 방첩대에 이를 입증하겠다고 했다.

서청의 ‘빨갱이 척결’을 받아들인 이승만과 미국은 이들을 경찰과 군인으로 만들어줬다. 로버츠 미 군사고문단장은 한국군 3개 대대를 주로 서북청년회 단원으로 충원시켜 강경진압작전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4·3 사건 당시 조천지서 앞에서 벌어진 집단학살 사건은 서청 출신 ‘응원 경찰’이, 성산포 터진목 집단 학살은 서청 단원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벌인 만행이었다.

서청은 민간인 학살, 중산간 초토화 작전, 예비 검속 등을 주도했고, 제주 도민을 공포와 죽음으로 몰고 갔다.

서북청년단 재건위 “안두희의 김구 처단은 의거”

▲ 서거 직후 김구 선생 1949년 6월 서거 직후 김구 선생 모습. 배후세력이 누구인지는 끝까지 미궁에 빠졌으나, 양식있는 시민이라면 상식처럼 다 알고 있다. ⓒ 이영천(경교장 전시물 촬영)

“서북청년회는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들 가운데 특히 혈기왕성한 청년층이 ‘반공’을 표방하면서 만든 청년단체였다. 그러나 말이 청년단체이지 하는 짓은 정치깡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들을 비호하던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조차 나중에는 진저리를 칠 정도의 비인간적 테러집단이 바로 서북청년회였다.” (민족문제연구소회보 2014년 11월호)

김구 선생을 살해한 안두희는 서청 출신이다. 안두희는 월남 후 서울에 온 지 석 달 만에 서청 부위원장인 김성주와 만나 서북청년회 서울 본부 직속인 종로지부의 사무국장이 됐다.

당시 김성주는 “이승만의 지시를 받아 내가 안두희를 시켜 백범을 죽였다”고 자랑하고 다녔고, 심지어 안두희 공판일에는 법원 앞에서 ‘안두희는 민족의 영웅’이라는 전단을 살포하며 석방을 요구하기도 했다.

2014년 배성관 당시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장은 온라인 커뮤니티 일베에 “반공단체인 서북청년단원 안두희씨가 김구를 처단한 것은 의거”라는 글을 올렸다. 1949년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옹호했던 서청 김성주의 주장과 똑같다.

서청은 정치 깡패를 넘어 테러 조직으로 봐야 할 정도로 암살과 기습 사건 등을 주도한 집단이다. 이런 테러 조직을 후원한 것은 이승만과 친일 기업, 우익 정치인들이었다.

화해와 상생 위해? “오늘만큼은 제발 자제해 달라”

▲ 서청 단원과 차량에서 대화를 나누는 4.3희생자 유가족 ⓒ 유튜브 화면 캡처

제주도민에게 4.3희생자 추념일은 단순한 국가 행사가 아니다. 제주도 전역에서 한낱 한시에서 올리는 제삿날과 같다. 제주도민 중에 4·3 사건에 연루됐거나 희생자를 찾는 것은 흔하디 흔한 일이다.

이런 날에 서청이 제주에 왔다는 것은 제주도민에게는 아픔을 강제로 끄집어내는 잔인한 일이다. 특히 서청은 유족회와 만난 자리에서 자신들은 ‘화해와 상생을 위해 왔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믿기는 어렵다.

정함철 서청 구국결사대장은 제주에 오기 직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좌익해방구의 심장부에서 휘날리는 서청의 깃발 아래 어떤 역사가 쓰여지는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기 바란다”는 글을 올렸다.

서청과 대화를 나눈 유족은 “내 아버지도 서청의 강압적인 요구를 거부하다 끌려가 사흘 동안 매를 맞았다”면서 “오늘만큼은 서청 깃발이나 퍼포먼스를 자제해 달라”고 당부했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부탁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여전히 ‘빨갱이 척결’을 ‘애국’으로 생각하는 극우 집단을 이용하는 정치인들이 있기 때문 아닐까.

덧붙이는 글 | 독립 미디어 ‘아이엠피터뉴스’에도 게재됐습니다.

임병도 기자

<2023-04-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4.3 희생자 추념식에 다시 나타난 서북청년단…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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