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 탐구 (18)] “미 북한 공습, 미국이 타 민족에게 가한 가장 극단적인 폭력”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된 수 주후 맥아더는 북한 지역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고 1951년 1월 서울이 함락됐다. 트루먼과 맥아더는 한반도를 완전 포기할 가능성을 검토했다(Schnabel, James F. (1972). Policy and Direction: the First Year.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Washington, D.C.: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ISBN 0-16-035955-4. OCLC 595249. CMH Pub 20-1-1. Retrieved 27 March 2021. pp. 310–314).
당시 유럽 주요 국가들은 미국의 정책 중심이 유럽이 아닌 아시아를 향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미국의 정책 변경이 자칫 중국과의 전면전은 물론 소련과의 핵전쟁으로 비화할 것을 우려했다.
소련과 중국은 1950년 2월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해 전쟁이 날 경우 서로 돕기로 함으로써 미국이 중국을 공격할 경우 3차 세계 대전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우려되었다. 이런 점이 미국 정계 등에 전달되면서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쟁의 확전을 경계했다.
1951년 3월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은 반격을 시작해 서울을 재탈환한 뒤 38선까지 북진했다. 그 해 4월5일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의 유럽 중시정책과 한반도에서의 제한전쟁 전략을 비판하는 서한이 공개됐다(James, D. Clayton (1985). Volume 3, Triumph and Disaster 1945–1964. The Years of MacArthur. Boston: Houghton Mifflin. ISBN 978-0-395-36004-0. pp. 584–589).
그러자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경질하기로 결정하고 4월10일자로 매슈 리지웨이 장군을 후임으로 지명했다(James, D. Clayton (1985). Volume 3, Triumph and Disaster 1945–1964. The Years of MacArthur. Boston: Houghton Mifflin. ISBN 978-0-395-36004-0. pp. 607–608). 이후 미군과 중공군은 소모전을 전개하는 양상이 벌어졌다.
한국전쟁 인명피해 6백여만 명… 2차 세계대전보다 커
한국전쟁은 2차 대전 종전 5년 만인 1950년 6월25일 한반도 전면전 형태로 발생해 유엔군이 참전하고 중국군이 개입하는 국제전으로 비화되어 엄청난 인명 피해 등이 발생했다. 3년 3개월간 지속된 한반도 전쟁에는 21개국이 전투병과 의료진을 보내 참전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결장이 되었으며, 대략 6백여만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남북한이나 미국, 중국 등의 집계가 서로 달라 혼란스런 가운데 남한의 인적 손실은 모두 230만여 명, 북한의 인적 손실은 292만여 명으로 추정됐다. 또한 1천만 명의 결핵환자,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인적 피해는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 때보다 피해가 더 컸다. 모든 도회지는 거의 파괴되었고 양측의 학살과 고문 기아로 인한 사망 등이 속출했다(Fisher, Max (3 August 2015). “Americans have forgotten what we did to North Korea”. Vox. Retrieved 18 October 2021./ Robinson, Michael E (2007). Korea’s Twentieth-Century Odyssey. Honolulu, HI: University of Hawaii Press. pp. 119-120. ISBN 978-0824831745).
참전국 군대의 인적 손실은 정확히 집계된 적이 없고 여러 종류의 자료가 존재하는데 한국군 75만 명 사상, 북한군 50만 명 사상, UN군 18만 명 사상, 중공군 95만 명 사상으로 추정된다. 남북한 전역이 초토화되고 주요시설 파괴는 52%에 달했다.
한국전쟁 중 남한 민간인 피해는 모두 99만968명으로 이 가운데 37.7%인 37만3599명이 사망했다. 북한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150만 명으로 추정되었는데 북한 당국은 사망자를 별도로 밝힌 바가 없다(Bethany Lacina and Nils Petter Gleditsch, 2005. ―Monitoring Trends in Global Combat: A New Dataset of Battle Deaths.‖ European Journal of Population: 21(2–3): 145–166. Korean data available at “The PRIO Battle Deaths Dataset, 1946-2008, Version 3.0,” pp. 359–362).
