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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수탈이냐 근대화냐, 민족주의자 신용하와 탈민족주의자 이영훈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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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5] 누구를 위한 ‘역사전쟁’인가 (中)

‘신친일파’들의 주요 논리 가운데 하나가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변화와 개혁의 동력을 잃은 조선 왕조를 쓰러뜨린 일본의 식민 통치를 거치면서 조선이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학교가 많이 들어섰다느니, 철로의 길이가 길어졌다느니 하는) 통계 숫자 뒤에 가려진 식민지 근대화의 어두운 그늘을 거듭 지적해왔다. 그래서 이들은 묻는다. “누구를 위한 근대화였는가?”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필자 이영훈과 고교와 대학(경북고, 서울대 경제학과) 동기인 허수열(전 충남대교수, 토지경제학)도 그런 물음을 던진 연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오래 전부터 일제의 농업개발을 통한 ‘식민지 근대화론’을 실증적으로 비판해온 그는 일제 강점기의 개발은 조선인에게 있어서 (그의 책 제목처럼) ‘개발 없는 개발’이라 못 박는다(1951년생으로 고교와 대학 동기인 이영훈의 이론적 비판자였던 허수열은 올해 초 타계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기간 동안 조선은 급속한 개발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 개발의 이득은 조선인들에게 거의 귀속되지 않았다. 조선인들의 경제적 처지도 거의 개선되지 않았고 또 개선될 전망도 없었으며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그에 따른 민족차별이 구조적으로 확대재생산되고 있었다.](허수열, <개발 없는 개발> 은행나무, 2017, 28쪽).

그는 말한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은 한결같이 조선이라는 ‘지역’을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이런 분석은 의미가 없고 잘못됐다고 여긴다. ‘지역’ 기준보다는 조선인이라는 ‘민족’ 기준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국내총생산(GDP)이 연평균 4.1% 성장했다는 통계자료가 있지만, 이런 통계가 일제의 피지배층인 조선인들에게 실제로 어떤 (긍정적 또는 부정적) 영향을 끼쳤느냐를 돌아보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물음이다.

“연구자의 문제의식이 어떠하냐가 중요”

맞는 말이다. <반일 종족주의>가 주장하듯이 조선이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여러 부문에서 개발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비판적 연구자들도 무조건 부인하지는 않는다. 초점은 ‘누구를 위한 근대화였느냐’는 것이다. 이를테면, 철로를 놓고 항구를 만들었다면 그 건설 과정에서 땅과 집을 수용당하는 등 누가 희생을 강요당했고,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더 큰 이득이 되었느냐다. 그 개발의 더 큰 이익이 조선인에게가 아니라 한반도에 진출한 일본 이민자들과 일제 지배층에게 돌아갔다면, 결코 긍정적인 의미의 개발이나 ‘근대화’라 말할 수 없다.

일제 강점기 동안에 만들어진 여러 통계를 보면, 전국적으로 철도역과 항만 부두가 들어서고 학교와 발전소가 세워지는 등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로 일컬어지는 개발이 이뤄졌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와 아울러 일제의 조선 식민지 통치가 일본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고, 우리 한민족이 받아들일 수 없는 부당한 수탈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논의의 초점은 지표상의 근대화와 수탈, 이 두 측면 중 어느 것을 강조하느냐다.

결국은 연구자가 어떤 문제의식을 지녔는가에 달려있다. 그가 건강한 민족의식을 지녔다면, 그렇게까지 열을 올려가며 우리 한민족이 일본 통치 덕에 ‘근대화’를 이룩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신친일파’가 말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뒤집어 보면, 일제 억압통치를 합리화하고 그들이 조선인들에게 저질렀던 전쟁범죄의 기억을 애써 지워주는 논리다. 특히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 극우들의 기분을 맞춰주는 ‘위안’의 논리란 의심마저 받는다.

▲ 일제 강점기의 가마니 시장 모습. 조선총독부는 효과적인 쌀 수탈을 노려 가마니 짜기를 독려했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봇물 이룬 ‘친일 종족주의’ 비판서들

<반일 종족주의>(이영훈 외, 미래사, 2019)와 그 후속작인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이영훈 외, 미래사, 2020), 그 아류 출판물에 대한 비판서나 관련 논문들은 많이 나와 있다. 비판서가 많다는 게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합리적인 토론이 불가능한 ’21세기의 신친일파’를 상대로 한 소모적인 논쟁에 이 땅의 지식인들이 귀한 시간들을 앗기는 게 부정적이고 안타까운 측면이다.

