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현지보고 유혈의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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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소개]

현지보고 유혈의 제주도

조덕송 조선통신 특파원

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신천지> 1948년 7월호에 실린 조덕송(趙德松, 1928~2000)의 「현지보고 유혈의 제주도」다. 올해 75주기를 맞이한 제주4·3항쟁에 대해 일부 정치세력들이 ‘김일성의 지시로 촉발되었다’는 등 제주4·3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4·3항쟁을 객관적으로 추적 보도한 글을 발굴 소개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자못 크다. 4·3 당시 조선통신사 소속이었던 조덕송 기자는 이후 국제신문, 연합통신, 평화신문, 자유신문, 조선일보 간부를 역임했다. 조 기자는 제주4·3항쟁을 취재했을 뿐 아니라 반민특위 관련 필화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서울 수복 후 언론계에 복귀했다가 정국은 간첩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 편집자 주

죽음의 거리화 하는 제주의 밤
오후 8시가 제주도의 서울 제주읍의 통행금지시간이다. 해가 짧은 남방의 여름이라 할지라도 오후 8시면 아직 황혼의 안개가 어둠을 기다리는 산책의 시간이련만 이곳 제주의 거리는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진다. 동란을 모르고 옛날과 같이 우는 애상적인 물새소리가 처량하다가 점점 어둠이 칫수가 길어가면 이상한 흥분 가운데 살기가 창일(漲溢)하여가고 제주의 밤은 완전히 죽음의 장막에 뒤덮여 버린다.

4월 3일 미명(未明)에 돌발한 제주도 동란은 무척이나 치안당국을 괴롭힌 채 꺼질 줄을 모르고 요원의 불처럼 확대되어 기어코 제주 전도(全島)를 화중(禍中)에다 몰아넣고야 말았다. 이리하여 동란은 전쟁의 형태로 변하였고 평정하려는 경찰과 국방경비대 그리고 폭도들 사이에 총포는 끊임없이 교환되고 있다. 육로에서 상상하던 전장은 한라산이었고 폭도측의 습격으로 경찰지서 등이 가끔 파괴된다는 정도가 우리들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막상 이곳에 다다라서 필자의 상상과 상식은 여지없이 깨트러져 버렸다.

제주 부두에 내려서는 첫날 밤 시내 쪽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총성은 필자로 하여금 온몸을 경직케 하고 같은 배로 파견되어온 응원경찰대(100명)를 앞에 두고 최후 훈시를 주는 인솔자의 “이제 제1선에 왔다. 제군의 목숨은 나라에 바친 것” 하는 비장에 떨린 목소리는 어떤 종류의 각오를 필자에게까지도 요구하는 듯이 들린다. 서울을 떠날 때 우스갯소리로 “종군기자 조심하게” 하던 동료 선배들의 목소리까지도 컸다 작았다 사라지지 않는다. 제주읍에는 국방경비대 현지(제11연대) 사령부가 있고 치안을 주로 담당하고 있는 경찰의 경비사령부가 있고 소탕(평정), 치안, 행정의 최고 지휘자인 미군본부가 있다. 이러한 제주읍의 경비는 철통 같건만 밤이 되면 방향 모르게 총성이 터져나오고 폭도들의 군호소리가 호응을 하는 것이다.

제주도민의 5·10 선거 거부 이후, 하지 중장은 브라운 대령을 제주도지구 사령관에 임명,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나섰다. 출처: 제주4·3아카이브

붙잡혀 있는 사건 피의자를 재판하려고 서울로부터 파견되어온 판검사 일행이 유숙하고있는 여관 문전에는 24시간 경관의 보초가 서있고 호위 경관의 수행 없이는 백주에라도 그들의 외출은 엄금되어있다. 시내 요충지에는 모래가리니(토양)로 구축된 바리케이트가 왕년의 뉴스 영화를 연상시키고 입초(立哨) 경관은 통행인의 신분조사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멀리 구름을 감고 서있는 한라산 거기가 바로 폭도들의 근거지이련만 전장의 살기와 총포의 군호소리는 이 제주읍과 어느 쪽이 더하는 것인가. 국방경비대 장교의 말을 들으면 제주읍의 모든 동태는 시시각각으로 한라산에 전달보고된다고 한다. 즉 제주읍에 무수한 그들의 아지트(연락소)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보탐지에는 주로 12, 13세의 소년들이 ‘개’(경관) ‘빗개’(경비대) 등의 암호를 써가며 활약하고 있다고 ‘개’ 혹은 ‘빗개’가 몇 명 몇시에 어느 쪽으로 갔다, 또는 어디서 왔다고 하면 순식간에 한라산 중복(中腹)으로 보고된다고 한다. 밤이 되면 죽음의 거리화 하는 제주의 복중(腹中)에는 이러한 죽음의 거리의 근인(根因)이 수없이 박혀있는 것이다.

