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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임성이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의 범인이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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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글방]

황임성이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의 범인이 된 이유

조한성 연구2팀장

사건이 벌어진 것은 1921년 9월 12일 오전 10시 10분경이었다. 아직도 한낮에는 30도에 육박할 정도로 무덥던 초가을날, 남산 중턱에 있던 조선총독부 본관 청사에서 요란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소리는 인근에 있는 총독관사에서도 들릴 정도로 컸다. 밖에서 총독부를 경비하던 순사들은 실수로 가스관이라도 잘못 건드렸나 했다. 당시 회계과에서 증축공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위급하다는 것은 누군가가 “폭탄이다”를 연이어 외치면서 알았다.
총독부에 투척된 폭탄은 두 개였다. 하나는 비서과에 던져졌고, 다른 하나는 회계과에 던져졌다. 비서과의 폭탄은 스즈키라는 직원의 얼굴에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얼굴을 정통으로 맞았기 때문에 상당히 아팠지만 터지지 않았기에 그게 뭔지 즉각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회계과에서 폭발음이 들리고 누군가 ‘폭탄’이라고 했기에 그제야 폭탄인 줄 알았다. 불발탄이 아니었다면 스즈키를 비롯하여 비서과 직원들 중에 상당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반면 회계과의 폭탄은 상당한 폭발음과 함께 폭발했다. 건물 바닥에 15~20cm 정도의 구멍이 나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사무 집기가 부서지고 유리창이 깨졌다. 하지만 여기서도 인명 피해는 없었다. 회계과장과 직원들이 모두 업무차 방을 비웠기 때문이었다.
두 개의 폭탄이 시간차를 두고 던져졌지만, 누가 폭탄을 던졌는지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그럴 만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몇몇 있었지만,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 눈을 감거나 몸을 피하느라 보지 못했던 것이다. 폭발 직후 범인으로 보이는 사람을 목격한 사람은 꽤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옆모습이나 뒷모습을 본 것이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범인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고 기억한 사람은 두 명 정도였다. 총독부에서 일하는 소사들이었다. 그들은 말했다. 폭발음이 터진 직후 일본어로 “아부나이, 아부나이(위험해, 위험해)”를 외치며 뛰어간 한 남자가 있었다고. 그는 폭발 소리가 난 방향으로 가지 않고 반대방향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대개 사람들은 소리가 난 쪽에 관심을 보이기 마련인데 거꾸로 가니까 오히려 의심스러웠단다. 소사들은 그가 검은 양복에 각반을 차고 다비(일본식 버선)를 신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처음에는 회계과 증축공사의 현장감독인가 했단다. 처음 본 얼굴인데다 양복에 각반을 차고 있으니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모자를 썼는지 여부는 두 사람의 의견이 갈렸다. 한 사람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고 했지만, 다른 한사람은 쓰지 않았다고 했던 것이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사람을 본 것이니 두 사람의 의견이 갈리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 남자는 얼굴이 길고 검으며 보통 사람보다 약간 광대뼈가 나왔다고 말이다.

<사진 1>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의 주역 김익상

한 소사는 볼에 살이 없었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이들의 증언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는 <사진 1>을 보고 각자 판단해보기 바란다. 이렇듯 확실한 목격자가 있었으니 범인은 붙잡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붙잡히지 않았다. 거꾸로 달려가는 그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던 소사들은 이내 그를 범인이라 생각하고 쫓아갔지만 금세 놓치고 말았다. 건물 밖으로 나갔을 때는 이미 그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누군가 도망가는 그를 본 사람이 있지 않을까? 건물 밖에는 곳곳에 경비 초소가 있고 순사와 경비원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소사들이 목격한 그 남자를 보지 못했다. 범인은 그렇게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백주대낮 공격에 곤혹스런 조선총독부
백주대낮에 벌어진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으로 총독부는 큰 혼란에 빠졌다. 그 증거가 당시의 언론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보도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아 사건 당일 <동아일보>는 호외까지 발행해 사건 소식을 알렸고, 다음날 조간에는 주요 신문들이 모두 현장 사진과 함께 사건을 대서특필했던 것이다. 더 가관인 건 그들의 기관지 ????매일신보????다. ????매일신보????는 총독부가 공개하고 싶지 않은 정보까지 너무 자세하게 쓰는 바람에 급히 기사를 긁어내야 했다. 그런데 너무 급하게 긁어내다 보니 범인을 특정하는데 필요한 중요 정보가 그대로 공개되고 말았다. 제목 말미에 남은 “아부나이”가 바로 그것이다.

