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 글방] 네 번째
1922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조선에 알린 황진남 지사
박광종 특임연구원
1. 1922년 아인슈타인 열풍과 독일 유학생의 기고문
1922년 1월 1일 3면에 동아일보는 ‘세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10인’을 선별하여 그 사진을 큼지막하게 실었다. 적위군 총사령관 트로츠키, 비폭력운동의 상징인 인도 간디, 광동정부 대총통 손문, 미국 대통령 하딩 등과 아울러 상대성원리 주창자 아인슈타인이었다. 동아일보는 그에 대해 “뉴턴의 인력설을 부수고 과학계에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고 소개했다.
객원기자였던 공민(公民) 나경석이 2월 23일부터 3월 3일까지 7회에 걸쳐 동아일보 1면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연재했다. 나경석은 아인슈타인을 ‘세계의 3대 괴물’ 중 하나로 소개했고, 천문학의 혁명, 에테르 부인설, 철학상 의의, 최대속도, 시간과 공간의 관념 등 5개 영역을 나누어 그의 상대성이론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냈다.
동아일보는 11월 4일 ‘아인슈타인 씨 일본 도착 기일’이라는 제목으로 아인슈타인이 순회강연을 위해 11월 중순경에 일본에 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울러 11월 10일 스웨덴 왕립과학원이 그동안 연기되었던 1921년도 노벨상 수상자를 결정하여 물리학상에 독일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선정되었다고 발표하자, 그 내용은 3일 뒤인 11월 13일 동아일보에 게재됐다.
아인슈타인이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은 것은 상하이에서였다. 아인슈타인이 일본을 방문하기 위해 1922년 10월 8일 기타노마루 호를 타고 프랑스 마르세이유항을 출발해 11월 10일경 상하이항에 기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1월 13일 상하이를 거쳐 11월 17일 오후 4시 일본 고베항에 들어섰다. 이때 그에게는 ‘상대성 박사’라는 타이틀 외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이 하나 더 달렸다.
고베 항구에는 당시 일본 물리학계의 대표격인 나가오카 한타로가 일본 학사원의 초청장을 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11월 19일 게이오대학을 시작으로 43일간의 일본 전국 순회 강연 여정에 나섰다. 도쿄대학에서 물리학계 전문가 대상의 강연(11월 26~30일) 한 차례, 센다이, 닛코, 나고야, 교토, 오사카, 고베, 나라, 미야지마 등지에서 십수 차례의 대중강연을 실시했다. 일본 과학계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아인슈타인 부부의 방일을 열렬히 환호했고, 대중 강연회에는 당시 3엔이란 비싼 입장료를 내면서라도 아인슈타인을 보기 위해서 매회 2, 3천 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이처럼 일본에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당시 주일 독일대사는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이 ‘개선행진’이었다고 비유할 정도였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그를 한번 보겠다고 구름처럼 몰렸고, 일왕비가 그를 만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 역시 그런 환대에 크게 감격한 듯하다. 먼 훗날 그는 일본 방문의 기억을 아름답게 기억하면서 일본을 떠나던 날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1922년 11월 18일 ‘상대성 박사 17일 도착’이란 제목으로 아인슈타인 박사 부부가 고베항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18일부터 20일까지 3회에 걸쳐 「아인스타인은 누구인가」 라는 특집 기사를 1면에 게재했다. 필자는 베를린대학에서 수학하고 있던 황진남(1896~1970)이었다. 함흥 출신으로 어릴 때 하와이 호놀룰루로 이민한 재미교포였다.