경비대가 말하는 인민해방군
제주도에는 당초 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제주도 출신의 젊은 사람들이었고 또한 그들의 동무들이 창립 당시의 경찰관에도 들어가 있었다. 그 후 육로로부터 또는 멀리 서북 조선으로부터 육속(陸續) 치밀어드는 애국청년들에게 경관의 제복을 돌려주고제주도 출신의 청년들은 물러나섰다. 그러는 동안 제주도에는 정치운동이 활발하기 시작하였고 이 섬 사투리 아닌 다른 사투리를 쓰는 청년단체원들로 제주는 자못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제주도민의 이맛살이 찌푸러지든 말든 건국을 위한 국민운동 노선에는 그들의 감정쯤은 마땅히 희생되어야 할 당시의 제주도 공기이었다.

그래도 제9연대 경비대원은 이런 공기와는 다소 먼 거리에서 그들의 본분의 탁마(琢磨)에전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동란이 폭발되자 경찰지서를 포위하고 총탄을 퍼붓는 일련의 분자는 이 9연대 경비대원이었으니 어찌하랴.

지금 제주도에 있는 경비대는 11연대다. 그 후 9연대 대원은 〇〇으로 기타 지방으로 대부분 분산되고 대신 각 지구 연대에서 선발된 혼성부대가 제11연대이다.

소위 반란군의 낙인 아래 지명수배를 받고있는 구 경비대원이 ××명 있고 체포된 자가 30명이다. 이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제주에 고등군법회의가 설치되고 있는 것이다.

경비대가 전투행동을 개시한 것은 4월 27일. 그동안 삐라로 회견으로 수차 폭동측의 귀순을 권고하였으나 이에 불응하는 폭도측은 도리어 혈서로 권고에 회답하고 있다.

친애하는 장병 제형(諸兄)이여! 제형의 민족적 양심과 정의에 불타는 올바른 행동을 우리들은 믿노라 (중략) 왜 우리들이 총대를 메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우리들에게 무력의 도전과 만행을 그치지 않는 한 우리들은 백만 군이 오더라도 불사하고 싸울 것이다. (중략) 친애하는 제형들이여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다음에 우리들의 정당한 요구를 제시하노라.
1. 무장경관대의 즉시 해산
1. 사설 테러단체의 해산과 처벌
1. 도지사 유해진(柳海鎭)을 즉시 파면하라.
1. UN조위(朝委) 철거
1. 미소 양군 즉시 철퇴(撤退)
1. 단정(單政) 반대
1. 남북통일정부 수립 절대 추진 (하략)

이상이 귀순 권고에 대한 폭도측의 회답 요지이다.

국방경비대가 행동을 개시한 후로는 경찰은 해안 일주 도로에서 4킬로미터 내의 치안유지를 맡고 있다. 그러나 경비대의 세력이 증파되기 전의 폭도의 전투목표는 언제나 경관대였던 것이다.

지금 제주에는 육로로부터 파견된 경관 외에 이미 있던 사설단체까지도 임시경관으로 편입 되어있다. 경찰과 협력하는 단체로 제주도에는 아직도 향보단(鄕保團)이 존속하고 있으며 그들은 경찰의 지휘하에 비교적 경찰지서에 가까운 동리의 경계에 불철주야하고 있다. 이리하여 위험한 산악지대의 전투에는 경비대가 주동이 되어있고 또한 해안경비대는 제주도 해안의 경계와 육지로부터 증가되는 파견부대의 수송에 당(當)하고 있으니 이를 통솔 지휘하는 최고지휘관이 미군 브라운 대령이다.

