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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난 그냥 평범한 할아버지” 관심 쏟아지자 ‘어른 김장하’가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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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보도 후 만남 요청 쇄도, NC구단 시구 제안했지만 사양… 김 선생은 여전히 ‘겸손’ 강조

▲ 진주 김장하 선생. ⓒ 김클소리

“기사 읽다가 눈물이 나오는 것은 처음이다. 아직 대한민국이 살만한 나라 같다.”

“1987년인가 1988년인가 여러 고등학교가 모여 행사를 진행할 때 명신고등학교 학생이 학교 자랑으로 ‘이사장님’을 꼽았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그 당시 우리는 학교 이사장 욕하기에 바빴는데. 참으로 부러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분의 선한 영향력이 윗선에 닿아지길 바란다. 추운 겨울도 따스하게 녹일만한 훈훈한 감동에 올 연말이 마냥 춥지만은 않다.”

2022년 말 <오마이뉴스>가 낸 김장하(79, 진주) 선생 관련 기사에 누리꾼들이 쓴 댓글이다. 지난 연말에 책 <줬으면 그만이지>(피플파워 간)가 나오고, 다큐 <어른 김장하>(MBC경남)가 방영된 이후, 그의 삶이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 이에 김 선생과 관련된 추가 일화와 보도 이후의 일들을 소개한다.

(관련기사 : 대통령 초대, 인터뷰도 거부… 평생 번 돈 기부한 어른의 한 마디)

[일화] 노 전 대통령 초대 거부… 서거 후 박석 새겨 추모

김장하 선생은 경남 사천에 이어 진주에서 아호(남성, 南星)를 딴 남성당한약방을 2022년 5월까지 60여 년간 운영해 왔다. 그는 한약방을 운영하며 번 돈으로 남성학숙을 설립해 명신고등학교를 운영하다 국가에 기부채납했고, 경상국립대 후원을 비롯해 오랫동안 장학금을 내놓았다.

1992년 4월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명신고를 기부채납한 것과 관련해 정부에서 수여했다. 그는 훈장을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당시 교육감이 찾아와 ‘받지 않으면 교육감을 그만둬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선생은 시민주 800여 명이 모여 만들었던 옛 <진주신문>에 10년가량 매달 1000만 원 안팎을 후원하면서도 한 번도 편집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2021년까지 27차례 열린 1500만 원 고료(시·소설)의 ‘진주(신문)가을문예’를 지원했다.

한때 김 선생은 시민들로부터 선거 출마를 권유받기도 했다. 1990년대 첫 민선 진주시장선거를 앞두고 시민단체가 모여 투표로 김 선생을 시민후보 1순위로 선정했다. 당시 시민단체 대표들은 한약방 앞을 찾아가 ‘농성’을 하더라도 승낙을 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김 선생은 이를 미리 알고 자리를 피해버린 일화가 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2년 당선된 뒤 국무총리·장관 후보를 ‘국민 추천’ 받았을 때, <내일신문>은 1면 머릿기사로 김 선생을 소개하면서 ‘이런 사람이 국무총리가 돼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선생은 한번도 정치에 나아가지 않았다.

▲ 진주 김장하 선생(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이 고 노무현 대통령 묘역 박석에 새긴 글. ⓒ 노무현재단

김 선생은 노 전 대통령이 후보 때 사전 연락 없이 한약방을 찾아와 만난 적이 있는데, 노 전 대통령이 당선 뒤에는 초대를 해도 응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김 선생은 봉하마을 묘역에 “희망과 소신으로 이루고자 하신 일 가슴에 새겨 둡니다. 김장하 두 손 모음”이라고 쓴 박석을 남겨 고인을 기렸다.

김장하 선생은 형평운동기념사업회 회장, 경상국립대 남명학연구후원회장,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진주지부 이사장, 경상국립대 발전후원회장, 지리산살리기국민행동 영남대표, 지리산생명연대 공동대표 등을 지냈다.