그의 기고문에 따르면, 황진남이 처음 물리학과에서 연구하는 아인슈타인에 대해 듣게 된 것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어떤 여학생이 아인슈타인을 아느냐고 물었을 때 황진남이 모른다고 대답하자, 그 여학생이 핀잔을 주며 “이 불쌍한 양반아! 용서하시오. 자기 시대를 이해 못하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다 합디다.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은 우리 시대의 특색입니다. 더구나 당신은 주야로 우주의 원성(原性)이니 인생의 원유(原由)이니 하시며 상대론 없이 당신의 문제를 어찌 해결하시려 하오.”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황진남은 철학에 대한 소양을 바탕으로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아인슈타인과 상대론에 대한 해석적 서류도 읽어보고 씨의 저서도 연구하여 보았으나 상대론의 심연한 의의는 이해치 못하였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 원문상에 새겨둔 ‘수학에 모르는 자에게는 출입을 금함’이라는 글귀를 절실히 기억하게 되었다. 아인슈타인 자신도 말하기를 상대론의 진의를 이해하는 이가 현재 차제에 5인 이외에 없다 했다는 풍설이 있다. 고등수학에 정통치 못하고 상대론의 진미를 알지 못하고 상대론을 이해치 못하는 아인슈타인 숭배도 허위라 하겠다.”
황진남은 1922년 2월에 독일의 최고 학술기관인 소위 과학아카데미 기념일에 베를린에서 아인슈타인을 처음 만났다. 황진남은 아인슈타인이 “우리 동아시아에 여행하려 출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중략] 상대론의 원리를 소개코자 하였다.” 황진남은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쓴 논문들을 소개하면서, 그가 어떻게 유명해졌는지 설명하고 있다. “「광선의 출생과 변태에 관한 발견적 관찰점」 「역(力)의 관성」 「브라운 진동의 법칙」 등이오. 그중 상대론과 직접 관계를 갖는 것은 「운동 중 물체의 전기역학적 연구」라는 논문이오, 또 동년에 박사학위를 득하기 위하여 「분자용적의 신측정법」이라는 논문을 제출하였다. … 현재 베를린대학 교수이자 역량단위론으로 저명한 물리학자 프랑크 씨는 사서(私書)로 경축까지 해주었다. 일차 물리학계에 저명하게 된즉 각 대학에서 상쟁(相爭)하며 고빙코자 하여 … 1914년에 베를린대학에 고빙되니 스위스인이오 황국주의를 극히 반대하며 사회주의적 경향이 있는 인격이 당시 제도대학의 교편을 취하게 됨은 독일 학계에 희유(稀有)한 일이다. 포앙카레(프랑스 현재 총리의 장형)와 같은 대학자도 당시에 아인슈타인 씨를 최대한 천재 중 1인이라 찬예하였다. 이리하여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은 인류문화사상 최고한 지위 중 일을 점하게 되었다. … 그후(1915) 저서 『일반상대론』으로 신우주관을 우리에게 부여하였다. 1919년에 영국 천문학 탐험단의 관찰로 인하여 상대론의 예언이 자연계의 사실임을 공포된 후 아인슈타인의 이름을 아동까지 찬예하게 됨은 우리가 경험하는 바이다. … 그런즉 인류문화사가 계속될 한에는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은 불후할 것이며 또한 전세계 인류가 갈릴레이와 뉴턴과 같이 숭배할 것은 부정치 못할 사실이다.”
황진남은 과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이상의 상대론의 물리학적 원리에 대하여 극히 간단히 설명하였으나, 만일 독자 중에 명백히 이해치 못하신 이가 계시면 그것은 자기의 과실이라고 자책하실 수 없을 줄을 믿습니다. 상대론의 진리는 고등수학의 지식이 없고는 이해키 불능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 말고 근세물리학의 3대 발견인 물질의 전소론, 역량(力量)의 단위론과 상대론을 열심으로 연구하여 볼 것이외다. 이 3대 문제를 더욱 발전시켜야 전무하던 과학계의 혁명을 기(起)하며 인지(人智)의 최대한 공헌을 발휘할 것이외다.”
황진남의 두 기고문 「상대론의 물리학적 원리」와 「아인스타인은 누구인가」는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에 발맞추어 조선에서도 아인슈타인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일조했다. 1922년 이후에도 아인슈타인의 근황을 다룬 기사가 신문지면을 장식했고 상대성이론을 뒷받침하는 과학실험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신문 잡지의 주요 기사로 다루어졌다. 한편 ‘과학조선의 건설’을 위해선 조선에서 현대 과학 이론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학습해야 한다는 조선 사회의 요구가 높아지면서 당시 식민지 조선의 저급한 과학 교육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는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점차 그 세력을 키워가게 되었다.
