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문예봉
국민들은 거칠게 반발하고 있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강제징용과 위안부 등을 비롯한 일제 강제동원을 죄악시하지 않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식민지배는 피해를 주지 않았으며 이로 인한 금전관계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다 해결됐다’는 일본 정부의 거짓 주장에 윤석열 정부도 끌려가고 있다.
지난달 28일에는 ‘강제징용이 아니라 그냥 징용’이라는 취지를 담은 일본 문부성의 교과서 검정 결과도 발표됐다. 일본의 역사 왜곡이 한층 심해졌는데도. 이것이 윤 정부의 대일정책에 영향을 주지 않고 있다.
이렇게 정부 차원에서 일본 주장에 동조하는 흐름이 계속되다 보면, 이런 분위기에 적극 호응하는 제2의 문예봉 같은 친일 예술인이 출현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일제 강점 7년 뒤인 1917년 1월 3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한 문예봉의 본명은 문정원이다. 초등학교인 함흥여자공립보통학교를 중퇴한 그가 연예인의 길로 뛰어든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문예봉 편은 “민중극단·취성좌·연극시장 등에서 활동한 아버지 문수일이 연극 활동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부인과 헤어지게 되자, 문예봉은 아버지와 함께 생활했다”라며 “딸을 배우로 만들려 했던 문수일에 의해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무용을 배웠다”라고 설명한다.
13세 때인 1930년경 연극 무대에 데뷔한 문예봉은 1931년 7월 12일 자 <동아일보>에서 ‘내일을 약속하는 배우’로 소개될 정도로 급성장했다. 긴 머리에 하얀 옷차림인 그의 사진과 함께 실린 이 기사의 제목은 ‘명일(明日)을 약속하는 문예봉 양’이다.
문예봉은 1932년에 영화감독 나운규(1902~1937)의 발탁으로 <임자 없는 나룻배>에 출연해 영화배우로 변신했다. 3년 뒤 <춘향전>으로 인기를 끈 문예봉은 1936년 작품인 <그 후의 이도령> <장화홍련전> <무지개> <미몽>과 1937년 작인 <인생항로> <나그네> 등에서 주인공을 연기하면서 ‘삼천만의 연인’이라는 애칭을 얻게 됐다.
이런 인기는 한국인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기보다는 일본제국주의의 군사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활용됐다. <친일인명사전>은 “1930년대 말부터 일제가 조선 영화를 본격 통제하기 시작하자 적극 호응해 활동했다”라고 설명한다.
강제징병 미화하는 작품에도 출연
그는 일제 강제동원의 일종인 강제징병을 미화하는 작품에도 출연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1941. 12. 8.) 직전인 1941년 11월 15일 개봉된 <그대와 나>에 등장했다. 그가 한국인 지원병의 아내를 연기한 이 영화는 일본군 조선군사령부가 제작을 맡고 조선총독부와 육군성 보도부가 후원한 작품이다.
2019년에 <일본학보> 제120집에 수록된 함충범 한양대 연구교수의 논문 ‘식민지 조선영화 속 대동아공영의 표상’에 따르면, 한국인 허영이 감독한 <그대와 나>는 일종의 블록버스터였다. 이 논문은 “전쟁 장비와 지원병훈련소의 사용, 경성-부여-도쿄를 오가는 로케이션 및 세트 촬영, 조선·일본·만주 영화계의 유명 배우와 스태프 참여 등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그대와 나>라는 제목은 일본인과 한국인이 하나 되어 전쟁을 수행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위 논문은 1941년 7월 26일 서울 반도호텔에서 열린 영화 좌담회 때 허영 감독이 했던 말을 소개한다. “그에 의하면 ‘그대’는 일반 일본인의 총칭이고 ‘나’는 일반 조선인의 총칭이며, 제목의 의미는 그대와 나는 굳게 손을 잡고 대동아 공영권의 초석이 되자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한국 청년들을 전쟁으로 내모는 이 영화에서 당시 24세인 문예봉은 한국인 지원병 기노시타 다로의 아내인 복순을 연기했다. ‘삼천만의 연인’이 한국 여성을 대표해 지원병 남편을 떠나보내는 모습을 연출했던 것이다.