그럼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면 무엇일까.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온 한국 시민들로 한정해서 말한다면, 일제의 전쟁범죄를 비롯한 굴곡진 과거사에 얽힌 문제점들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우리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신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의 야욕과 그에 발을 맞춰주는 한국 ‘신친일파’의 실체를 새삼 다시 깨닫게 된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21세기 신친일파’에 대한 비판서들 가운데 ‘종족주의’란 제목을 붙인 것만 꼽아도 여러 권이다. <반일 종족주의> 초판은 2019년 7월에 나왔다. 바로 그해에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비판서들이 서점가에 쏟아졌다. 이를테면, 황태연(동국대교수, 정치학)외 5인 공저인 <일제 종족주의>(넥센미디어, 2019년 10월), 정혜경·하광무·조건·이상호 4인 공저인 <반反대를 론論하다: 반일종족주의의 역사부정을 넘어>(선인, 2019년 12월) 등을 꼽을 수 있다.

해를 넘긴 2020년에도 여러 권의 비판서가 출간됐다. 자유언론인이자 역사저술가인 김종성의 <반일 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위즈덤하우스, 2020년 2월),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호사카 유지(세종대교수, 독도종합연구소장)의 <신친일파>(봄이아트북스, 2020년 3월), 전강수(대구가톨릭대교수, 토지경제학)의 <반일 종족주의의 오만과 거짓>(한겨레출판, 2020년 7월) 등이다.

굳이 ‘종족주의’란 듣기 민망한 용어를 쓰지 않은 책들은 더 많다. 정영환(메이지가쿠인대교수, 재일조선인사)의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푸른역사, 2016), 신용하(전 서울대교수, 사회학)의 <일제 조선토지조사사업 수탈성의 진실>(나남, 2019), 한홍구(성공회대교수, 한국현대사)의 <한일 우익근대사 완전정복>(창비, 2020년), 강성현(성공회대교수, 역사사회학)의 <탈진실의 시대, 역사부정을 묻는다>(푸른역사, 2020년) 등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펴낸 여러 관련 저술들을 일일이 더하자면 그 목록이 길다.

<반일 종족주의>와 그 아류들에 관련한 비판 논문들도 많이 나왔다. 강성현(성공회대교수, 역사사회학)의「한국 역사수정주의의 현실과 논리」(황해문화 2019 겨울), 양정현(부산대교수 역사교육학)의「반일 종족주의 역사인식과 역사교육에서의 비판적 사고」(역사와 세계, 통권58호, 2020), 김헌주(연세대 근대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의「’반일 종족주의 사태’와 한국사 연구의 탈식민 과제」(백산학보, no.116, 2020), 신운용(안중근평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의「반일 종족주의의 ‘반’민족주의와 ‘독도 인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고조선단군학 vol.42, 2020), 그밖에 다른 주요 논문들이 많이 있지만, 지면 사정상 이쯤에서 줄인다.

일제의 토지 수탈은 없었다?

논쟁점이 되는 ‘위안부’나 강제동원 문제에서 ‘신친일파’들이 주장하는 바는 (이미 지난 글들에서 거듭 살펴보았듯이) 설득력이 떨어진다. 전쟁범죄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 하는 일본인들을 기쁘게 하는 친일 논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여기서는 <반일 종족주의>와 그 후속편인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에서 저질러진 역사 왜곡 논리, 특히 일제 강점기 시절의 경제 수탈(收奪) 문제를 이번 주와 다음 주 2회에 걸쳐 좀 더 살펴보려 한다.

먼저, <반일 종족주의>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인의 토지를 수탈하고 산미증식계획으로 쌀을 수탈해갔다고 가르치는 한국사 교과서가 잘못됐다고 주장한다(53-54쪽). 이영훈은 1960년대부터 오랫동안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실려 있던 내용(전국 토지의 40%가 총독부 소유지로 수탈됐다는 내용)이 근거 없는 거짓말이라고 주장한다. 언뜻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가려진 다른 한 면이 있음을 알아채게 된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뿔’ 하나만 잡고 흔들어대는 소피스트들의 수법이나 다름없다.

