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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버스] 변절의 시대에 친일파들에게 폭탄을 던진 조문기의 항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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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은 친일파들의 세상

1945년 7월 24일.

서울 덕수궁 옆 부민관(府民館) 일대의 거리는 ‘아시아분격대회’의 현수막과 벽보가 가득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에 조선의 청년들을 보내고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을 패배시켜 위대한 천황의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러니 이 곳이 조선 땅의 거리인지 아니면 일본 동경의 거리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이 나라를 빼앗은 지 거의 36년이 되어 가고 있으니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덕수궁 일대도 조선의 정기는 사라지고 오로지 일본의 모습만이 가득한 거리가 됐다. 아니 서울만이 아니라 조선 전체가 바로 일본의 땅이었다. 그저 친일파들의 세상이었다.

경복궁에 지은 조선총독부.

부민관에 터진 폭탄!

오후 7시!
꽈꽝꽝, 꽈꽝!
아시아분격대회장인 부민관에 천지가 진동할 폭탄 소리가 울려 퍼졌다. 1910년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이후 친일파들과 총독부의 주요 기관을 폭파하기 위해 그 이전에도 던진 폭탄들이 있었지만, 이처럼 거대한 폭음이 들리기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해방 이후 초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할 정도로 컸던 부민관은 폭탄의 폭발로 인하여 자욱한 연기가 가득했고, 온몸에 피를 흘리며 튀어나오는 일본인과 조선인 친일파들로 가히 아수라장이었다.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 투척 이후 조선인들 사이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이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그 주인공은 바로 19살의 젊은 청년 조문기와 그의 동지들이었다. 이들은 식민지 조선의 젊은 청년들을 일제의 총알받이로 보내 천왕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골수 친일파 박춘금을 처단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폭탄을 던진 것이다.

부민관.

변절의 시대가 시작되다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이 되기 채 한달 정도 남은 조선 땅은 일본의 전성시대였다. 그 시절 조선인 뿐만 아니라 소수의 일본인을 제외하고 어느 사람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에 패배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일본의 언론 통제가 상당했기에 일본이 미국 군대를 싸우는 족족 이기고 있다는 뉴스만 존재할 뿐 일본이 미국과의 전투에서 싸우는 곳곳마다 패배하고 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까지 조선 땅에서 일본이 패망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1930년대 이후부터 일본의 강대한 군사력과 조선총독부의 철저한 통제로 친일파들의 행패는 더욱 심해졌다. 조선의 백성들은 날이 갈수록 곤궁해지고 식민지 조선을 해방시키겠다는 독립운동가들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오죽했으면 1919년 3․1투쟁의 주역이었던 최남선과 이광수 그리고 최린 등이 변절했을까. 이들은 더이상 일본과 싸우는 일은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국외 독립운동도 그 위세를 상당히 잃어버렸다.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은 장개석의 지원을 받아 한중(韓中) 연합 군대를 조직하려 하였지만 이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독립운동을 하려면 투쟁을 위한 군자금이 있어야 하는데, 국내외 동포들의 후원도 미약해져서 장개석의 지원 없이는 일본과 항전은 커녕 임시정부의 운영도 어려웠다. 그러니 상당수의 독립운동가들이 변절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영화 ‘밀정’에 나오는 변절자들이 실제 존재하였다.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 대열에서 이탈하면서 김일성 부대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계열의 무장 투쟁대가 그 명맥을 이루며 압록강 일대에서 국내 진공 작전을 가끔씩 전개할 따름이었다. 물론 이것도 역시 대단한 일이었지만 3.1만세투쟁과 봉오동 전투, 청산리전투 같은 대규모 승리를 통해 우리 민족에게 무장투쟁으로 독립이 가능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에는 너무도 기운이 빠졌다.

이러한 현실이다보니 식민지 조선인들이 세계적인 군사대국 일본과 싸우는 일은 미련한 일이고 오히려 일본의 지배를 받아 살아가는 것이 조선인 전체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천하의 영재로 손꼽히면서 일제에 항거하던 유진오도 변절하여 친일을 위한 글을 쓰기 시작하였으니 이 어려운 시대에 어느 누가 감히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일본의 만행, 친일파들의 패악질

이처럼 그 누구도 일본이 연합국에 패망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던 시절에 젊은 조문기(趙文紀)는 목숨을 내걸고 친일파들을 처단하기 위한 폭탄을 던져 조선인의 기개를 온 한반도에 떨쳤다. 친일파의 대명사였던 박춘금은 조선인 청년들을 강제동원하여 일본땅의 광산으로 가서 노동을 하고, 또한 일본인들이 싸우는 태평양 남쪽의 남양군도에 가서 일본왕을 위해 죽으라고 하였다.

경기 화성시 매송초등학교에 있는 조문기 선생 동상.