<사진 2>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남은 기사 삭제 자국. 제목에 ‘아부나이’란 중요 정보가 남아 있다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은 총독부에게 굴욕 그 자체였다. 인적·물리적 피해는 미미했지만, 정신적 압박감이 너무 컸다. 총독은 지방 외유 중이어서 위험을 피할 수 있었지만, 하필 총독이 부재한 상황에 폭탄을 던진 이유는 무엇인지, 폭탄 하나는 왜 사람도 없는 빈방에 던진 것인지, 사건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인적·물리적 피해가 극심했다면 ‘불령선인’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어느정도 여론을 누그려뜨릴 수 있을 텐데, 이 사건은 그렇게 해결할 수도 없었다. 식민통치의 심장부를 공격당한 데다 뭔가 놀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사건이 바로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이었던 것이다.
지방 외유에서 돌아온 사이토 총독은 남대문역에서 기자들에게 짐짓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이다.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톡에서는 배일하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폭탄을 만들고 매매하고 있는 형편이니 그중 한두 개를 몰래 들여오는 일이 종종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걸 못 막았다고 경무 당국의 실책이라고 할 수도 없고, 이번 일로 조선의 민심이 소란하다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보도 통제로 후속 기사를 낼 수 없자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문>의 논평을 인용해 당국에 이렇게 물었다. 총독부는 “인심은 안정”하고, “민정은 평온”하다고 선전하지만, “육군 위병이 있고 수십 명의 순사로 경호하는 총독부에서 백주에 공공연히 폭탄을 투척”당한 것은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하고 말이다.
이 사건을 해결할 가장 좋은 방법은 조기에 범인을 잡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사건 발생 즉시 비상선을 치고 인력을 총동원해 범인 검거에 나섰다. 하지만 불행히도 범인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총독부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범인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바로 의열단원 김익상이다. 김익상은 다음 해인 1922년 3월 28일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하러 나섰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자신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밝혔다. 일본 당국은 그제서야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의 범인을 알게 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6개월이 넘어 7개월에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사건 당시 김익상의 활약상은 소설가 박태원이 쓴 <약산과 의열단>이라는 책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서 김익상은 전기수리공으로 가장해 총독부에 침입한 후 폭탄 두 개를 던지고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곧바로 도주하지 않고 전차를 타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경찰의 동향과 민심을 살폈다고 한다. 이후 그는 한강변에서 옷을 갈아입고 일본인 목수처럼 꾸민 후,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을 거쳐 신의주로 이동했다. 국경에서 유창한 일본어로 경찰의 검문을 거뜬히 통과한 그는 펑톈과 톈진까지 늘어선 일본의 비상선도 아무 문제 없이 통과해 베이징에 있는 의열단 본부로 돌아갔다. 그의 의거는 출발부터 귀환까지 고작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경찰은 김익상이 돌아간 지 한 달도 더 지난 어느 날 부산에서 황임성이라는 남자를 체포했다. 그의 혐의는 바로 1921년 9월 12일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혐의였다.