“본관이 온 후로는 육상, 해안 양 경비대와 경찰이 잘 협력하여 일하고 있다.” 이렇게 언명한 최고 지휘관은 “사건은 본관의 계획대로만 간다면 약 2주일이며 평정될 것이다.”(브라운 대령이 언명한 2주일은 지금 한 달이 넘었다)라고 피력하고 “사건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본관이 평정해놓은 후에 다시 발생한다면 그것은 본관의 책임이 아니고 조선인 행정자의 책임이다.”

필자가 이 섬에 온 그 이튿날 국방경비대는 아무 중대작전을 개시하였다고 일사불란의 대오로 출동 전진하였다. 목표는 한라산인지 산간부락인지 미명에 폭우를 무릅쓰고 장정들은 전진한다. 필자도 이 출동부대를 따랐다. 지금 제주도에 파견되어있는 경비대의 세력은 약 4천, 그들 전원이 출동하는 모양이다. 말없이 움직이고 있는 그들 장정! 그것은 틀림없는 전사의 모습이다.

미군 철모에 미군복, 미군화에 미군총, 비가 오면 그 위에 미군 우장(雨裝)을 쓴다. 멀리서보면 키가 작은 미군부대가 전진하고 있는 것 같다. 조선이라는 조국을 방위할 이 나라의 병사 겨레의 장정들이 지금 남해의 고도(孤島)에서 적이 아닌 동족의 섬멸에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한라산에 반거(蟠居)하고있는 소위 폭도들은 경비대를 절대 적대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경비대 장교의 말을 빌리면, 경찰이라 하면 생사를 결단하고 덤비는 폭도들이 경비대에 대해서는 양민이 되어버린다고 한다. 총이나 칼을 쥐고 파수를 보고 섰던 폭도들도 경비대가 접근하면 총칼을 감추고 일하는 농부가 되고 집단으로 소위 빨치산전투를 전개하고 있던 조직부대도 대군의 경기가 나타나면 종적을 감추어 버린다고 한다. 또한 두통거리는 그들의 능숙한 전술과 민첩한 행동이라고 장교는 말하였다.

30만의 일본군 대군이 동원 집결되어 있던 한라산 근거지는 그만두고라도 제주도는 도처에 바위와 돌이다. 실로 유명한 삼다(三多)의 석다(石多)는 폭도들의 가장 큰 자연 색물(塞物)의 하나다. 지금 전진하는 출동부대는 무수히 구축되어있는 도로 장애물(돌과 바위가 가로막고 있다) 때문에 적지 않는 지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며 뒤따라오는 보급자동차는 이외에 절단 파괴된 도로에 몹시나 시달리고 끊어진 교량을 임시 수리해가며 아슬아슬하게 전진하고 있다. 별안간 산울림이 아니라 총성이 한 방 정숙한 사막을 울리고 터져 나온다. “이것도폭도들의 군호소린가, 선견부대의 대전의 총포인가” 이제 여기는 바로 제일선이다. 정작 총알이 어디서 날아와 두개골을 뚫고 달아날지 모르는 판이다. 그러나 호령을 질러놓고 경비대 장교는 웃으며 말한다.

“이따위 것은 괜찮수다. 허긴 경찰과 같이 다닌다면 상당히 위험하디만.” 평양 사투리의 장교 음성이 자신만만하다. 즉 폭도들은 절대 경비대를 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폭도들의 복장은 도민의 일상생활복 그대로이다. 감물[柿汁]을 들여서 쉬 더러워지는 것을 막으려는 그들의 생활복은 또한 폭도들의 보호색복이 된다. 아무 데나 엎드리고 드러누워 버리면 바위와 그들을 색별(色別)하지 못한다. 앞뒤로 바라다보이는 기복 많은 구릉에 얼마나 한 빨치산 부대가 산재하고 있는 것인지― 폭도의 수효는 미지수다. 산간지대에 있어 한라산의 권내에 들어있는 부락민은 대부분 산에 들어갔었고 그동안 소탕부대에 붙잡힌 폭도측의 포로는 6천을 넘고있으나 폭도의 기세는 여전 불변이고 전투는 지금 한라산에 미치지 못한 채 부근 산록 일대에서 전개되고 있다.