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1910~1918년)을 실시하면서 ‘신고주의’를 채택했다. 미신고 토지는 동양척식회사와 일본인 이민자에게 불하될 참이었다. 그런데 농민들의 미신고 토지의 비율이 워낙 낮았다. 다시 말해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 정책을 못 마땅하게 여긴 조선 농민이 “내가 왜 왜놈들에게 신고를 해?” 하며 신고 자체를 하지 않아 토지를 빼앗긴 경우는 거의 없었다. 40% 토지 수탈설이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은 지난 1980년대 말 우리 국사학계 연구자들의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이미 밝혀졌다. 그러면서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40% 토지 수탈’ 내용은 오래 전에 사라졌다.

이영훈은 <반일 종족주의>에서 ‘교과서에서도 40% 토지 수탈 내용은 이미 사라졌다’고 한두 문장이나 서너 줄의 글로 매듭짓고 끝냈으면 깔끔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4페이지 분량으로 길게 늘려 썼다. ‘역사 교실에서 이 대목이 나오면 가르치는 교사도 배우는 학생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하면서, 이런 모습을 가리켜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반일 종족주의 역사의식’이라했다. 이미 오래 전에 역사 교과서에서 없어진 내용을 두고 마치 지금도 문제인양 그렇게 흥분해서 떠들 일은 아니다. 이와 관련, 전강수(대구가톨릭대, 토지경제학)교수의 지적을 들어보자.

[1980년대 말 이후 배영순(전 영남대, 국사학)과 조석곤(상지대, 경제학)교수가 (각기 박사학위 논문에서) 김해 지역 토지대장을 분석하여 토지 수탈을 실증적으로 부정한 이래, 토지수탈설은 역사학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2013년 한국역사연구회 토지대장연구반이 출간한 <일제의 창원군 토지조사사업>이란 책에 따르면, 창원군에서도 신고 유무로 토지 소유권을 박탈한 사례는 없었다. 그 책은 신고주의를 통한 수탈 문제는 실증적으로 검증이 끝났으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다고 못 박고 있다. 이런 입장은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이다](전강수, <반일 종족주의의 오만과 거짓> 한겨레출판, 2020, 78-79쪽).

그런데도 이영훈은 예전에 쓰이던 국사교과서의 오류를 빌미삼아 이 대목을 읽기가 지루할 만큼 필요 이상으로 길게 쓰고 있다. 전강수의 지적대로라면 ‘마치 현재 역사학자들이 40% 토지수탈설이라는 무지막지한 거짓말을 선동’한다는 느낌을 독자들에게 심어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전강수, 79쪽). 그런 모습은 이른바 학문적 엄밀성이 요구되는 연구자나 학자로서 취할 태도는 아닐 것이다.

이영훈, ‘엉터리 학설’이라며 신용하 비판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은 농경지를 대상으로 했기에, 여기서 말하는 ‘토지’는 농경지를 뜻한다. 농민들의 미신고 토지가 총독부에 몰수된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위에서 확인했다. 신용하(전 서울대교수, 사회학)의 연구에 따르면, 총독부 미신고로 빼앗긴 농경지는 8,994필지로 전체 필지의 0.005%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조선총독부가 농민이 갖고 있던 농경지 말고 (조선 왕실 소유의) 국유지였던 농경지, 임야, 기타 미개간지 등을 일본의 국유지로 편입한 것을 ‘토지 약탈’로 볼 경우, 한반도 전체 토지의 50.4%가 일제에 수탈당했다(신용하, <일제 조선토지조사사업 수탈성의 진실>, 나남, 2019, 108-109쪽). 이영훈의 주장대로 토지수탈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50%로 늘어나는 셈이 된다. 따지고 보면, 지난날 한국 교과서에 실렸다가 지금은 없는 40% 토지 수탈설은 전혀 틀린 얘기도 아닌 셈이다.