남북한 전 지역에서 학교·교회·사찰·병원 및 민가를 비롯해 공장·도로·교량 등이 무수히 파괴되었다. 특히 민족 내부의 불신과 적대감이 커지면서 남북 간 분단의 벽이 더욱 높고 견고해졌다.
미국의 북한 공습, 2차 대전 독일, 일본 도시 피해보다 심각
한국전쟁은 미국이 1945년 세계 2차 대전 종전이후 승리하지 않고 휴전했던 최초의 전쟁이라고 하지만 당시 북한의 도시들이 입은 공습피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 도시가 공습으로 입은 피해보다 더 심각했다. 미 공군은 한국전쟁 3년 동안 평양 등 북한의 주요 도시들 대부분을 네이팜탄과 소이탄 등을 투하해 철저히 파괴했다(https://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17/aug/13/america-carpet-bombed-north-korea-remember-that-past).
미 공군의 B-29 폭격기 등은 1950~1953년 한국 전쟁 기간 동안 북한 전역의 대 중 소도시를 폭격해 모든 건물의 85%를 파괴했고 주요 댐도 파괴해 주민들을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게 만들었다(https://en.wikipedia.org/wiki/Bombing_of_North_Korea).
극동공군(FEAF) 소속 폭격기들은 한국 전쟁 개전 초 전쟁 수행에 긴요한 산업 시설이나 철도와 같은 교통 통신 수단 등에 대해 정밀폭격을 실시했다고 했지만 실제 거의 무차별적인 폭격이 이뤄졌다. 정밀폭격은, 2차 대전 당시 독일과 유럽에서 융단폭격으로 일컬어지는 식으로 야만적인 폭격이 광범위하게 실시되어 대규모의 민간인 살상 등이 초래되자 비도덕적이고 비생산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미 공군이 채택한 공격 원칙이었다.
이 원칙은 중공군 참전이전 까지 유효했다고 하자만 북한의 군수시설 등이 인구밀도가 높은 주요 도시에 세워져 있어 미군 폭격 시 많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 하지만 중공군 참전이후에는 이 원칙이 실질적으로 폐기되었다.
1950년 11월 맥아더 사령관은 강계, 신의주와 수 개의 작은 도회지를 화염 공격하는 방안에 동의했다. 그 당시 북한의 모든 도시와 부락, 공장, 건물, 통신 시설 등은 파괴하라는 명령을 미 공군은 하달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에 따라 11월5일 22대의 B-29가 출동해 강계에 출동해 이 도시의 75%를 파괴했고 그 후에도 여러 도시에 대한 공격이 실시됐다.
1951년 8월 한 종군기자는 ‘압록강과 평양 사이는 철저히 파괴되어 도회지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살았던 곳은 철저히 파괴되고 굴뚝만 남아 있어서 마치 달나라를 여행하는 것 같았다’라고 썼다.
종전 당시 북한의 22개 주요 도시는 대부분 60~95% 정도 파괴된 것으로 미 공군은 평가했다. 맥아더는 중공군이 참전하자 중국과 북한의 접경인 만주 부근에 34개의 핵폭탄을 투하해 최소 60년 동안 북한의 남침이 불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미 정부에 요구하다가 경질되었다(https://en.wikipedia.org/wiki/Bombing_of_North_Korea).
1953년 5월 미군 폭격기들은 정전협정에서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북한 지역에 있는 수력발전 시설이나 관개용 댐을 공격해 농지에 홍수가 나거나 작물을 파괴했다. 특히 독산댐, 자산댐, 구원가댐, 남시댐 등을 공격해 수 백 만 명의 북한 주민이 굶주리게 만들었다. 북한에 대한 화염 폭격을 멈출 즈음에는 미군 폭격기들이 목표물을 찾기 어려워 개천에 놓인 작은 다리를 폭격하거나 바다에 폭탄을 버리기도 했다.