김 선생은 2001년 아호를 딴 ‘남성문화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장학금과 함께 여러 지원을 해왔다. 이 재단은 한약방 폐업을 앞두고 해산 절차를 밟았다. 특히 그는 진주오광대 복원, 진주문화연구소의 <진주문화를 찾아서> 책 발간을 도왔고, 극단 ‘현장’과 큰들문화예술센터 등에 후원을 해왔다.

여러 지원·활동을 벌이면서 김 선생은 한번도 스스로 보도자료를 내거나 드러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진주시민상’이나 ‘경남도문화상’, ‘경남교육상’을 추천하려고 해도 극구 못하게 했고, 몇몇이 이를 추진하다 들통이 나는 바람에 호되게(?) 한소리를 듣기도 했다.

[보도 후] 시구 제안, 김경수 지사 만남… 계속되는 발걸음

자가용 없이 자전거를 탔던 그의 삶 등이 책과 다큐를 통해 진주를 넘어 전국에 알려지자 호응은 예상보다 더 뜨거웠다. <오마이뉴스>를 비롯한 여러 언론사에서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김 선생은 거부했다. 가끔 길거리에서 일면식이 없는데도 김 선생을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전국에서 김 선생의 흔적을 더듬어 진주를 찾는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김 선생을 만나 뵙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전에는 무조건 한약방으로 찾아가면 만날 수 있었다. 한약방이 문을 닫은 뒤로는 특별히 연락하지 않으면 김 선생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은 옛 한약방 건물이나 형평운동기념탑을 찾기도 한다.

김 선생은 야구를 좋아한다. 특히 프로야구 NC 다이노스 팬으로 알려졌다. 이를 안 NC 측에서 ‘김장하’ 이름에다 등번호 ‘0’이라고 새기고 선수들이 사인한 옷을 선물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NC 측에서 올해 개막 경기 때 시구를 제안했지만 김 선생은 사양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경수 전 경남지사는 지난 1월 10일 부인 김정순씨와 함께 진주를 찾아 김 선생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 전 지사는 “우리 사회가 갈등이 심한데 해외의 사회 통합 사례를 공부하고 싶다”라 말했고, 김 선생은 “분노와 용서 중에 용서를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 창원을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 NC다이노스 팬으로 알려진 진주 김장하 선생(옛 남성문화재단 이사장, 사진 왼쪽)이 등에 ‘0’번과 이름이 새겨지고 NC다이노스 선수들이 사인한 옷을 받아 들오 보이고 있다. ⓒ 하정우
▲ 김경수 전 경남지사 부부와 김장하 선생. ⓒ 윤성효

최근 촉석루에 이어 옛 남성당한약방을 찾았던 안철택 경북대 교수(독어독문학)는 “책을 읽고 다큐를 보고 나서 그 분을 알게 됐다. 직접 뵙지는 못하지만 흔적이라도 느끼고 싶어 진주를 다녀 왔다”며 “처음에는 어떻게 이런 분이 계실까 해서 믿기지도 않았고 놀라웠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남명 조식 선생 후학인 할아버지 영향을 받으신 것 같기도 하고, 책을 많이 읽어서 열린 마음으로 모두 같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신 것 같다. 또 타고난 성품 자체가 맑은 영혼을 가진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자라나는 학생들도 본을 받아야 할 것 같아 독후감을 내도록 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신 분이라 주변에 널리 알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남 곡성에 있는 인문연구공간 ‘이화서원’ 김재형 대표가 회원 10여 명은 지난 3월 19일 진주를 찾아 한 찻집에서 김장하 선생을 만났다. 이날 김 선생은 ‘형평운동’, ‘진주정신’ 등에 대해 회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 선생을 만난 김재형 대표는 “뵙고 귀한 말씀을 들었다. 평범함에 대해, ‘진주정신’의 깊은 연원에 대해, 삶의 기쁨에 대해, ‘줬으면 그만이지’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늘 꿈꾸는 성인의 향기를 가까이에서 느꼈다”고 전했다.