1940년부터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과 싸우기 위해 일본의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군함도라 불리는 하시마섬과 일본 북서쪽의 니카타 앞에 있던 사도섬에 광산을 개발하고, 조선인들을 강제 동원하였다. 일본 정부는 일본 기업들이 조선인 노동자들을 공급해달라는 요구를 받아 강제동원령을 내려 마을 단위로 청년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일본의 오지에 있는 광산으로 보냈다.

여기에 더해 조선임전보국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일본 군인들을 위한 위안부를 보내게 하였다. 조선의 젊은 여인들에게 일본 기업에서 고액의 인건비를 주어 부자로 만들어주겠다고 거짓으로 유혹을 하거나, 마을에서 강제로 납치를 하여 일본 군인을 위한 공창 위락소로 보냈다. 바로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이런 일을 자행하고 있었다.

친일파들의 이같은 만행을 조문기는 참을 수 없었다. 본인이 직접 일본땅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온갖 모멸과 착취를 당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일왕(日王)을 위해 충성서약을 하는 친일파들은 조선 백성들에게 구족(九族)을 멸해야 할 악귀(惡鬼)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친일파, 즉 토왜(土倭)들에 대한 그의 항거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항거는 당대 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사건이기도 했다.

외할아버지로부터 배운 민족의식

조문기는 1927년 5월 19일 수원의 야목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행정구역으로 치면 화성시 야목이지만 당시에는 모두가 수원 지역이었다. 어린 시절 그에게 민족의식을 갖게 된 숨은 사연이 있었다.

어린 시절 독립운동을 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부친이 집을 떠나게 되어 외가인 용인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때부터 대한제국 시절 승지를 지낸 외할아버지로부터 민족의식을 교육받으며 성장하였다.

불원복 태극기.

용인의 양지보통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학교에서 나누어준 일장기를 가지고 집으로 왔다. 그때 외할아버지는 일장기를 보고 그것은 우리나라의 국기가 아니라고 알려주었다. 어린 조문기가 그러면 어디서 우리나라 국기를 볼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향교 전문에 있는 태극 문양이 진짜 우리 국기”라고 알려 주었다. 조문기가 우리 국기를 알고 민족의식을 각성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때 부터였다. 당시 외할아버지는 조문기에게 일본이 알려주는 조선의 역사가 아닌 진짜 조선의 역사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나라가 힘이 없어서 일본 자객들이 궁궐에 들어와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알려주었다.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비극의 역사를 알게 된 조문기는 청년으로 성장해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조선인 멸시 규탄 파업’을 주도

당대 최고의 명문이라는 경성사범학교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은 조문기는 서울로 올라와 시험을 치루었다. 그런데 일본 당국이 일본인들을 합격시키기 위해 부정 입학 시험을 치루는 바람에 조문기는 떨어지고 말았다.

충분히 합격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며칠을 슬퍼하다가 조문기는 이런 나라를 더 이상 만들지 않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 일본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일본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1942년 그의 나이 16살 때였다.

일본으로 건너가서 노동과 공부를 함께 하기로 마음먹고 일단 돈을 벌기 위해 공장에 취업을 했다. 동경 근교 가와사키(川崎市)에 있는 ‘일본강관주식회사’의 훈련공으로 입사를 하였다. 당시 훈련공들은 약 3,000명 정도 되었는데 대부분 조선의 청년들이었다.

말이 공장이지 거의 군대조직처럼 운영되고 있었다. 태평양전쟁 시기였기에 일본인들의 조선인 훈련공에 대한 통제는 상당했고, 조선인의 차별은 극심하였다. 조문기는 이러한 조선인 차별에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7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1943년 5월 한국인 노무자 3,000여 명이 참여한 ‘조선인 멸시 규탄 파업’을 주도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사회주의 활동가들 중심으로 공장에서의 파업이 진행되었지만 조선인 노동자들의 파업은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태평양전쟁 시기였기에 일본 노동자들도 파업을 못하던 시절에 젊은 조문기는 대담하게 파업을 주도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심각한 위기를 느끼고 헌병대까지 동원하어 파업을 진압하였고, 조문기는 당연히 수배되었다.

대한애국청년당 결성과 부민과 폭파

지명수배를 피하여 국내로 돌아온 뒤 조문기 선생님은 더욱 피나는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온 나라가 친일파들의 세상이 되었고,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위해 조선의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당시 독립운동의 대부분은 압록강 넘어 항일무장투쟁이 대부분이었고, 국내 일부 명망가들이 소극적으로 항일 발언을 하는 수준이었다.

40대 때 조문기 선생.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미국 등 연합군에 밀리고 있다는 소식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본의 전쟁 승리가 확실하고 조선은 절대로 독립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살도 채 되지 않은 조문기는 반드시 독립을 할 수 있고, 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건 투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윤봉길 의사와 같은 폭탄 투쟁을 하기로 했다. 뜻있는 동지를 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비밀리에 접촉하는 과정에서 평생 동지인 유만수를 만나게 된다.