“요놈의 자식들이 어떻게 산을 잘 타는지 우리네들이 두 시간이나 걸려서 겨우 올라가는 산길을 아― 이자들은 한 2, 30분이면 댓둥 올라가닝낀” 장교의 실전 고심담은 계속된다. 가끔씩 나타나는 부락을 쉴새 없이 거쳐서 민대(民隊)는 전진한다. 사실은 거쳐가는 부락이면 모두가 다 안정지대가 아니라 한다. 경찰이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하지만 오더라도 일일이 부락을 수색하고 부락민의 사찰에 주력하지만 지금 경비대는 전진하지 않으면 안될 중대 작전을 펼치고있다는 것이다. 이 부락 저 부락 모두가 ‘사(死)의 촌락’이다. 개소리 하나 들을 수 없고 가끔 나왔다가 피하는 듯이 숨어버리는 부락민인 듯한 사람을 가리켜 장교는 “저자도 폭도들의 파수꾼인디 모르디만 저따위 하나 잡아 봤댔자!” 하고 옆눈으로 흘기고는 간다.

비는 개지 않는다. 부대는 쉴새 없이 전진하고 장교의 주의로 이제 후속 부대는 갈 수 없는 곳이라 하여 한 부락에서 떨어졌다. 비구름에 둘러싸인 한라산은 아직도 멀고 높다. 무수한 동굴이 거미줄처럼 착종해있는 저 산중복(山中腹)에서는 지금 무엇이 지령되고 있는 것인가. 한라산을 포위하고 그들을 섬멸하자면 100만 가까운 무장부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4천을 조금 넘는 국방경비대의 중대작전은 과연 무엇이며 어떠한 성과를 가져올 것인가.

‘인민해방군’, 국방경비대가 부르는 폭도들의 칭호다. 한라산에 총사령부가 있고 각 부락에 지구사령부가 있고 그 아래 자위대, 돌격대, 결사대 등의 조직체가 꾸며져 있으며 웬만한 큰 마을에는 인민재판소가 있고 인민보안서도 설치되어있다고 한다. 이날 아침 대정면 인민군사령부를 습격하여 압수하였다는 무기나 서류 등을 보았다. 혈흔이 싱싱한 곤봉, 구시대의 엽총, 일본도, 죽창, 철창 등이 가지각색의 무기가 폭도들의 손에서 최신 미식 장비에 대치하여 오늘 새벽까지 생명의 탈취도를 피로써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무기, 이로써 최신 무장에 생명을 걸고 버티고 나서야 할 절대성을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며 한라산 속에 철공소까지 장만하여 총칼을 벼르지 않으면 안된 필요성을 무엇으로 규정지어야 옳으냐. 포로들이 후송되어 온다. 자동차로 가뜩이나 실려가는 젊은 사람들, 도보로 철썩거리고 끌려오는 노소에다 부녀까지 끼어있는 일련(一聯), 비는 아직도 개지 않는다.

꾸부린 채 말없이 이끌려가는 그들의 안색은 그들의 의복과 같은 색깔이다. 감히 그들을 어느 모로 보아야 폭도라고 부를 수 있을런지 12, 3세 되는 소년이며 60이 넘은 늙은이며 부녀자까지 무엇 때문에 폭도라 규정받지 않으면 안될 처지가 되었는가. 말을 건네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고개를 돌리고 만다. 철모에 군대 우장을 쓴 필자의 꼴도 그들의 눈에는 경비대로 보였을 것이다. 그들의 보금자리이든 그들 자신의 마을을 고개를 돌리며 끌려서 지나가는 포로들이여 과연 이 무수한 포로들이 그치는 날 이 마을에 비로소 평은(平隱)의 피리소리가 들려올 것이냐.

