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의거 100주년 특집]
“내가 아주 단판씨름 하러 왔소”
김상옥 의사의 의열투쟁과 관련한 몇 가지 논점 정리(2)
이순우 책임연구원
논점 3. 최후 총격전 당시의 ‘사살자’ 존재 유무는?
김상옥 의사의 의열투쟁과 관련하여 최후의 총격전이 벌어질 당시의 상황을 묘사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내용의 하나는 “수백 명의 일제경찰이 포위한 가운데 격렬한 총격전을 벌인 끝에 수십 명을 처단하고 마지막 한 발로 자결 순국하였다”는 식의 구절이다. 앞에서 인용했다시피 김상옥 의사의 동상에 부착된 약력사항에 “왜경 500여 명에게 포위되어 …… 수십 명의 왜경을 살상”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국립서울현충원의 묘비석에는 “일본군경 천 명 4중 포위, 3시간 교전 16명 처단”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1986년에 나온 <김상옥 나석주 항일실록>의 말미(213쪽)에 붙어 있는 ‘연보(年譜)’에도 “무장경관 1,000여 명이 효제동 일대를 겹겹으로 포위 …… 쿠리다 경부 외 15, 6명을 살상”이라고 적은 대목을 확인할수 있다. <김상옥평전>(2014)과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특별판)>(2019)에는 “군경 1000여 명을 동원 4중으로 포위 …… 16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일찍이 1992년 1월에 국가보훈처가 김상옥 의사를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것과 관련하여 공적사항(공훈전자사료관에 게재)을 정리한 것을 보면, 여기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마침내 은신처를 탐지한 일경은 경기도 경찰부장의 총지휘 아래 시내 4개 경찰서에서 차출한 4백여 명(천여 명이라고도 한다)의 무장경찰을 동원하여 1월 22일 새벽 5시 반경 이혜수의 집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 3시간여의 치열한 전투 끝에 서대문경찰서 경부(警部) 율전청조(栗田淸造)를 비롯한 수 명의 일경을 사살하였으나 탄환이 다하였다. 이제는 항복하든가 자결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선생은 마치 상해를 떠나올 때 동지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려는 듯 마지막 탄환이 재인 권총을 머리에 대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결 순국하였다.
여길 보면 사살된 일본인 경찰이 쿠리다 세이조(栗田淸造)를 비롯하여 여러 명이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구체적인 실명까지 거론된 쿠리다 경부(동대문경찰서 고등계 주임; 위의 인용문에 서대문경찰서라고 한 것은 착오)는 총알이 어깨에서 배를 뚫어 중상을 입었으나 실상 절명(絶命)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에 관해서는 <동아일보> 1923년 1월 23일자에 수록된 「중상(重傷)한 쿠리다 경부(栗田 警部), 총독부병원에 수용」 제하의 기사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중상한 쿠리다 경부는 즉시 총독부병원으로 보내어 방금 치료중인데 생명에는 관계가 없을 듯하고 대략 30여 일간 치료하여야 전쾌되리라더라.
실제로 해마다 발간되는 <조선총독부 급 소속관서 직원록>을 비롯하여 <조선총독부관보>에 게재되는 「서임(敍任) 및 사령(辭令)」 등의 관련 자료를 취합해보면, 1923년 이후 그의 생존사실과 더불어 대략 다음과 같은 경력사항을 확인할 수 있다.
