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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민족고대에 전두환 국정자문위원의 빈소가 웬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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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유진오

▲ 1961년 6월 16일 국가재건최고회의 간사인 유진오의 기자회견. ⓒ 연합뉴스

유진오는 1965년에 대일 굴욕외교를 강행한 박정희가 독재자로 변해가던 시기의 야당 지도자다.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통칭 한일협정) 2년 뒤이자 제6대 대선(5.3)과 제7대 총선(6.8)이 임박한 1967년 2월 7일, 유진오는 통합 야당인 신민당의 대표위원이 됐다. 두 선거에서 연패한 뒤인 이듬해 5월 20일에 총재로 선출된 그는 1970년 1월 7일 건강 문제로 사임할 때까지 제1 야당을 이끌었다.

그는 1967년 선거에서 박정희에게 연달아 패했지만, 강력한 지도체제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자신의 직함을 대표위원에서 총재로 격상시켰다. 1968년 5월 13일 자 <경향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는 기존 체제로는 한계가 있다면서 비주류 측의 집단지도체제 요구를 억누르고 총재 체제를 확립시켰다.

박정희가 3선 개헌(10.17)에 성공한 직후인 1969년 11월부터 신민당 내에서 김영삼(1927년생) 주도로 40대 기수론이 부각되고 김대중(1924년생)·이철승(1922년생)이 함께 부각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에 태어난 유진오의 정치 인생은 이 현상의 출현과 함께 저물게 됐다.

유진오는 야당 지도자로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 이것만으로는 그의 인생을 설명하기 힘들다. 여타 영역들에서 남긴 족적도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는 제헌 헌법으로 불리는 1948년 헌법의 기초자다. 또 1935년 작 단편소설인 <김 교수와 T강사>의 작가다. 동시에, 친일 반민족행위자다. 1980년 2월 23일 자 <경향신문> 기사가 “여러 방면에서 그의 천재성을 발휘해 왔다”고 평한 것처럼, 그는 여러 분야에 뛰어들었고 그때마다 좋건 나쁘건 명성을 쌓았다.

여러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의 특성은 일제강점기 때도 현저했다. 재동공립보통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중학교)를 거친 그는 1924년에 대학 예과 입학 모의시험과 경성제국대학 예과(고교급) 입학시험에서 각각 1등을 했고, 1929년 경성제대 졸업 때도 수석을 기록했다.

이 시기에 그는 학교 공부만 한 게 아니었다. 예과 때는 문우회란 모임을 만들고 <문우>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본과인 법문학부 재학 때는 좌파 서클인 경제연구회를 조직했다. 반체제 서클에 가담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조직하기까지 했다.

이듬해에는 단편소설 <스리>를 내면서 스물한 살 나이로 문단에 데뷔했다. 경성제대 졸업 뒤에는 학술지 <신흥>도 발간하고 극단 메가폰도 결성했다. 그러면서 대학 강사 생활을 하다가 31세 때인 1937년에 훗날의 고려대인 보성전문학교의 교수가 됐다.

일제 패망 다음 날 ‘문인 유진오’도 패망

교수가 되고 얼마 뒤 그는 흥미를 잃고 다른 데로 눈을 돌렸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유진오 편은 “1939년 법학 연구를 중단하고 창작 활동에 몰두했다”고 설명한다. 이때 단순히 창작에만 몰두했던 것은 아니다. 친일에도 함께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다.

위 사전은 그가 1939년 7월호 <삼천리>에 ‘신질서 건설과 문학’이란 글을 발표한 사실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본격적인 친일 활동에 가담했다”라고 설명한다. 한때 사회주의에 심취했던 그가 이 시기에는 사회주의의 반대편인 제국주의에 빠졌던 것이다.

법학을 하면서 문학도 하고 연극도 하는 것과, 사회주의를 연구하다가 제국주의에 가담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당시의 아시아·아프리카는 제국주의하에서 크게 신음하고 있었다. 당대의 학생들이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인 것은 제국주의의 세계 지배에 맞설 방도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 고민에 동참했던 사람이 제국주의로 넘어갔으니, 이는 윤리적 잣대가 작용될 만한 사안이었다.

친일 영역으로 넘어간 그는 이 분야에도 대량의 에너지를 발산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0권 유진오 편은 “각종 입소, 파견, 연설, 낭독, 작품 출품 행위들을 통하여 학병·징병·지원병을 선전·선동함”, “‘결전에서 결전으로’ 등의 산문을 통하여 침략전쟁과 황민화를 위한 국책문학 및 문화를 선전·선동함”이라는 말로 그의 친일을 요약한다.

그것은 재산 축적과도 연결됐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글을 기고했을 뿐 아니라, 군국주의 침략전쟁을 돕는 단체나 기구의 상근직으로도 근무했다.