무인지경의 들판에 썩어가는 보리
제주도 인구는 33만. 그 9할이 농업이고 나머지가 어업이다. 해저에서 솟아난 한라 화산이 뿌려놓은 이 섬의 돌과 바위, 그리고 수성암(水成巖)에 싸여있는 경사진 토질에는 벼를 심을 수 없다. 논이라고는 서귀포를 중심한 강가에 손바닥만큼 있을 뿐 산정에 이르는 화전(火田)에까지 해먹을 수 있는 것은 보리뿐이다. 도민의 주식물은 보리, 감자, 수수, 조이고 우리들의 상식(常⻝)인 쌀은 그들에게는 황금이나 다름없이 귀하다. 한 되박 근근이 구해둔 쌀은 선령(先靈)을 모시는 제사의 밤에 그들의 정성의 차림으로 귀히 소비되는 것이다.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로 교역하여 구해오는 식량을 합하여도 자급자족에는 흡족지 못하는 그들에게 실로 한해의 보리농사는 다음 한해의 그들의 생명의 끈이 되는 것이다. 벼는 북쪽으로부터 내려 베고 보리는 남에서부터 치어 벤다. 6월 중순이면 제주도의 보리 추수는 벌써 끝나고 수수니 조니 가을갈이 준비에 바쁜 때이련만 들판에는 낫자루 잡은 농부의 꼴 하나 볼 수 없으니 진정 이변이 아닐 수 없다. 누렇게 우거진 보리목이 그대로 말라서 시들어가고 한줄기 비에도 이제 막 썩는 판이다. 익어서 말라가는 보리를 보고도 거두지 못하는 도민들은 대체 내년이 오면 무엇으로 목숨을 연명할 것인가. 언제나 때가 오면 말썽 많던 하곡(夏穀) 수집이 금년에 한해서 제주도에는 철폐되고 말았다. 폭동의 불길이 하곡 수집까지도 중지시키고 만 것인가. 하곡 수집을 철폐한 당국의 의도가 내변(奈邊)에 있던 수집을 할래야 거두어 드릴 사람이 없는 것이 제주도 들판의 현상이다.

동란의 화(禍)는 결코 총칼이 맞서는 교전지구에만 있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벌판에 은근히 닥쳐오는 기아의 위협은 풍요한 논밭을 거쳐서 33만 도민의 창자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만일 하곡을 추수 못한다면 제주도에는 폭동 아닌 다른 민요(民擾)가 일어날 우려가 많다.” 이 말은 서울서 온 아무개 판사의 말이다. 그뿐이랴. 어부가 배를 못 타게 되었고 필자는 제주도에 있는 동안 유명한 해녀를 보지 못하였다. 그들의 경제를 돕는 부업, 한라산의 약초는 아예 채취 불가능이요 해초마저 뜯지 못하여 경제면으로 보는 손실만도 수억 원에 달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를 북으로부터 남으로 돌아 일주하는 동안 다만 눈에 띄는 것은 밭고랑 산등성이에 즐비하게 나자빠진 전주로 바람에 너울거리는 산발된 전선 그리고 백지화하다시피 된 돌과 바위의 삐라들이다.

소위 대동아전쟁의 종말을 이곳에 지으려고 구축한 왜군의 진지가 싸우지 못하고 허물어진 덕택으로 아무런 족속의 유린도 받지 않고 그대로 평화의 도원경을 지킬 수 있었던 제주도에 그 누가 뜻하였으랴. 겨레가 겨레의 피를 요구하고 아로새기는 혈흔의 저주가 지금 제주 전역의 산에 들에 그리고 마을에 음산하게 스미고 있는 것이다. 문전옥토(門前沃土)라고 문자 그대로는 못 될지언정 그들에게는 다시없는 생명의 열매인 익은 보리를 눈앞에다 두고 담너머로 넘어다만 보는 광대뼈 불거진 늙은이의 이마에는 오는 해의 무서운 역사가 벌써 주름잡혀 있지 않는가. 동란에 쫓기어 주인을 잃었는가 방마(放馬)의 한떼가 밭도랑을 헤매이며 무엇을 찾아 우는지 방향 없는 울음소리가 무인지경의 들판에 애절하기 짝이 없다.