미 공군은 한국전쟁에서 3만2557t의 네이팜탄을 포함해 모두 63만5000t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는 미국이 2차 대전 당시 유럽에 106만t을, 태평양전쟁 때 일본에 투하한 16만t을 포함해 총 50만t을 투하한 것과 비교된다. 참고로 미국이 참전해 폭탄을 가장 많이 투하했던 국가는 캄보디아 50만t, 라오스 200만t, 남부 베트남 400만t이었다.
미국의 북한지역 화염공격으로 민간인 최고 150만 명 사망
미국이 1950~1953년까지의 한국전쟁 때 실시한 북한 지역에 대한 화염공습으로 북한 민간인 99만5천명(최저 64만5천~최고 150만 명)이 사망했으며 이는 세계 전사에서 가장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초래한 것으로 일부 국제기구나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https://www.mintpressnews.com/state-of-fear-how-historys-deadliest-bombing-campaign-created-todays-crisis-in-korea/235349/).
북한 민간인 화염공습 사망자를 99만5천명으로 추정할 경우에도 세계 주요 전쟁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를 능가한다. 즉 2차 대전 당시 독일에 대해 연합군이 실시한 화염공습으로 민간인 40만~60만 명이, 일본에 대한 화염공습과 핵무기 투하로 33만~90만 명이 각각 사망했다.
미국은 1945년 3월9~10일 도쿄에 화영공습을 실시해 민간인 10만 명이 죽고 1백만 명의 가옥을 불태웠다. 또한 인도차이나에서 1964~1973년 동안 실시된 여러 작전으로 발생한 민간인 사망자는 12만1천~36만1천 명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 사망자 수는 그 비극이 발생할 당시 전체 인구와 비교하면 북한 경우가 가장 심각했다. 즉 북한은 1950년 당시 전체 인구가 970만 명이었고 2차 대전 종전 당시 독일 전체 인구는 6500만 명, 일본은 7200만 명이었다.
미 공군이 북한 지역에 실시한 화염공습은 2차 대전 당시 유럽과 일본에서 자행된 방식이다. 단 20분 정도의 짧은 시간에 행해지는 공습으로 전체 도시가 약 1500~2000°C의 고온 속에 불타는 화재폭풍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즉 강력한 폭약으로 건물을 파괴하고 네이팜탄과 다른 소이탄으로 거대한 화염을 일으켜 소방관들이 불길을 진화하지 못하도록 해 해당 지역 주민 등을 질식시키는 방식이었다(https://en.wikipedia.org/wiki/Korean_War).
그러나 2차 대전 종전 후 화염공습 방식이 민간인에게도 사용되는 것은 군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전후 활용 가능한 자원을 불태워 비생산적이고 세계 보편적 개념인 도덕률에 반하는 것이란 비판을 받았다.
미국 2차 대전 후 독일 공습 피해 현지 공장 배상, 북에 대해선 조사도 안해
전쟁 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2차 대전이후에는 잠시 부각되었고 한국 전쟁 발발 초기에 미국은 민간인도 살상하는 전면전 형태인 화염공격을 금지했었다. 하지만 개전 5개월 만에 중공군이 참전해 미군 등이 철수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를 번복했다. 미 공군은 북한 지역에서 군대, 보급, 군수공장과 통신 시설, 은신처로 사용 가능한 모든 건물을 포함한 모든 목표물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미국은 2차 대전 종전 후 독일에 대한 화염공습에 대해서는 1천 명에 달하는 조사단을 현지 파견에 정밀 조사해 미국의 독일 현지 공장 피해 등에는 배상을 했지만 일본과 북한 지역에 실시한 동일한 공습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사 등을 실시하지 않았다(https://www.mintpressnews.com/state-of-fear-how-historys-deadliest-bombing-campaign-created-todays-crisis-in-korea/235349).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강행된 북한에 대한 공습은 미국이 타 민족에게 가한 가장 극단적인 폭력의 하나이면서 미국인들이 그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군은 1958~1990년까지 남한에 수백 개의 핵폭탄을 배치하고 북한의 침공 초기에 사용한다는 계획을 세워두었다. 북한이 한국전쟁에서 겪은 공습에 대한 피해와 공포는 결국 북한이 핵보유를 시도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는 식의 견해도 있다.