위 보고서는 “1939~1945년에 조선문인협회 발기인·간사·상무간사·상임간사,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소설부회장·평의원 그리고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와 선전부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강연, 방문, 위문, 심사, 행사 참가 등을 통하여 전시체제 국책문학을 적극 주도함”이라고 서술한다. 대학에서도 얼마든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친일 기구의 상근직으로까지 일했던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왜곡된 역사 지식을 기반으로 ‘일본은 우수하다’는 논리를 조선 사회에 퍼트렸다. 조선 및 청나라와 달리 일본이 서양문물을 쉽게 수용하고 서양과 전쟁까지 하게 된 원인을 일본 전통문화의 우수성에서 찾았다. 1965년 한일협정 이후로 친일파 연구에 매진한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은 유진오가 1943년 1월 9일부터 13일까지 <매일신보>에 기고한 ‘동양과 서양’이라는 논문을 이렇게 평했다.

“동양 모든 나라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유독 일본만이 그 서양문물의 섭취에 성공했다는 이유를 도쿠가와막부 300년 동안에 배양된 실력으로써 설명했으며, 이리하여 일본이 그 전통적인 정신으로 서양을 물리칠 만한 힘을 얻은 것이라고 논하였다.”

그의 친일은 세종대왕도 화나게 할 만했다. 한글을 지키는 사람들이 조선어학회 사건(1942.10.1)으로 고초를 입기 전에 그는 ‘국어 운동’을 펼쳤다. 전직 국어교사인 장호철의 <부역자들, 친일 문인의 민낯>은 “1940년 11월부터 12월까지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순회 시국강연의 연사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신체제와 국어 보급’이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라며 “모국어인 한글로 글을 쓰던 작가가 식민지 종주국의 언어를 국어라 지칭하며 그 보급의 중요성을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평했다.

이런 행보는 그의 문학 인생을 무너트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친일인명사전>은 “해방 직후 1945년 8월 16일 새벽에 문학단체에 동참하라는 임화의 부탁을 받고 문인들의 회합에 나갔다가 이태준 등의 항의로 쫓겨났다”고 한 뒤 “이후 작가의 길을 접고 교육가·법학자·관료 그리고 정치가의 길로 나섰다”라고 말한다. 일제 패망 다음 날 ‘문인 유진오’도 패망했던 것이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드러낸 ‘현민 빈소 사건’

▲ 1987년 9월 7일 이문영. 이상신. 권창은. 이만우. 윤용 교수(오른쪽부터) 등 고려대 교수 5명이 현민 유진오 빈소 철거 요구 시위사건과 관련 고려대 대학원 교수 휴게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문인의 길은 접었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갈 데가 많았다. 그 뒤 고려대 교수가 되고 미군정하의 남조선과도정부 법전편찬위원이 됐다. 1948년에는 친일 정당인 한민당 편에 서서 내각제 헌법을 기초했다. 친일 이미지 때문에 대통령제하의 대선 후보를 내기 힘든 한민당의 처지를 감안한 것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제가 아니면 안 하겠다는 이승만의 몽니로 인해 그런 구상은 깨지고 만다.

그 후 이승만 정권하에서 법제처장이 되고 한일회담 수석대표가 된 그는 1961년 6월 박정희 군사정권하에서 국가재건국민운동부장을 역임했다. 그런 다음, 야권으로 넘어가 신민당 대표위원이 되고 총재가 됐다.

그의 정권 참여는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피격된 직후에도 있었다. 1980년 2월 18일, 그는 국정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1979년 12·12 쿠데타를 계기로 전두환이 군부를 장악하고 우세를 점했지만 행정부는 여전히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의 지휘하에 있었던 과도기 상태에서 국정자문위원이 됐던 것이다.

1980년 5월 17일 두 번째 쿠데타를 벌이고 5월 18일부터 광주 학살을 자행한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한 9월 1일, 유진오는 취임식장 로열박스에서 A급 전범이자 아베 신조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등과 함께 전두환을 축하했다.

그해 11월 13일 자 <조선일보>는 전두환 정권이 정치활동 규제 대상자 811명을 공고한 사실을 보도하면서 “국정자문위원인 이재형 전 국회 부의장, 김정렬 전 공화당 고문, 유진오·박순천 전 신민당 당수는 제외됐다”고 전했다.

1983년 뇌혈전증으로 쓰러진 그는 4년 뒤 1987년 8월 30일, 8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6월항쟁 직후인 이때 발생한 사건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빈소가 서울대병원 영안실에서 고려대 대강당으로 옮겨진 뒤인 9월 1일, 이 학교 교수인 이문영, 이상신, 권창은, 이만우, 윤용이 “고대는 국정자문위원의 빈소일 수 없다”는 피켓을 들고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학생 300여 명은 대강당 앞 광장에서 “민족고대에 국정자문위원의 빈소가 웬말이냐?”라는 피켓을 들고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전두환 정권의 고위 관계자들이 보낸 조화 일곱 개를 치워버렸다.

이날 시위에는 또 다른 구호도 등장했다. 9월 8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친일반민족 지식인”이라는 구호가 그것이다. 절대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자유롭게 넘나든 천재 친일파의 장례식은 이로 인해 파행을 겪게 됐다.

서울대병원에서 고려대로 옮겨졌던 유진오의 빈소는 2일 새벽 1시 반경 서울대병원으로 되돌아갔다. 생전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빈소도 여러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그의 호를 따서 현민 빈소 사건으로 불린다.

김종성 기자

<2023-05-2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민족고대에 전두환 국정자문위원의 빈소가 웬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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