1948년 5월 중산간지대로 피신한 제주사람들. 출처: 제주4·3아카이브

동란의 희생자
들판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부락민을 만나러 필자 일행은 할수없이 마을로 찾아 들어갔다. 여기는 비교적 제주읍과 가까운 곳이다. 한라산 산록에 접근되어있는 산간부락은 물론 폭도측의 세력지구이나 이 마을사람들도 역시 한 번씩 산에 갔다온 사람들이다. 경찰의 비호가 있을 때에는 그들에게 귀순을 하나 폭도가 내려오면 그들의 일당화 하는 것이 이 중간지대의 부락민들이다. 폭도도 될 수 있고 양민도 될 수 있고 그들의 임시변통은 그러나 그것이 자율적이 아닌데 비극의 슬픔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느 편이고 경원(敬遠)한다. “밤이 되어도 4월 3일 이후로는 옷을 벗고 자지를 못하고 경찰이 와도 안심이 안되고 산사람(도민은 누구나 폭도를 산사람이라고 부른다)이 오면 또 언제 산으로 가야 할는지…” 되도록이면 그들은 말을 피한다. 이 마을 역시 4월 3일날 8명의 경찰 및 그 가족들이 희생된 곳이다.

폭도들이 와도 귀찮고 경찰이 와도 귀찮고 그들은 마땅히 동란의 화중(禍中)에서 갈 바를 모른채 억울한 희생자가 되어있는 것이다. 백지처럼 인형처럼 무표정한 그들의 표정은 실은 그 위에 더 강렬할 수 없는 평화에의 향수를 내뿜고 있다. 미끄러져 내려오는 철모에 손을 대기만 해도 깜짝하는 눈초리로 안 보는 듯 살피는 그들의 눈은 말 못할 불안과 회의 속에 빛깔없이 어둡다.

“어떻게 하면 평안한 날이 오겠소” 묻는 말에 “그리말수다(글쎄올시다)” 하고는 다시 말이 없다. 담너머로 머리만 내고 넘어다 보다가도 혹 시선이 마주치면 얼른 숙여버리고 마는 그들. 무한이나 하고 싶은 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질려서 피하려고만 하는 그들이다. ‘산사람’이 내려와서 협력을 요구할 때 그들은 ‘산사람’의 말대로 움직인다. 그러고 나면 경찰은 그들을 폭도라고 처벌한다. 경찰이 도민의 안정 때문이라고 기부금을 요청하면 그들은 또한 말없이 제공한다. 그러고 나면 반역자에게 협력했다고 ‘산사람’들의 제재를 받는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그들에게는 억지로 죽을 수 없는 목숨을 붙들고 모두가 다 “그리말수다”의 회의 속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지금 제주도에는 폭도들을 심판하기 위한 재판이 벌어지고 있다. 무수히 끌려온 포로들 가운데서 범죄의 혐의 있는 자만을 추려 법정에서 밝힌다. 기소된 혐의자는 대개가 20세 내외의 젊은 청년들이다. 이들의 가족 친척들로 법정은 매일 울음바다로 변하고 열기 찬 어조의 변호사의 변론이 판검사를 울리고 있다. “이들은 대개가 기계적으로 움직였고 아무런 주의 없이 행동한 젊은 사람이다. 만일 이런 사람들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소위 붙잡힌 몇천 사람이 다 법정에 서야 될 것 아닌가. 관대한 처벌을 선동 교사한 자들에게까지 원치는 않는다. 그러나 선량한 도민들, 억울한 희생을 당하고 있는 도민들을 이들과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변호사의 변론의 일단이다. 사건의 기소 이유는 살인, 살인미수, 방화, 방화교사, 왕래방해, 포고령 2호 위반… 등등 다종다양이다. 판례를 들고보면 살인미수에 무기징역 언도 등 문자 그대로 준열하다. 한편 재판은 고문치사사건을 일으킨 경찰관들도 취급하였다. 5년 체형에 200만 원 벌금으로 판결된 이 군정재판은 최고 지휘관 브라운 대령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진정 시기는 속단을 불허할 상태이고 날로 포로는 증가되고 있다. 한편 육지로부터 파견되어온 경관 수는 천명을 헤아리고 제주도 재근 경관 수백 명을 합하여 치안보호에 주력하고 있으나 신출귀몰하는 폭도들은 또한 상당한 수의 경관을 희생시켰다.