미국 대통령 등이 북한 선제공격을 위협하는 발언을 하면서 한반도에서 전쟁 수행 권을 미국이 갖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한반도의 특성 상 남북한 주민들이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을 가능성을 고려할 때 대단히 부적절한 일이다.
남한 주민 5000만 명, 북한 2500만 명이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을 가능성을 상정한다면 감히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고 한미동맹 관계가 엄존한다 해도 한국 정부가 그런 발언이 나오지 않도록 안전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미국 핵무기 중국, 북한에 사용 검토하고 투하 직전까지도 추진
미국은 한국전 발생 직후와 중공군이 참전해 전세가 불리해졌을 때 중국과 북한 지역에 핵무기 투하 계획을 추진하면서 중국 정부에 그 사실을 통고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미국은 그러나 소련이 핵무기로 일본을 공격할 가능성 등을 우려해 결국 한국전에서 핵무기 사용 계획을 백지화했다(https://en.wikipedia.org/wiki/Korean_War).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6월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소련이 참전할 경우 소련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그 해 7월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에 미국의 공격 능력을 주지시키기 위해 B-29 폭격기에 핵심 부품을 제외한 핵무기를 탑재해 영국에 배치하도록 명령했다.
그 당시 미국 뉴욕 타임스 신문은 미국이 괌에 동일한 조치를 취했다고 보도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유엔군이 부산까지 퇴각했을 때 미 중앙정보국(CIA)은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미 국방부는 한국전에 핵무기 사용이 불가피해 질 경우 미 의회와 미 여론이 그것에 동의해줄 것이라고 확신했다(Dingman, R. (1988–1989). “Atomic Diplomacy during the Korean War”. International Security. 13 (3): 50–91. doi:10.2307/2538736. JSTOR 2538736. S2CID 154823668).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1950년 11월5일 중공군이 한국전에 참전할 경우 만주에 있는 중공군 군 기지를 핵 공격할 작전을 추진토록 명령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전술핵무기 ‘마크 4 핵폭탄’ 9발을 미 공군 B-29 폭격기 부대로 옮기도록 지시했는데 이는 중국과 북한을 겨냥한 것 이었다
1950년 11월30일 유엔군이 중공군에 밀려 압록강에서 남쪽으로 후퇴했을 때 트루먼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핵무기 사용은 미 야전 사령관의 판단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통상적 고려 사항이라고 말했다(Dingman, R. (1988–1989). “Atomic Diplomacy during the Korean War”. International Security. 13 (3): 50–91. doi:10.2307/2538736. JSTOR 2538736. S2CID 154823668).
이에 대해 워싱턴 주재 인도 대사는 본국에 타전한 전문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했지만 중국 지도부가 겁먹지 않을 것이다. 중국 지도부는 국내 결속과 대만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기 위해 트루먼 대통령의 발언을 이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했다(Knightley, Phillip (1982). The First Casualty: The War Correspondent as Hero, Propagandist and Myth-maker. Quartet. p. 334. ISBN 978-0801869518. Panikkar, Kavalam Madhava (1981). In Two Chinas: Memoirs of a Diplomat. Hyperion Press. ISBN 978-0830500130).
트루먼 대통령은 한반도 핵사용에 대한 자신의 발언으로 유럽에서 우려가 커지자 1950년 12월4일 영국 수상, 프랑스 수상 등을 만나 핵전쟁과 그것이 유럽으로 확산될 가능성 등에 대해 협의했다. 영국과 프랑스 지도자들은 미국이 구상하는 핵전쟁은 소련이나 중국이 한반도 전쟁을 확산시키는 것을 저지하는 것보다 소련이 서유럽을 공격할 빌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려했다. 즉 미국이 중국과 싸우는 동안 유럽이 미국의 핵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어 심각한 안보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Truman, Harry S (1955–1956). Memoirs (2 volumes). Vol. II. Doubleday. 394–95. ISBN 978-1568520629).