1941년에 그는 <그대와 나>보다 먼저 상영된 <지원병>에도 출연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지원병>에서는 주인공 춘호의 헌신적인 연인 역을 맡았다”고 설명한다. 미국이 참전하기 이전이라 일본군이 한층 기세등등했던 그해에 문예봉이 ‘지원병의 여자’ 이미지를 굳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문예봉은 한국인이 일본제국에 대해 양심을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군용열차>에도 출연했다. 1938년 6월 29일 개봉된 이 작품은 최초의 친일 영화로 평가된다. 그해 7월 2일 자 <조선일보> 기사 ‘7월 제1주 영화’에 따르면, 가난한 노동자인 원진이 기생 영심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항일 활동을 거들었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 포기한다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다. 문예봉이 맡은 역할은 기생 영심이다.
자신의 가난이 사랑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하는 원진은 ‘영심의 오빠이자 군용열차 기관사인 점용으로부터 열차 출발 시각을 빼내서 알려주면 거금을 주겠다’는 항일 스파이의 제안을 받고 군용열차 폭파 작전에 연루된다. 하지만 막판에 “양심의 가책을 바더” 군용열차에 뛰어들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일제는 다종다양한 선전 메시지를 통해 한국인들의 충성심을 끌어내려 했다. 문예봉은 그런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을 고사하지 않았다. 일제가 한국 고아들을 보살핀다는 메시지를 담은 영화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고아들을 구제하여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내용의 고려영화협회 제작, 최인규 연출의 <집 없는 천사>에서는 고아들을 구제하는 데 앞장서는 목사의 아내 역을 맡았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집 없는 천사>가 개봉된 이듬해인 1942년에는 반려견을 소재로 한 작품에도 출연했다. “애견을 팔아 국방헌금을 낸다는 내용의 조선영화주식회사 제작, 김영화 연출의 <우러르라 창공>에도 출연했다”고 위 사전은 설명한다.
북한 선전영화에서도 두드러진 활약
문예봉이 영화 출연을 통해서만 친일 재산을 축적하고 반민족행위를 한 것은 아니다. 일본이 영화산업을 통제할 목적으로 1942년에 설립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연기과 사원으로도 근무했다. 영화배우로, 영화사 직원으로 일본 돈을 벌어가며 침략전쟁 선전에 가담했던 것이다.
해방 뒤 문예봉은 좌파 영화인으로 변신했다. 친일파가 우파 활동가로 변신하는 것보다 좌파 활동가로 변신하는 게 훨씬 힘들었다. 그것을 거리낌 없이 해낸 그는 1946년 8월 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이 됐다. 그랬다가 분단이 가시화된 1948년 초에 31세 나이로 고향이 있는 이북으로 넘어갔다.
이 시기에는 좌파 영화인들의 월북이 많았다. 1966년 6월 12일자 <조선일보> ‘주역을 통해 본 스크린 반세기’ 제9회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붙들렸다가 도주한 영화인 전택이의 증언을 근거로 “해방 전부터 세포 조직을 준비해오던 붉은 영화인들은 8·15 직후 영화동맹을 만들어 날뛰기 시작했으나 남한 적화의 야망이 금가게 되자 그들의 상전이 도사린 북쪽으로 넘어갔다”며 60명가량 되는 월북 영화인 중 하나로 문예봉을 거명했다.
남한보다는 철저했지만, 북한의 친일청산 역시 완전치 못했다. 이런 분위기는 일제 선전영화에서 두각을 보인 문예봉이 북한 선전영화에서도 두드러진 활약을 할 수 있게금 만들었다. 1949년부터 북한 영화에 출연한 그의 1951년 작품 속에 <소년 빨치산>이 있다. 1954년 작품에는 <빨치산 처녀>가 있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그랬던 것처럼 북한 정권하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1951년에 훈장을 받았고, 1952년에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 1961년에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이 됐다. 1967년에 협동농장으로 추방됐지만 13년 뒤 <춘향전>으로 복귀했고, 65세 때인 1982년에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친일파 예술인들이 남한에서 승승장구했듯이, 문예봉은 이북에서 그렇게 살았다. 1999년 3월 26일 82세 나이로 사망한 그를 김정일 정권은 평양 애국열사능에 안치했다.
지금 대한민국 정부는 위안부·강제징용·강제징병 등의 불법성을 부정하는 쪽으로 정권이 나아가고 있다. 국민과 정부의 분위기가 상반된 방향으로 나아가다 보면, 일제 때 그랬던 것처럼 ‘한일 화해’라는 미명하에 예술인들이 한국 국민들을 겨냥한 선전전에 동원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북한 애국열사능에 묻힌 문예봉 같은 연예인들이 다시 출현해 ‘식민지배는 한국 근대화에 이로웠다’, ‘1965년에 다 끝났다’라는 메시지를 선전하게 될지도 모른다.
김종성 기자
<2023-04-09>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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