백골의 상자가 되어 혹은 부상당한 몸을 싣고 육로로 행하는 경관들… 이 모든 것이 동족의 참극이 자아낸 너무나도 고귀한 대가라면 과연 이 고귀한 대가는 무엇을 결과지을 것이냐. 이것을 원하는 자는 그 누구보다도 동란의 화중에 갈 바를 잃은 도민 자체들이다.

유혈의 원인은
4월 6일 폭발 이래 석달을 헤아리고 국방경비대며 경찰의 정예가 수천이 동원되어도 아직껏 종식의 예단조차 불허하는 이 동란은 도대체 무엇이 원인이 되어 폭발하였는가.

관의 발표는 모든 원인을 대부분 인위적인 것으로만 제시하고 있다. 즉 공산계열의 남로당분자가 주동이 되어 선량한 도민을 선동하고 협박하고 공갈해서 경민(警民)을 이관(離官)시키고 적구(赤狗)의 세상으로 만들려는 그들의 흉악무도한 반란이 이번 동란의 근본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을 보는 관찰의 시각은 각자의 주관에 따라서 동일치 못한 결론을 가져오는 수가 많다. 이제 필자는 여러 가지로 말하는 이 민족적 참극의 피비린내 나는 씨[種]가 어느 곳에 자라있었는지 식견 있는 인사들의 견해를 종합하려 한다.

자고로 원인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다. 원인을 구명치 못한 채 결과만을 운위하다가는 흔히 같은 형태의 경험을 반복하는 수가 많다. 더욱이 제주도사건 같은 민족적 참극에 있어서랴!

치안복구를 목적으로 딘 군정장관의 특명을 받고, 이곳에 와서 있는 최고 지휘관 브라운 대령은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고 언명하였다. 그리고 부언하여 “본관이 진압시킨 후 다시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조선인 행정기관의 책임이다”라고 말하였다. 조선사람이 아닌 브라운 대령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견해이겠으나 무엇인지 섭섭함을 금치 못할 말씀이다.

서울로부터 내도한 아무개 판사와 검사는 대개 일치된 견해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주도에는 해방 이후 좌익세력이 상당히 침투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조직체는 인민위원회를 통하여 전도에 행세를 하였다. 이러한 환경에 타도(他道)로부터 들어간 경관이 도민에게 가혹히 한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사설단체가 정당한 국민운동을 못하고 경찰력에 이용당하여 폭력행위로 도민의 감정을 도발하는 등 민심이 완전히 관에서 이탈되어 버렸던 것이다. 더욱이 행정기관에 있는 관리들은 도민과 경찰당국의 이러한 유리(遊離)에 전연 방관적이었고 그들은 그들의 착복에 급급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좌익분자의 좋은 선동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우선 이도쇄신(吏道刷新) 인물배치의 재편성 등을 꾀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데에 사건해결의 첩경이 있을 것으로 본다.

또한 재야 법조회의 한 변호사는 말한다.

우는 어린애를 운다고만 꾸중해서는 안된다. 왜 울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제거하여 주어야만 울음을 완전히 그칠 것이다. 선동만으로 전 도민이 다 총대 앞에 가슴을 내밀 것인가. 제주도사건은 그대로 조선의 축도(縮圖)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법조계의 아무개 요인은 이도(吏道)의 부패가 금번 사건의 원인이다. 곪을 대로 곪아있는 사건의 종기를 파종(破腫)시킨 것이 공산당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직접 동란의 희생이 되어있는 제주도민은 무어라고 사건의 원인을 말하고 있는가.

금번 사건의 도화선은 순전히 도민의 감정악화에 있다. 무엇 때문에 제주도에 서북계열 사설청년단체가 필요하였던가. 경찰당국은 치안의 공적도 알리기 전에 먼저 도민의 감정을 도발시키는 점이 적지 않았다. 왜 고문치사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거리에 놀고있는 어린아이를 말굽으로 밟아 죽이고도 말없는 순경에게 도민의 눈초리는 매서워진 것이다. 직접 원인의 한 가지로 당국자는 공산계열의 선동모략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근인(近因)의 한 가지로 긍정할 수 있다. 그러나 33만 전 도민이 총칼 앞에 제 가슴을 내밀었다는 데에서 문제는 커진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진정시키고 또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함에는 당국자의 참으로 감족적(感族的) 흉도(胸度)와 현명한 시책이 필요하다. 무력으로 제압하지 못하는 이동란을 통하여서 제주도의 참다운 인식을 하여야 되며 민심을 유리한 시정이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느껴야 할 것이다. 이상이 종합 보고하는 도민들의 여론이다.