그 후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국은 유엔군의 퇴각을 지원하거나 심각한 군사적 재앙을 방지하는 등의 필요한 경우에만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점을 영국 정부에 전달하도록 건의했다(Dingman, R. (1988–1989). “Atomic Diplomacy during the Korean War”. International Security. 13 (3): 50–91. doi:10.2307/2538736. JSTOR 2538736. S2CID 154823668).
1950년 12월6일 중공군이 유엔군을 패퇴시키자 미 합동참모본부 사령관과 맥아더 장군 등 군 수뇌부가 도쿄에서 만나 중국군 참정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고 향후 수 주 또는 수 개 월 동안 벌어질 전쟁의 양상이 유엔군에 심각하게 불리하게 될 경우 핵무기 사용을 고려할 것을 협의했다(Schnabel, James F (1992) [1972].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Policy And Direction: The First Year.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pp. 155–92, 212, 283–84, 288–89, 304. ISBN 978-0160359552. CMH Pub 20-1-1.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7 May 2011).
당시 미군 수뇌부는 중공군이 전면전을 벌리면서 유엔군 증파가 1951년 4월까지 이뤄지지 않을 경우 핵무기 사용을 검토할 수 있다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건의했다(Schnabel, James F (1992) [1972].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Policy And Direction: The First Year.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pp. 155–92, 212, 283–84, 288–89, 304. ISBN 978-0160359552. CMH Pub 20-1-1.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7 May 2011).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과 미 국방부는 핵무기 사용은 중국과의 전면전을 벌려야 할 위험이 있고 외교적 파급효과가 크다는 점을 들어 신중한 입장을 취하면서 1950년 12월 전황이 유엔군에 불리했지만 핵무기 사용을 심각하게 검토하지 않았다(Dingman, R. (1988–1989). “Atomic Diplomacy during the Korean War”. International Security. 13 (3): 50–91. doi:10.2307/2538736. JSTOR 2538736. S2CID 154823668).
1951년 중국이 신규 병력을 한국전에 투입하자 미국은 일본 카데나, 오키나와 미군공군기지에서 한반도에 사용할 핵무기를 최종 부품만을 제외하고 조립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1951년 10월 미국은 B-29 폭격기들이 오키나와에서 북한 지역으로 비행해 모의 핵폭탄과 재래식 폭탄을 투하하는 작전을 실시했다.
미국은 당시 실제 핵폭탄 투하에 필요한 모든 과정에 대한 모의 훈련을 실시했다. 그 결과 핵폭탄이 대규모 보병 부대를 목표로 삼는 것은 전술적으로 비효율적인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 대규모 병력이 한 곳에 집결하는 경우가 많지 않고 설령 그런 경우가 있다 해도 적시에 파악해 타격하는 것이 쉽지 않다(Far East Command G-2 Theater Intelligence (1951). “Résumé of Operation, Record Group 349, box 752”).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은 1952년 초 한반도 외부에서 항공기에 의한 대규모 공격이 발생할 경우 핵무기를 사용할 권한을 위임받았다. 이와 관련해 당시 미국의 한 특사가 미국의 핵무기 사용 의향을 중국에 전달하기 위해 홍콩을 방문했다.
그 결과 중국 지도자들은 미국의 핵무기 사용 계획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가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지도자들의 미국의 B-29 배치에 대해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1952년 6월 중국이 취한 두 차례의 대규모 공세가 실패로 끝나면서 중국의 전략이 방어 쪽으로 전환했고 미 B-29 폭격기들도 미 본토로 귀환했다(Dingman, R. (1988–1989). “Atomic Diplomacy during the Korean War”. International Security. 13 (3): 50–91. doi:10.2307/2538736. JSTOR 2538736. S2CID 154823668).
핵무기의 파괴력이 가공할 만하지만 그것이 한국전쟁에서 사용됐다 해도 그로 인한 효과는 크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됐다. 그 이유는 당시 중공군이나 북한군이 한 곳에 밀집하지 않고 넓은 지역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고 군대가 집결할 기본 시설이나 병참 기지 등이 상대적으로 열악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당시 미국의 전술핵무기는 소련을 목표로 비축되어 있었다. 그 결과 중공군에 핵공격이 가해졌다 해도 중공군의 이동이나 작전에 제한적 영향을 미치는데 그쳤을 것으로 분석됐다.