일제의 토지 수탈과 관련, 이영훈은 <반일 종족주의>에서 신용하가 오래 전에 썼던 <조선토지조사사업연구>(지식산업사, 1982년)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공격했다. 이를테면, 토지조사국에서 나온 일본 관리가 ‘호신용’으로 허리에 권총을 차고 다닌 것을 두고 신용하는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이라 썼다. 농민들 눈에는 권총을 찬 토지조사국 직원이 위압적으로 비쳐졌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영훈은 ‘신용하는 토지조사사업을 피스톨이 발사되는 폭력적 과정으로 묘사했다’면서 이를 ‘엉터리 학설’이라 비난했다.

“이상한 책 내면서 내 주장을 왜곡했다”

1937년생인 신용하는 원로 사회학자이자 역사학자로 존경 받는 인물이다. 학부생 때 그의 사회사상사 강의를 들었던 필자의 인상적인 기억 하나. 어느 날 지각하는 바람에 대형 강의실의 맨 뒤편에 앉게 됐다. 특유의 톤이 굵은 선생의 우렁찬 목소리가 마이크 없이도 뒤까지 뚜렷이 들렸다. 그 목소리만큼 선생은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박은식, 신채호 등 선각자들의 사회사상을 연구했고, 한국근대사와 민족운동에 관심을 쏟았다.

신용하는 1975년부터 사회학과로 소속을 옮겼으나, 그 앞서 10년 동안은 경제학과 교수(전임강사)로 당시 경제학과 학생이던 이영훈 등을 가르쳤다. 분명히 학창시절의 스승이었을 신용하를 이영훈은 <반일 종족주의>에서 모질게 몰아쳤다. 신용하가 <조선토지조사사업연구>에서 말하려 했던 요점은 ‘조선총독부가 토지조사를 강압적으로 실시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 과정이 순순히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일부 지역에서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영훈은 일제 강점기의 40% 토지 수탈설이 마치 신용하가 처음 지어낸 학설인 듯이 이렇게 비난했다. “토지조사사업을 이해하기 위해선 조선시대 토지제도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그런데 (신용하는) 그런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사료의 일부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조작’한 ‘엉터리 학설’이라는 막말마저 퍼부었다(이영훈 외, 38쪽).

그러자 신용하는 곧바로 이영훈의 공격에 맞섰다. <반일 종족주의>가 나온 지 3개월 만에<일제 조선토지조사사업 수탈성의 진실>(나남, 2019)을 출간해 반론을 폈다. 신용하는 <반일 종족주의>가 ‘일제의 식민지 수탈을 미화하고 옹호하기 위하여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오류의 억지주장’이라 못 박았다.

신용하는 자신의 토지조사사업 연구는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한 실증적 연구이며, ‘사료의 일부를 조작했다’는 이영훈의 언급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오히려 이영훈 등이 <반일 종족주의>라는 ‘이상한 책’을 내면서 ‘필자(신용하)의 주장을 왜곡하고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을 마치 사료와 실증에 의거한 진실인 것처럼 주장하는 망언’을 했다고 비판했다. 이영훈의 경제학과 후배인 전강수(대구가톨릭대, 토지경제학)교수는 필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신 신용하 선생은 성품이 강직하고 말씀도 많이 안 하시는 선비 같은 분입니다. 그런데 <반일 종족주의>에서 선생을 폄하하는 글을 보고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났으면 80을 넘긴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반일 종족주의>가 나온 지 석 달 남짓 만에 (위에서 인용한) <일제 조선토지조사사업 수탈성의 진실>을 출간했을까요? 이영훈씨가 선생에게 했던 비판은 정확하지도 않을 뿐더러 인간적으로도 도를 넘은 비난이었다고 봅니다”

▲ 일제가 침략전쟁을 위해 공출 명목으로 수탈한 각종 물자 ⓒ연합뉴스

“토지약탈 정책을 어떻게 긍정 미화할 수 있나”

신용하는 신간 <일제 조선토지조사사업 수탈성의 진실>에서 자신이 서울대 사회학과로 옮겨가기 전에 몸담았던 경제학과의 젊은 교수 시절(1965-1974년) 후반기에 이영훈(1970년 입학)을 가르쳤던 일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그때 젊은 학도가 (훗날) 어떻게 일제 토지조사사업처럼 명백한 토지약탈 식민지 정책을 저렇게 긍정하고 미화할 수 있는가 개탄하면서 안타깝게 여겼다”(신용하, 17쪽). 신용하가 말하는 ‘그때 젊은 학도’ 이영훈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으며 고개를 끄떡이던 진보적 청년이었다.