1945년 5월 서울 관수동에 있는 유만수의 집에서 유만수·우동학 등과 대한애국청년당을 결성하고 국내에서 항일 투쟁을 본격적으로 펼칠 것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 이후 친일파 거두인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大義黨)이 서울 부민관에서 아세아민족분격대회라는 친일어용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접한 뒤 이를 저지하기로 결의하였다.

박춘금을 죽이기 위한 폭탄 제조를 위해 3일간 한순간의 잠도 자지 않고 폭탄 실험을 한 결과 마침내 폭탄 제조에 성공하였다. 조문기는 이 폭탄을 가지고 7월 24일 저녁 7시 유만수·강윤국 등과 함께 부민관에 폭탄 2개를 터뜨려 집회를 무산시켰다.

너무도 충격적인 이 사건으로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한반도 내에서 일본 정부요인과 친일파들에게 어느 누구도 항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최고 친일파들의 모임에서 폭탄을 던진 이가 있었으니 일본의 놀라움은 너무도 컸다.

그래서 이들을 테러범으로 규정짓고 범인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조문기는 부민관의 폭탄 항쟁을 마치고 아무일도 없다는 듯 고향으로 돌아와 은신하며 야학당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8·15광복을 맞았다.

해방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 투쟁

광복 후에는 대한애국청년당을 재결성하고, 인민청년군을 조직하여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해방된 조국은 그가 원하는 통일 조국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친일파들을 처단하고 새로운 조국이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독립운동가들이 친일 경찰 출신들에게 잡혀 고문을 받는 시대로 돌아가 버렸다.

아직도 혈기 왕성했던 조문기는 1948년 6월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저항하여 인민청년군이란 사설 군사조직을 만들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위해 거사하면 온 국민들이 지지를 하고 김구 선생이 원하는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내부 밀고자로 인하여 경찰에 알려졌고 그는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 분단된 조국에 분노하여 은거하다가 1959년 이승만 대통령 암살 및 정부전복 음모 조작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 전혀 연관이 없던 사건이었지만 그를 조작사건에 넣음으로써 항일운동가들을 모욕주기로 한 것이었다.

목숨을 걸고 일본에 항거한 독립운동가가 해방 후 친일파들이 득세한 세상에서는 오히려 반정부 인사가 되어 모멸의 대상이 된 것이다. 비극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 세상은 진짜 독립운동가들이 대우받지 못하고, 가짜 독립운동가들과 친일파들이 대한민국의 모든 분야에 포진되어 그들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21세기 오늘 대명천지에 우리 민족을 다시 일본에 팔아먹으려 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시절의 조문기 선생.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조문기의 고난

조문기는 수원의 서민들이 거주하는 화서아파트에 살며 끼니를 거르는 생활고 속에서도 독립유공자로 이름을 올리기를 거부하였다. 친일파들이 득세한 세상에 독립유공자로 이름을 올리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민족대표 33인들중에서 변절을 하여 일제강점기에 호의호식(好衣好食) 하다가 해방되자마자 다시 독립운동가인 것처럼 떠들고 다니는 이들과 자신이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어려운 환경 때문에 그의 사위가 몰래 독립유공자로 등록하여 1982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조문기는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출범하자 ‘친일 청산이 오늘의 독립운동’이라는 신념으로 투신하였고, 1999년 제2대 이사장에 취임하여 ‘친일인명사전’ 편찬 사업에 전념하였다.

그는 2006년 11월 골수종과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2008년 2월 5일 사망하였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경기지역의 젊은이들을 위하여 특별 강연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해방 이후 늘 중절모를 썼는데, 그 이유가 아직 완전한 해방을 이루지 못해 하늘 보기가 부끄러워서라고 하였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기념하는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친일파의 나라를 청산하자!

아직도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독립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프랑스처럼 나치를 청산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최소한 친일파 혹은 그들의 후예들이 국가 권력의 중추에 있어서야 말이 되겠는가?

지금 대한민국은 완전히 친일파들의 나라가 되었다. 일본 전범기업(戰犯企業)에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에 대한 강제보상금을 일본 기업이 주어야 한다고 2018년 대법원에서 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정부는 우리 기업들이 대신 보상하는 제3자대위변제 방식을 일본 총리에게 약속했다. 일본인들도 놀랄 정도의 파격적인 친일 행위를 한 것이다. 일본에 대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내던지고 일본을 위한 일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조문기를 비롯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지하에서 아니 구천에서 통곡할 일이다.

우리 국민들이 나서야 한다. 조문기가 하늘을 보기 부끄러워 중절모를 쓴 것을 하늘에서라도 벗어 던지게 해야 한다. 죽은 그에게 진정한 독립의 영광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후손들이 할 일이다. 우리가 할 일이 너무 많다.


김준혁은 역사학자다. 정조(正祖)가 건설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경제적 기반인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화성의 복원 등에 참여하였고,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을 지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리더라면 정조처럼> 등 정조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오랫동안 수원에서 시민운동을 하였고, 촛불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2023-04-13> 뉴스버스

☞기사원문: 변절의 시대에 친일파들에게 폭탄을 던진 조문기의 항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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