경성동대문경찰서(1920.6 경부 승진) → 양주경찰서 서장(1924.1.11) → 정읍경찰서 서장(1925.11.4) → 이리경찰서 서장(1928.7.14) → 전라북도 경찰부 보안과 과장(1930.3.10) → 함흥경찰서 서장(1931.12.11/ 경시 승진) → 함경남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과장(1933.10.2) → 경성동대문경찰서 서장(1934.9.8) → 경성보호관찰소 보호사(保護司, 1936.12.21) → 의원면본관 퇴직(1940.11.22)
그는 멀쩡히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김상옥 사건이 계기가 되어 승승장구 출세의 가도를 달렸고 그 말미에는 자신의 옛 근무처이자 효제동 총격전 사건의 관할관청이던 동대문경찰서의 서장이 됨으로써 금의환향에 버금가는 처우를 받았던 것으로 드러난다. 퇴직 이후 시기에도 그는 동대문 경방단(警防團) 단장과 경성애마회(京城愛馬會) 고문의 직위도 맡았으며, 일제패망을 코앞에 둔 시점에 이르기까지 주소지를 ‘경성부 숭인정 178-1번지’에 두면서 여전히 조선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다면 쿠리다 경부 이외에 또 다른 사상자의 존재는 확인이 되는 것일까? 이 점에 있어서는 먼저 <매일신보> 1924년 1월 1일자(신년호)에 일지(日誌) 형식으로 정리된 「대정(大正) 12년(年) 조선사(朝鮮史)」 제하의 기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의 투탄 중경상자 7명
17일 용산 삼판통에서 김상옥에게 경관이 저격되어 사상 3명
22일 효제동에서 경관대가 김상옥 사살
여기에서 말하는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 때의 중경상자 7명은 때마침 그 앞을 지나던 행인들(매일신보 사원 5명이 포함된 세부 인적 사항은 <매일신보> 및 <동아일보> 1923년 11월 14일자에 수록)을 가리킨다. 그리고 삼판통 총격전 사상자 3명의 신상은 현장에서 즉사한 일본인 순사부장 타무라 쵸시치(田村長七, 종로경찰서 형사부장) 및 중상자인 이마세 킨타로(今瀨金太郞) 경부(종로경찰서 사법계 주임)와 우메다 신타로(梅田新太郞) 경부보(동대문경찰서 고등계 주임)인 것으로 나타난다.
마지막에 있는 ‘효제동 총격전’에 관해서는 사상자에 대한 표시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그 시절의 보도내용을 종합한 결과 이진옥(李鎭玉, 효제동 72번지)이라는 이웃집 노인이 유탄에 맞아 부상자가 되었다는 사실만 추가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고 쿠리다 경부 이외에 또 다른 일본인 경찰이 죽거나 다쳤다는 흔적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한 사실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물은 1937년에 발행된 <순직경찰 소방직원 초혼향사록(殉職警察 消防職員 招魂享祀錄)>(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이다.
일찍이 1921년 4월 26일에 조선경찰협회(朝鮮警察協會)의 주관으로 처음 시작된 ‘순직경찰관 초혼제’는 초기에 남산공원 광장, 왜성대, 광화문 경찰관강습소 등에서 열렸고, 1927년 5월 4일에 열린 제6회 순직경찰관초혼제 때는 경복궁 근정전으로 자리를 옮겨 거행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7년에는 막 준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 대홀에서 열렸다가 다시 1928년부터는 경복궁 근정전으로 되돌아왔다.
1935년에 이르러 ‘순직소방수’에 대한 초혼제도 곁들어 시행되는 것으로 변경되긴 하였으나 이 행사는 근정전 용상을 제단으로 삼아 일제 패망 때까지 줄곧 지속되었다. 일제치하에서 마지막으로 열린 ‘순직경찰관(제24회) 경방직원(제10회) 초혼제(1944년 10월 27일, 경복궁 근정전)’ 당시까지의 순직자(조선인과 일본인 모두 포함)는 경찰관이 403명에 소방수가 55명으로 총인원이 458명에 달했다.
그러니까 1937년에 발간된 <향사록>은 바로 그해 5월 2일에 열린 초혼제 행사 때에 실제 사용된 것이며, 여기에는 바로 그 시점까지 누적된 순직자의 명단이 망라되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것을 아무리 살펴봐도 1923년 당시의 김상옥 의거와 관련하여 숨진 일제 경찰로서는 순사부장 타무라 쵸시치(田村長七) 단 사람의 이름만 기재되어 있을 따름이다.