만약 전략적 목적으로 중국의 도시들을 공격해 민간 기업이나 시설을 파괴했다면 중국 지도부에게 타격을 주겠지만 중국 지도자들이 중국인들 한국전쟁에 동원할 명분을 준다는 점도 지적됐다.
소련은 자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로 중국이나 북한을 지원할 것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전면 핵전쟁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고 동시에 그런 상황이 벌어질 경우 장래 전투에서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국가에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높이는 전례가 될 위험도 지적됐다(Farley, Robert (5 January 2016). “What If the United States had Used the Bomb in Korea?”. The Diplomat. Retrieved 5 January 2016).
1953년 초 트루먼 대통령이 물러나고 집권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반도에서의 핵사용에 대해 신중한 입장이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도 중국에 대한 전략을 수립했지만 그것을 실행할 경우 소련이 일본을 공격할 것을 우려했다. 그 결과 한국전쟁은 미국이 핵무기 사용을 실전에 적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전 상태가 되었다(Dingman, R. (1988–1989). “Atomic Diplomacy during the Korean War”. International Security. 13 (3): 50–91. doi:10.2307/2538736. JSTOR 2538736. S2CID 154823668).
미국의 세균전 논란, 731부대 면책 특권 부여 등과 무관치 않아
미국이 한국전쟁 기간 동안 중공군과 북한군을 상대로 세균전을 전개했다는 논란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미국이 한국전 기간 동안 세균전을 시도했다는 주장은 중국과 북한이 먼저 제기했고 소련이 국제 조사 기구를 발족시켜 그것이 사실이라는 근거를 제시했지만 미국은 계속 부인하고 있다(Harris, Sheldon H.; Factories of Death: Japanese Biological Warfare, 1932–45, and the American Cover-up; Taylor & Francis; 2002 ISBN 978-0-203-43536-6). 미국은 한국전에서 세균전과 한탄(Hantan) 바이러스 등 생물무기를 사용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미국은 중국과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힌 미군 전투기 조종사가 미국의 세균전 작전에 대해 증언한 뒤 귀국했을 때 적에게 협조해 반역죄 혐의가 성립된다는 점 등을 앞세워 과거의 증언을 번복하도록 만들었는데 이의 정당성 여부를 놓고 오래 논란이 빚어졌다(Lech, Raymond B. (2000), Broken Soldiers, Chicago: University of Illinois, pp. 162–163, ISBN 0-252-02541-5).
미국이 한국전에서 세균전을 전개하려 했다는 의혹의 대상이 된 것은 미국이 일본이 2차 대전 기간 동안 만주에서 자행한 731부대의 세균 폭탄 개발 등을 목적으로 한 인간 생체실험 자료를 731부대원에게 면죄부를 주는 조건으로 전달받은 반인륜적 행각으로 빚어진 측면도 강하다.
731부대의 인간 생체 실험 대상으로 3천 여 명이 희생됐는데 조선인이 중국인 다음으로 많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711 부대는 생체실험 과정에서 개발된 세균탄을 만주의 중국인들을 상대로 실험을 해 수 십만 명이 사망했다(Wells, A.S. (2009). The A to Z of World War II: The War Against Japan. The A to Z Guide Series. Scarecrow Press. p. 42. ISBN 978-0810870260.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8-01-16. Retrieved 2017-07-08).
미국은 일본의 전쟁 범죄를 눈감아 주는 대가로 넘겨받은 731 부대의 자료로 세균전에 대비한 실험을 계속했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전쟁 기간 동안 일본이 731 부대원이 주한 미군과 함께 활동했다는 기록도 제시되었다(https://en.wikipedia.org/wiki/Allegations_of_biological_warfare_in_the_Korean_War).
미국이 세균전에 대한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는 논란이 큰 가운데 오늘날에도 미국이 주한미군 기지 3곳에서 세균전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는 논란이 그치지 않는다. 한국 시민단체 등이 앞장서 미국을 향해 그것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SOFA 등으로 보장된 특권을 앞세워 시정할 움직임을 취하지 않고 있다. SOFA는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에 따른 후속협정으로 주한미군에 탁송된 군사화물에 대해 한국의 통관 절차를 면제하는 등 주한미군에 엄청난 특권을 부여하고 있다.