여기서 물음이 하나 떠오른다. 이영훈은 왜 그렇게 도를 넘는 공격을 학계의 대선배에게 해댔을까(1937년생인 신용하는 이영훈이 사부로 모시는 안병직보다 1살 아래지만, 이영훈보다는 14살 위다). 그 숨은 동기가 무엇인지는 연구자들 사이에 지금도 물음표로 남아있다. 이영훈도 신용하를 비난했던 대목과 관련, 자신이 좀 지나쳤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반일종족주의>의 후속작으로 1년 뒤에 나온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에서 ‘연구자 사회에선 좀처럼 들을 수 없는, 함부로 해서는 안 될, 강한 어조의 비판’을 했다고 시인하면서, 우회적으로 유감의 뜻을 나타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직설적인 사과는 없었다. 오히려 ‘신용하는 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과 임야조사사업을 통해 전국 토지의 50.4%를 약탈했다고 (잘못) 주장하고 있다’면서 신용하에 대한 논박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 287쪽 참조). 신용하가 <일제 조선토지조사사업 수탈성의 진실>에서 폈던 반박을 이영훈은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에서 재반박한 셈이다.

민족주의자 vs 자학(自虐)사관 지닌 탈민족주의자

신용하는 독도학회 회장이란 직함을 지니고 있다. 이 직함이 말해주듯,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이다. 한편 이영훈은 한민족을 거짓말쟁이 민족이라 비하하며 ‘종족’이라 규정함으로써 극단적인 자학(自虐)사관을 지녔다는 비판을 받지만, 스스로를 ‘자유인’이라 부르는 탈민족주의 경제학자이다. 신용하, 이영훈 두 사람 가운데 어느 쪽이 옳은 말을 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다만 이 글 맨 앞부분에 썼듯이, 어떤 문제의식을 지녔는가, 건강한 민족의식을 지녔는가를 판단의 기준점으로 삼는 것이 어떨까 한다. 지나치게 민족주의를 강조함으로써 자칫 국수주의로 빠지는 것은 물론 경계해야 한다. 이즈음처럼 신친일파들이 기세를 올리는 상황을 떠올리면, 건강한 민족의식은 보듬어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일각에서는 ‘일제 강점기’란 용어보다 ‘대일 항쟁기’란 용어를 쓰자는 움직임이 있다. 좀 더 적극적인 의미를 지녔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본다.

다음 주 글에서는 일제의 경제 수탈이 지닌 문제점을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 <반일 종족주의>는 수탈의 개념을 아주 좁게 잡는다. 대가를 주고받았다면 수탈이 아니라는 것이다. ‘좁은 의미의 강제연행’을 내세우며 ‘위안부 납치가 없었다’고 우기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일본인들의 농경지 소유 면적이 크게 늘어난 것은 ‘제도와 정책을 통한 수탈’ 때문이었다. 식민지 조선을 ‘기회의 땅’으로 여기고 온 자들이 이득을 챙겼다면, 그게 곧 수탈이다.

또한 <반일 종족주의>는 쌀을 비롯해 일제가 침략전쟁 물자로 약탈해갔던 강제 공출(供出)을 가리켜 ‘수탈이 아니라 수출이었다’는 궤변과 더불어 ‘조선 농민의 소득 증가에 오히려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조선 민중은 굶주림에 시달렸는데도 말이다. 이렇듯 전범국가 일본의 가혹했던 억압 통치를 애써 변론해주는 ‘신친일파’에게 또 다시 묻게 된다. “당신들의 정신적 모국은 어디인가요?” (계속)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

<2023-04-15> 프레시안

☞기사원문: 수탈이냐 근대화냐, 민족주의자 신용하와 탈민족주의자 이영훈의 논쟁

※관련기사

☞프레시안: 일본군 성노예가 ‘상업’이라는 ‘신친일파’, 이들 조국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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