대정 12년(1923년) 1월 17일, 경성부 삼판통에서 잠복중 흉기를 소지한 불령선인(不逞鮮人) 김상옥을 체포할 제에 범인이 난사한 권총탄에 쓰러졌다.
이 대목에 있어서 일제 경찰이 자신들의 과오를 은폐하고자 고의로 이를 누락했다는 주장도 없지는 않으나 딱히 이를 수긍할 만한 여지는 거의 없어 보인다. 실제로는 1명의 중상자(즉 쿠리다 경부)가 있었고 그나마도 그 이후의 생존 여부는 확인도 없이 사살자로 단정하여 그 이름이 거듭 등장하는 것은 결코 온당한 일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언제부터 이 숫자가 수십 명이라거나 16명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둔갑하여 덧붙여지거나 늘어난 것인지 그 과정을 역추적하여 좀 더 엄밀하게 재검토하는 작업이 한번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도 싶다.
논점 4 : 김상옥 의사의 최후는 ‘단발’의 ‘자결’이었던가?
김상옥 의사의 의열투쟁과 관련하여 한 번쯤 다시 짚어보아야 할 대목은 최후의 순간에 ‘마지막 남은 총탄 한 발’로 ‘자결 순국’하였다는 서술구조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신문보도에는 — 일제 경찰의 고의적인 사실은폐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 한결같이 “범인 사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상옥 의사의 최후는 과연 ‘자결’인가, ‘피격’인가?
이 점에 있어서는 김상옥 의사가 격렬한 총격전이 오가는 도중에 숨졌고, 더구나 일제 경찰이 명확하게 조준하여 사격하였다고 보기도 어려운 상태이므로, 자세한 검시보고서(檢屍報告書)와 같은 일차 자료가 확인되기 전까지는 이를 명쾌하게 가려내어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다만, <매일신보> 1923년 1월 23일자에 수록된 「검사출동(檢事出動) 사체를 검시해, 전중환병원장과」 제하의 기사를 통해 타나카마루병원(田中丸病院, 서소문정 21번지)의 원장 타나카마루 지헤이(田中丸治平)에 의해 검시와 관련된 채증이 이뤄진 사실이 있었다는 점만큼은 분명히 확인된다.
경관의 포위에 대항할 뿐만 아니라 육혈포를 두 자루나 가지고 난사하던 범인은 현장에서 즉사하였으므로 동대문 서로부터 즉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급히 전화를 거는 동시에 지난 17일 아침 5시에 시내 모처에서 경관을 살해한 당시 검증한 주정(酒井, 사카이) 검사에게도 급히 전화하였으매 주정 검사는 식산(植山, 우에야마) 서기를 대동하여 동 9시에 현장에 급거 출장하는 동시에 시원(柿原, 카키하라) 검사정과 내량정(奈良井, 나라이) 차석검사도 현장에 급거 출장하여 전중환(田中丸, 타나카마루) 병원장으로 하여금 상세히 검증케 하였는데 검사정과 내량정 검사는 오전중에 돌아가고 주정 검사는 오후 1시까지도 현장에서 검증중이었더라.
[범인사체인도(犯人死體引渡), 유족에게 인도]
총살을 당하고 현장에서 엎어진 범인은 시체의 검사를 마친 후 상세히 그 도면(圖面)을 그리고 동대문 밖에 있는 범인의 가족을 불러 당일 현장에서 시체를 인도하였더라.
그런데 김상옥 의사가 어떻게 최후를 맞이하였는지는 그 당시부터 꽤나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있던 사안이었던 모양이다. 이 문제에 관해 특히 <조선일보> 1923년 3월 20일자에 게재된 「잔소리」 코너에는 다음과 같이 직설적으로 거론된 내용이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띈다.