조선총독부 폭탄 범인 황임성
황임성은 어떤 자인가? 그는 1902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젊은 청년이었다. 경찰 심문 조서에 의하면 그는 13세 되던 1914년 중국 안둥현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안둥현에서 한 미국인에게 영어를 배우다가, 다음 해 상하이로 옮겨가 독일인이 경영하는 학교에 입학했고, 1919년 6월까지 그곳에서 독일어와 공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믿기 힘든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독일인 교장에게 5년 동안 탐정학(探偵學)을 배웠다는 것이다. 찾아보니 오늘날에도 탐정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존재하고있고 이것을 정식으로 가르치는 고등교육기관도 있다. 생소하긴 하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닌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상하이에 거주할 때 임시정부에 관여하지는 않았냐는 경찰의 질문에 그는 임시정부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철혈단의 전신인 대한청년단에 입단하고, 그 청년단의 군경부 고문이 되어 약 1개월 동안 비밀학과 군사탐정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당시 그의 나이가 18살에 불과했다는 걸 상기하면 믿기 힘든 말이다. 이어지는 그의 말은 더욱 가관이다. 그는 임시정부 요인 가운데 경무국장 김구, 국무총리 이동휘, 노동국총판 안창호, 철혈단장 황일청과 친했다고 말한다. 또 이동휘는 자신에게 경상남도의 기밀을 탐지하라는 요청까지 했다고 한다. 도대체 그의 얘기는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일까.
1919년 6월 유학 자금 문제로 유학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던 황임성은 1921년 음력 1월 다시 중국 안둥현으로 가 7월까지 아는 사람의 집에서 묵으며 재유학을 꿈꿨다. 그때 그는 돌연 철혈단 단장 황일청에게 편지를 보내 소형폭탄 ‘파이어 페이트’ 2개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담배 상자에 폭탄을 숨겨 국경을 넘었다고 한다. 어떻게 들키지 않고 폭탄을 가지고 들어올 수 있었냐고 묻자 그는 대답한다. 신의주경찰서에는 전부터 잘 아는 최두천 형사가 있고, 신의주세관에도 안면이 있는 직원이 있어 별다른 검사 없이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총독부에 폭탄을 던지려고 결심한 동기는 뭐냐는 질문에 황임성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를 통해 종로경찰서의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 경부보를 알게 됐는데, 그와 교류하며 동양평화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고한다. 황임성은 총독부 관리나 일본정부 사람들이 상해임시정부 요인들과 직접 만나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좋으며, 당장 붙잡아서 처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미와 경부보에게 얘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은 미와 경부보 외에는 별로 아는 사람이 없어 자신의 생각을 총독부나 일본정부의 고위 관료들에게 전달할수 없었다. 그래서 폭탄을 터뜨리고 자신의 얘기를 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폭탄 범인 황임성의 정체
우리는 황임성이 김익상 대신 붙잡힌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진술 태도이다. 그는 경찰 심문부터 검사의 심문까지 아주 적극적으로 총독부 폭탄 투척 혐의를 인정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첫 번째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경찰의 고문이다. 일제강점기 일본 공안당국은 흔히 극심한 고문으로 범죄자를 만들어왔다. 식민통치 기간 동안 언론에 드러난 고문치사사건도 상당히 많다. 무리한 고문수사가 만들어낸 비극적인 결과다.
하지만 황임성의 진술은 왠지 고문으로 만들어진 것 같지 않다. 전반적으로 그의 진술태도가 너무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진술에는 어느 부분에서도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숨기려고 하는 부분도 없는 것 같다. 이것은 피의자로 조사를 받는 사람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다. 더구나 그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얘기까지 너무 과장되게 얘기하고 있다. 그의 진술에 신뢰가 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황임성을 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은 <동아일보> 기자 남홍이 이와 관련하여 시사할만한 진술을 했다. 그는 황임성에 대해 “허풍이 많은 편”이라고 평가했다. 황임성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만이 아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를 그렇게 말한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러시아에서 공부하다 왔다는 둥, 독일에서 공부하다 왔다는 둥 하면서 허황된 얘기를 한 결과다. 심문기록에서 전해지는 황임성의 불성실한 생활 태도도 신뢰를 떨어뜨리는 또 한 가지 요인이다. 그는 유학을 준비한다고 하면서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고, 돈도 없으면서 외지에 나와 여관 생활하며 빈둥빈둥 되는대로 생활했다. 그러니 더더욱 믿음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황임성의 진술 가운데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다. 그의 진술 속에 경찰들이 너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는 경찰들과 꽤나 교류해온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가 만난 경찰은 대부분 ‘불령선인’을 다루는 고등경찰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고등경찰들이 황임성과의 관계 때문에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의 조사대상에 올랐다는 점이다.