1948년 11월 경찰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중인 제주도민들. 출처: 제주 4·3 사건 진상 보고서

폐허화한 목가(牧歌)의 섬
육지에서 며느리를 데려오기는 하나 딸자식을 섬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도민들은 누구나다 일가이며 친척이다. 오랜 피에 매여있는 그들 혈족의 생활전통은 한 사람의 이해가 곧 전도민의 그것이 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일찍이 봉건세력이 발달되지 못한 이곳에는 소위 착취층이 없다. 누구나 다 지주이며 누구나 다 일꾼이다. 그들의 생활이 극히 균등하였기 때문에 언제나 평화의 도원경(桃源境)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 때 35명의 일인 관리만으로 능히 치정(治政)할 수 있었던 곳, 70명의 경관으로 전도의 치안을 유유히 확보할 수 있었던 곳, 형무소가 필요없는 사회, 전당포가 없는 곳, 걸인을 볼 수 없고 도적이 없는 평화경(平和境) 제주도. 이 목가의 섬은 지금 옛 자취를 찾아볼 바 없이 폐허화하였다. 어느 한 부락은 150호가 3, 4호를 남기고 전소하였고 피해가 가장 작은 부락이 5, 6명의 사자에 3, 4동의 가옥을 태우고 있다. 12면 경찰지서는 모조리 습격을 당하였으며 면사무소 유지 가옥 등의 파괴와 소각은 상금 접종(接踵)되고 있는 것이다. 전도를 통하여서 전주가 제대로 서있는 부락은 하나도 없고 산정이나 들판에 서있는 전주까지도 찾아볼 바 없다. 6월 23일 실패했던 5.10선거를 재선거하려 했으나 이 역시 무기 연기되고 말았다. 제주도에 선거를 실시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평화의 여명도 그날일 것이다. 상공에는 미군정찰기가 날고 해상에는 미군 순양함의 경계의 황연(黃煙)이 그칠 사이 없고 또한 육상에는 기마로 지프차로 제일선을 지휘하는 미군 장교가 동서를 질주하고 있는 금일의 제주도. 그는 끝내 전화(戰火)를 면치 못할 숙명의 섬이었더냐.

제주도에 요즘 신판 민요가 유행되고 있다. “류크삭크 둘러메고 무엇 하러 왔더냐. 백원짜리 담으려고 네 여기 왔느냐―” 무엇을 풍자하는 도민의 심정인가. 이 노래가 전파될 무렵 한라산 중허리에서는 본격적인 전투훈련이 벌어졌고 부락과 부락 사이에는 암호의 연락이 오고갔던 것이다.

중공군이 잠입했느니 일본공산당원이 들어있느니 북조선인민군 간부가 무전기로 지휘하고 있느니 한라산 폭도들에 대한 억측이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정작 확인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그들의 교묘한 전술만이 화제와 더불어 파문을 일으키고 있을 뿐이다. 말없이 우뚝이 솟아있는 한라산은 이 모든 문제를 홀로 알고 있을 것이련만 과연 이 참극이 그치는 날까지도 그는 손꼽고 있는 것인가.

유람 가는 제주도였고 돌 많고 여자 많고 바람 많은, 언제나 시정 어리어 있는 목가의 섬이었다. 서귀포 70리의 백사장을 씻어가는 푸른 파도는 삼성혈(三姓穴)이 낳은 전설의 섬을 옛날과 다름없이 어루만지고 있건만 정작 저 터져 나오는 저주의 총성은 무엇을 징조(徵兆)하는 군호의 소리이냐. 말없이 넘실거리는 태평양의 푸른 물에 필자는 또한 말없는 함성을 외쳐본다. (6월 29일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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