주한미군은 2013년 6월부터 서울 용산, 경기 오산 등 국내 3곳의 미군기지내 연구실에서 생물학적 대응실험을 하는 ‘주피터(Jupiter) 프로젝트’를 진행해왔고, 2015년 주한미군이 용산기지에 ‘살아 있는 탄저균’을 반입해 한국 내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탄저균은 그 주피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알려졌다. 세계 25곳에 있는 미군의 생물무기 관련 연구소는 실험 시료나 정보, 자료를 미국 본토로 보내지 않고 분석하기 위해 한국으로 보낸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쥬피터 프로젝트’이다(오마이뉴스 2020년 06월12일).
2013년 3월 ’화학 생물학 방어계획 포럼‘에서 미군의 주피터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는 피터 이매뉴얼 박사는 발표 자료를 통해 “주피터 프로젝트는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북한의 생물학무기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2013년 6월부터 착수하는 군사 프로젝트”라며, 이 프로젝트의 독소분석 1단계 실험 대상이 “탄저균과 보툴리눔 에이(A)형 독소”라고 밝혔다(민중의소리 2015년 06월05일).
이매뉴얼 박사는 보툴리눔과 탄저균 실험을 주도하는 연구소로 서울 용산 65의무연대와 경기 오산의 51의무전대, 위치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은(충남) 미 육군공중보건국 산하 환경실험실 등 3곳을 구체적으로 적시했는데 단 1g으로 100만 명을 몰살할 수 있는 보툴리눔 등의 세균전 물질들이 한국 정부도 모르는 사이에 주한미군 실험실로 반입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의 부적절한 미국 6·25 참전 극찬, 양식 있는 미국인 어떻게 받아들일까
6·25 한국전쟁의 총성을 멈추게 한 정전협정이 만들어진 뒤 70년이 되었지만 평화협정 제정은커녕 한반도에서 핵전쟁 발생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정전협정이 만들어진 뒤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한 미국의 남한에 대한 군사적 특권은 치외법권 형식으로 보장되고 있다.
한미와 북한, 한미일과 북중러간 대치의 벽이 높아지는 가운데 최근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내놓은 미국의 625 한국 전쟁 참여에 대한 최고의 표현을 통한 칭송과 감사의 표시가 역사적 사실관계와 부합치 않는 것 같아 유감이다. 윤 대통령은 미국의 625 한국 전쟁 참여를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에 참여해 미국에 대한 감사의 말을 쏟아냈다.
그 가운데 하나를 보면, 윤 대통령은 한미 동맹 70주년을 기념하는 오찬에 참석해 한국전 참전 미군 용사들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전쟁의 폐허를 딛고 글로벌 리더 국가로 발돋움한 대한민국의 눈부신 번영은 미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 서있다. 한국전 참전 용사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6·25 한국 전쟁과 관련한 미국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는 전쟁 이전 미국의 남한에 대한 정책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것은 철저히 자국 이익추구에 맞춰져 있었다. 미국이 당시 참전을 결정한 것은 남한 주민이나 남한의 영토주권 보호가 아닌 자국 이익 보호와 증진이 목적이었다. 미국의 그런 태도로 인해 한국 입장에서 혜택을 보았다는 점을 부인키 어렵다 해도 대통령의 관련 언급은 국제사회의 시선을 의식할 때 그 객관타당성을 견지해야 한다.
윤 대통령이 언급한 미국의 6·25 한국 전쟁 참전과 미 젊은이의 희생에 감사하는 평가가 주관적인 생각인지 여부가 분명치 않다. 미국이 남한의 공산화를 저지하려 한 것은 남한에 대한 애착이나 남한 주민에 대한 동정심의 발로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미국의 6·25 한국 전쟁 참여 결정에 대한 의미는 미국이 9세기 말 조선과의 수교이후 일관되데 취했던 한반도 정책이 미 국익 증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가스라-테프트 밀약이 그 사례다. 이 밀약을 통해 미국 정부는 일본의 한반도 강탈을 간접 승인했고 36년간 조선인의 독립운동은 철저히 외면했다.