지난 1월 28~29일 약산김원봉과함께·민족문제연구소가 밀양에서 실시한 김원봉 선생 등 독립운동가의 발자취 답사에 함께했던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서울에서 밀양으로 오는 동안 버스 안에서 다큐를 본 사람들이 김장하 선생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며 “이전에 조문기 전 이사장과 함께 진주에 가서 민족문제연구소 후원금을 받았을 때가 생각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현태 전 남해군수는 지난 2월 15일 진주에서 여태전 전 상주중학교 교장과 함께 김 선생을 만났다. 정 전 군수는 이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노무현재단 경남지역위원회 상임대표의 첫 행보로 김 선생을 만났다”며 “선생께서 하신 선한 일들에 대해 오래 전부터 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지만 첫 대면이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권순기 경상국립대 총장은 “지역사회에서 교육, 문화, 언론, 여성,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 재정적 지원을 하고 때로는 직접 단체의 대표를 맡아 수많은 역할을 했음에도 김장하 선생은 이를 내세우지 않았다”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김장하 선생을 우러러보고만 있을 게 아니라, 선생의 삶의 철학을 열심히 따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책·다큐 이후에 대해 여태훈 진주문고 대표는 “한 사람의 선한 영향력이 진주를 알리는 계기가 됐고, 진주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본다”면서 “진주 내에서 김장하 선생의 삶을 배우고 따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요즘 같이 너무 힘든 시대에 이런 분이 계셨구나 하며 희망을 갖는 것 같다. 선한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퍼져 나갈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영만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상임고문은 “김장하 선생을 한 번도 뵌 적은 없고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제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살지 못했을 것이다. 창원마산을 비롯해 다른 지역에도 다소 여유롭게 사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다들 자신과 가족 위주이거나 자기 정치를 했다. 그런데 김 선생은 자기 위주이거나 정치를 하지 않고 남을 위해 살았으니 존경받아 충분한 분이다”고 말했다.

[김장하 선생의 말]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뤄온 것”

▲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의 한 장면. ⓒ MBC 경남
▲ 진주 김장하 선생(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 정현태 노무현재단 경남대표(전 남해군수), 여태전 건신대학원대학 교수(전 상주중 교장)이 2월 15일 진주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 정현태

명신고를 설립했던 그는 교사 채용 때 돈을 받지 않았고 친인척을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 끝까지 지켰다. <대학>에 나오는 ‘명덕신민(明德新民)’을 건학이념으로 내세웠던 것인데, 김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사장으로 있을 때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거침이 없었고, ‘교육자이냐’고 노골적으로 묻기도 했고 고리타분하게 무슨 명덕신민이냐고 묻는 아이도 있다. 그래서 ‘나는 교육자가 아니다. 교육자는 너희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다. 이사장은 그 선생님들이 잘 가르칠 수 있도록 돕는 보조자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박수를 치면서 좋아했다. 그리고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것을 쓰는 것은 사람이다. 그러니 먼저 훌륭한 사람을 길러야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디지털시대에도 명덕신민은 꼭 필요하다고 했더니 아이들이 동의해 주더라.”

책·다큐 이후 김장하 선생은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고 했다. 김 선생이 보여준 모습은 늘 ‘겸손’이었다. 그런데 책·다큐로 인해 너무 많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는 다큐 방영 후 기자와 만나 “취재·제작했던 사람들이 고생은 했는데, 지나고 보니 불편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 선생은 “경상국립대 교수를 지낸 고 김수업 전 대구가톨릭대 총장과 옛 <진주신문> 대표이사를 지낸 박노정 시인에 대한 이야기가 다큐나 책에 없거나 소홀하게 다뤄졌다”면서 “지금은 고인이 돼 없지만 두 사람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사회 활동을 해왔고, 두 분 때문에 책도 많이 읽은 것 같다”고 말했다.