제일 먼저 조사대상이 된 사람은 신의주경찰서의 최두천 순사부장이다. 최두천은 시종일관 변명조로 조사에 응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황임성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자(황임성)를 언제나 불령자로 접근하고 시국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한편, 부단히 주의해서 감시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시국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고 관계를 맺었을 뿐, 그를 충분히 경계하고 조심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그가 총독부 폭탄 범인이라니 그는 아마 기겁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조사받은 경찰은 황옥 경부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영화 밀정에서 송강호가 맡았던 이정출의 실제 모델이 바로 황옥이다. 그 역시 황임성과 관계를 맺었는데 친밀도는 최두천보다 훨씬 높다. 황옥과 황임성은 서로의 숙소를 서슴없이 오갈 정도로 긴밀했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황옥은 훨씬 전부터 황임성을 알았다. 황옥은 1919년 상하이에 밀정으로 파견되어 임시정부를 감시하다 들통날 위기에서 급히 돌아왔는데, 그때 그가 새로 옮겨간 보직이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서기였다. 그래서 그 무렵부터 진주 출신의 황임성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던 것이다.
황옥은 황임성이 상하이에서 돌아온 자였기 때문에 충분히 의심하고 경계했다고 말했다. 또 황임성은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어서 그의 말을 다 믿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역시 황임성에게 ‘불령선인’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려고 부단히 애를 쓰며 그를 관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수사에 황임성을 적극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황옥에 앞서 실제로 황임성을 수사에 적극 활용한 경찰이 있다. 황임성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그로 인해 수사당국의 조사를 받은 경찰이다. 그는 바로 일제강점기 고문경찰로 악명이 높았던 종로경찰서 미와 와사부로이다. 그는 황임성을 사실상 밀정으로 활용했다. 미와는 황임성이 김수인이라는 사람을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하자, 그에게 여비를 주고 김수인의 행적을 찾으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황임성은 미와의 지시에 따라 마산으로 내려가 김수인을 찾아다녔으며 수소문 끝에 부산에서 김수인을 찾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때 경찰이 현장을 덮쳤고 황임성은 김수인과 함께 체포됐다. 그리고 그는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사건의 범인으로 조사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황임성이 폭탄 범인이 된 이유
미와 경부의 밀정 황임성이 갑자기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이유는 무엇일까? 경찰의 수사보고서에는 황임성이 의심스러웠던 이유가 10가지나 쓰여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정말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경찰은 황임성을 의심했고, 범인이 아니냐고 추궁했으며, 결국 그의 자백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밀정 황임성이 갑자기 총독부 폭탄 범인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예심 단계에 이르러서야 겨우 모습을 드러낸다. 제4회차 예심 심문에서 황임성이 잘 조사를 받고 돌아가다가 불현듯 예심판사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나는 결국 어찌 되는 것인가? 약속은 1개월에 끝나는 것인데.” 예심판사가 물었다. “약속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러자 황임성이 모두 다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이 폭탄 범인이 된 진짜 이유를 말이다.
황임성의 말에 의하면 그가 총독부 폭탄 범인으로 자백한 이유는 경기도경찰부 고등과장의 협박과 설득 때문이었다. 고등과장은 총독부 내에 그를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며 그가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이들 때문에 큰 고초를 겪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고등과장은 황임성이 범인임을 인정하고 협조하면 그를 이용해 임시정부의 중요 인물 5~6명을 귀순시키는 공작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것이 성공하면 한 사람당 500원 정도를 준다고도 했다. 고등과장은 모든 취조는 1개월 이내에 끝날 것이고 그후 임정 요인의 귀순공작을 위해 자신과 함께 중국에 가게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황임성은 고등과장의 협박과 설득에 넘어가 폭탄 범인이라고 자백하게 되었다. 그런데 약속한 시간이 훨씬 지나도록 취조가 끝나지 않으니 고향의 부모님도 생각나고 “이제는 공부도, 돈도, 아무 것도 필요없다”고 생각하게 되어서 비로소 진실을 털어놓게 되었다는 것이다.

황임성은 3월 24일 예심 면소 결정이 떨어져 당일 서대문구치감에서 풀려났다. 아래의 사진은 면소된 황임성 초상. <동아일보> 1922년 3월 25일자 기사

조선총독부 공안 관계자들은 왜 황임성을 폭탄 범인으로 조작하려고 했을까? 그것은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이라는 초유의 사건이 가져온 정신적 압박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칫 이 사건이 미제 사건으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초조감, 범인을 잡고 싶다는 간절함과 출세욕이 범인 조작이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그들을 몰고 간 것일 것이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관계자들의 거짓과 허구가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그들의 식민통치 자체가 모두 거짓과 허구의 결과물이 아니던가.
그 수많은 거짓과 허구 중 하나로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범인 조작사건이 방대한 심문기록과 함께 남아 있을 뿐.
결국 1922년 3월 24일 황임성은 예심 면소 판결을 받고 그날로 서대문구치감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4일 후인 3월 28일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의 진범 김익상이 붙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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