태평양 전쟁 직후 미국은 남한 점령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군정을 실시하는 과정에 친일세력을 군과 경찰에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친일청산을 저지했다. 미국은 한반도 남쪽을 소련의 극동 진출을 막기 위한 교두보로 삼기 위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강행한데 이어 중국의 모택동 군에 의한 통일과 공산화 직후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을 공표해 극동에 대한 미국 방어선에서 남한을 제외시켰다.
미국은 6·25 한국 전쟁 발생 이전 남북한 간의 잦은 총격전에도 불구하고 남한 정부의 북진 가능성을 우려해 남한 군에 대한 무기 공급을 주저했고 북한군의 전면남침 공격 사실도 사전에 탐지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전쟁이 발생하자 미국은 일본의 공산화를 우려해 한반도 사태에 유엔을 통해 적극 개입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변경하고 유엔안보리에서 3차례의 긴급회의를 통해 미국이 유엔 깃발을 사용하면서 주도하는 다국적군을 만들게 된다.
미국은 한국전쟁기 전후해 엄청난 양민 학살이 자행된 것을 수수방관한 측면이 있고 북한군과 민간을 가리지 않는 사상 최대의 공중폭격 등을 실시했다. 미국은 2차 대전 당시의 미군의 공습으로 발생한 독일 민간인 피해는 전후 배상조치를 했지만 한반도에서는 기초 조사는커녕 완전 무관심했다.
미국은 정전협정이후 한미상호바위조약을 이승만 정부와 체결해 평화협정 추진을 의무화한 정전협정에 전면 위배되는 조치를 취했다. 동시에 미국은 남한에 핵무기 반입 등을 통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전략을 추진하면서 정전협정이 세계 최장의 것이 되게 만들었으며 결과적으로 오늘날 북한의 핵무장을 초래한 원인의 하나를 제공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윤 대통령이 국빈자격으로 방미를 한 자리에서 행한 6·25 한국 전쟁의 미국 참전에 대한 칭송 일변도의 언급은 국민을 대신하는 의미를 지녔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6·25 한국 전쟁 발생 이전의 미국의 한반도 정책만을 살펴보면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고 미국이 평화협정 채결을 외면한 것도 국제법적 상식에 비춰 문제가 심각하다.
윤 대통령이 사실관계에 부합치 않는 6·25와 미국의 기여에 대한 언급을 한 것에 대한 미국의 반응이 궁금하다. 혹시 양식 있는 일부 미국인들은 윤 대통령의 언급을 듣다가 얼굴을 붉히지 않았을까 걱정된다. 과공은 비례라는 말처럼 지나친 것은 부족함만 못하다는 격언이 생각나게 하는 사례다.
미국의 대외 정책은 미 국익 챙기기가 최상의 가치로, 우방국에 대한 도감청이나 외국 지도자 암살을 불법으로 처벌치 않고 그 폭로 행위를 되에 반국가사범으로 처벌하게 되어있다. 최근 미 국가안보국(NSA), 중앙정보국(CIA), 국무부 정보조사국 등 정부 정보기관이 한국 정부 등에 대한 불법 도감청 자료가 폭로됐는데 2013년에도 미 국가안보국(NSA)이 적대국뿐만 아니라 한국 등 다른 동맹국의 미국 주재 대사관을 염탐한 사실이 폭로된 바 있다.
국제법을 짓밟는 미국의 불법행위에 대해 한국 정부가 별 문제아니라며 덮으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국제사회의 법치를 훼손한다는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미국이 경제적 이익을 앞세워 자국 반도체, 배터리 산업 보호를 위해 취하는 파렴치한 행위로 국내 기업이 곤욕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의 대외정책이 6·25 전쟁 전후해 한반도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미국의 오늘날의 모습이 국제사회에 어떤 모습인지 윤 대통령이 더 정확히 파악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2023-05-03> 미디어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