▲ 일전 밤에 시내 경성극장에서는 일시 경성 천지를 혼동하던 김상옥 사건의 자초지종 사실을 들어가지고 신파극을 출연하였다나.
▲ 그런데 김상옥이가 효제동에서 최후 일각까지 경관대와 격투하다가 몸을 마친 것은 세상이 다 아나 자살이라고도 하고 피살이라고도 하여 그 사실의 진정을 알 수가 없어 궁금하던 터인데 경찰당국자들은 피살인 것 같이 말하는 터이더니 연극하는 데에서 자살한 것이 분명하더라지.
▲ 쉬쉬하고 숨기는 일일수록 남이 먼저 아는 법이지만은 그와 같이 숨기던 일이 필경에는 연극장에서 공개까지 하게 되니 경관의 면피도 땅둡게가 아니면 좀 어떠한 생각이 있을 모양이지.
▲ 이번 그 연극은 무슨 생각으로 하게 하였는지 구경한 사람들의 비평은 좋지 못한 모양이던걸. 조선 사람이 보고 좋지 않은 비평을 한다 하면 감정이라는 혐의도 있겠지만은 일본 사람들이 보고 비평하기를 경관의 순직을 장려하기 위하여야 한다는 연극이 경관의 얼굴에 진흙칠을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고 하니 그 꼴도 가관이지. 참 세상 일을 다 잘하는 체 하는 그 양반네 일도 요런 일이 많단 말이야.
물론 김상옥 의사가 ‘자결’ 또는 ‘자살’했다고 드러내놓고 표기한 용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지만, 이것 말고도 <경성일보> 1924년 1월 12일자에 수록된 「상기(想起)하다 거년(去年)의 금야(今夜), 종로서(鍾路署)의 폭탄사건(爆彈事件), 어제 서원(署員)을 모아 격려(激勵)했던 모리 서장(森署長)」 제하의 기사에는 모리 로쿠지(森六治, 1923.3.30~1930.5.2 재임) 종로 경찰서장과의 대담에 앞서 “권총을 난사하여 부상자를 발생하는 등 교전(交戰)하기를 약 1시간뒤 도주하는 것이 불가능함에 단념(斷念)하고 자살(自殺)을 했다”고 적어놓은 문장이 등장한다. 또한 <동아일보> 1935년 4월 5일자에 수록된 ‘창간15년 특집판’의 「풍우 십오년(風雨 十五年); 대정12년(서기 1923년)」 항목에서 “의열단 김상옥사건 …… 경관 측에 사상자 5명을 내고 자기(自己)의 방총(放銃)으로 자살(自殺)하였다”는 표현을 간신히 찾아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김상옥 의사의 장렬한 최후와 관련하여 약간 이색적인 흔적 하나를 소개할 수 있는데, <매일신보> 1923년 3월 16일자에 수록된 「범인사살 당시(犯人射殺 當時)의 광경을 목도한 이태성의 딸 순로 양의 자세한 그 말」 제하의 기사 일부가 바로 그것이다.
범인이 총살되던 당시의 광경과 및 범인의 회중에 불온문서 칠십 장과 쓰다 남은 탄환 여덟 발과 또는 구연발 ‘모젤’식 권총 한 자루와 및 육연발 구식 권총 한 자루를 쥐인 채 죽었다 함은 그때에 적적히 보도한 바와 같거니와 범인은 항상 자기에 대한 경찰의 행동을 알고자 신문을 얻어 보던 중에 경성일보(京城日報) 한 장이 품속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하략).
여길 보면 분명히 “쓰다 남은 탄환 여덟 발”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마지막 한 발로 자결 순국”하였다는 서술구조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언급이 아닐 수 없다. 이미 100년의 세월이 훌쩍 흐른 상태이지만, 김상옥 의사의 강렬했던 의열투쟁과 관련하여 후대에 군살이 덧붙여진기록들은 여러모로 재검토의 여지가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