요즘 김장하 선생은 사람들을 만나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정현태 전 군수와 이화서원 회원들을 만나서 했던 이야기 가운데 대표적으로 ‘쌀에서 나온 돌’과 형평운동, 진주정신 관련이다. 올해는 백정신분 해방을 부르짖었던 형평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 세상은 특별한 사람들이 한 게 아니라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이루어낸 것이다. 옛날에 사돈 끼리 만나서 사돈 집에 놀러갔다고 한다. 사돈 관계는 원래 어려운 사이인데, 집으로 모신 것이다. 주인사돈이 안사돈한테 모처럼 오신 사돈이니 대접을 잘하라 했고, 안사돈이 정갈하게 밥상을 차렸다.

그런데 손님사돈이 돌을 하나 씹으니까 주인사돈이 놀라서 당황해 하면서 ‘돌이 많지요’라고 하니까 손님사돈이 ‘아니올시다. 그래도 쌀이 더 많네요’라고 했다고 한다. 우문현답이다. 그런 쌀 표현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평범한 사람들, 법과 질서를 잘 지키면서 우리나라 근대화와 민주화를 이끌어 온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루어온 것이다.”

김 선생은 “저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고, 그냥 평범한 이웃 할아버지다”라며 “그래서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일구는 사회를 잘 지켜나가자고 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장학생 이야기를 꺼낸 김 선생은 “한약방을 60년간 하고 지난해 그만 둘 무렵, 여러 사람들이 모였다. 그 중에 장학생도 있었다. 어느 장학생이 하는 말이 ‘장학금을 받았는데 훌륭한 사람이 못 돼 죄송하다’고 하더라. 그래서 훌륭한 사람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게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세상을 유지한다고 했다”며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물 흐르듯이 살면 된다. 물이 흐르다가 앞에 받치면 돌아가면 되고 파여 있으면 채워가면 된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라고 했다.

그는 “길을 가면 방송 봤다며 알아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부담스럽다”며 “항상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살고 있다. 무엇을 베풀었다고 뭔가를 바라는, 그런 마음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 진주지역 몇몇 사람들이 김장하 선생의 이력을 정리한 자료. ⓒ 윤성효

‘형평운동’을 알리는 일에 앞장 서온 김 선생은 “신분 차별을 없애자는 운동이었다. 그런데 진주에서 왜 형평운동이 먼저 일어났느냐. 백정이 진주에만 많이 살았던 것도 아니고, 진주백정만 더 탄압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며 “그 밑 바탕에는 ‘왜?’라는 단어가 붙는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백정이라고 해서 나도 백정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왜’라는 단어가 붙으니까 기폭제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진주정신’이다”라고 설명했다.

‘진주정신’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 그는 “진주에만 있는 독특한 정신이다. 남명 선생, 논개, 진주성싸움, 의병, 임술년 진주농민항쟁 등에서 비롯됐다. 결국에는 불의를 보고 좌시하지 않는다는 정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이라며 “형평운동은 그 진주정신이 불씨가 되고 기폭제가 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 “내가 돈을 벌었다면 결국…” 김장하 선생이 평생 아름다운 기부해온 이유 경남 진주에 사는 김장하(79) 선생은 남성당한약방을 운영하며 번 돈으로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했다가 국가에 헌납했다. 장학사업과 함께 문화예술단체 뿐만 아니라 옛 <진주신문>과 진주가을문예, 시민운동 등 여러 시민사회에 지원을 해왔다. 김장하 선생은 2022년 5월까지 60여년간 한약방을 운영해 왔다. 영상은 김장하 선생이 한약방 문을 닫기 전에 평생 해온 일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 윤성효

윤성효(cjnews)

<2023-03-3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난 그냥 평범한 할아버지” 관심 쏟아지자 ‘어른 김장하’가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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