2. 미주 학창시절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의 외교 활동
황진남은 1896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 황명선을 따라 하와이로 이주해왔다. 1910년 9월 한인기숙학교 졸업식 당시 황진남은 연단에 올라 ‘대한국의 청년’이라는 주제로, “국가적·신앙적·윤리적으로 완전한 교육을 받을 때에, 우리가 능히 우리 대한국의 바라고 바라는 독립을 지금부터 10년 안에 건설할 줄 믿는다.”라고 연설하여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호놀룰루 마노아벨리에 있는 중앙태평양학교 8학년(중학교과정)에 입학하였다.
1915년 7월 중앙태평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1916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와 캘리포니아대학 광물학과에 입학했다. 1917년 3월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중앙총회에 신입회원으로 가입했고, 7월 26일 청년강연회에서 ‘광물학’을 주제로 강연했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가 1918년 10월 300달러의 예산으로 버클리한인학생양성소를 개소하자, 13인의 1명(대학생은 5명)으로 입소했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캘리포니아대학 3학년으로 재학하고 있던 황진남은 “애국하는 충심이 극도에 달하여, 무슨 방면으로든지 나랏일에 한 부분을 돕고자 하여 자원 퇴학하고, 현금 캘리포니아주 각처에 다니며 각 교회와 사회를 심방하며 (독립운동을 위한) 유세”를 하였다.(신한민보 1919.3.22.)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1919년 3월 15일에 재류동포 전체대표회를 열고 안창호 중앙총회장을 재미한인의 대표로 선정하고, 황진남과 정인과를 통신원으로 임명하여 중국 상하이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황진남은 4월 2일 안창호, 정인과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해 5월 25일에 상하이에 도착했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성립되고, 13일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법을 제정하여 의원들을 선거하도록 하였다. 안창호는 이미 내무총장으로 선임되어 있었고, 황진남과 정인과는 미국령 대의사로 선출되었다. 황진남은 안창호의 비서로서 그를 도왔으며, 영문에 능숙하여 중국 현지 영자신문 등에 일제의 조선통치 실상을 알리는 영문선전의 문서를 작성하였다. 1920년 2월 임시의정원 상임위원회 제5과(교통)의 상임위원이 되었다. 그해 3월 상하이 지역 신문에 3·1운동과 임시정부의 활동을 폄훼하는 기사가 나돌자 『노스차이나 데일리 뉴스』(영문) 3월 16일자에 조선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리는 반박기사를 자신의 명의로 실었다.
1920년 6월 미국의원 시찰단이 아시아 각국을 순행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안창호는 미국의원단을 상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기로 하였다. 안창호는 미국의원단을 직접 영접하기 위 해 영어에 능통한 황진남을 대동하고 필리핀으로 가기로 하였다. 안창호와 황진남은 마닐라까지 가서 미국의원단을 맞으려고 하였으나, 필리핀에 갈 수 있는 여권을 얻지 못하여 홍콩으로 갔다. 그런데 미국의원단이 탄 배가 풍랑으로 인하여 홍콩을 경유하지 않고 상하이로 직항하여 만나지 못하였다.
8월 8일 황진남은 상하이의 대동여사에서 개최된 유학생 주최 미국의원단 환영회에 참석하였다. 황진남은 여운형과 함께 8월 16일 미국 하원의원 쵸스타를 방문하고 일본의 조선지배 실상을 설명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 등 제반 문서를 제공하였다. 17~20일 스몰, 캠프, 하디 하원의원 등을 만나 조선 독립을 적극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같은 외교활동으로 황진남은 9월 29일 임시정부 외무부 참사(參事)에 임명되었다.
3. 베를린·파리 유학시절과 해방 후 정치활동
황진남은 1921년 2월 17일 임병직과 함께 상하이를 출발하여 프랑스배 아토란츠크호를 타고 유럽으로 향하였다. 황진남은 3월 28일 프랑스의 마르세이유항에 도착하였고, 30일 파리로 가서 파리위원부로 갔다. 그는 원래 파리에서 런던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가려고 했지만, 5월 18일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대학에 입학하여 철학을 전공했다. 베를린대학 재학시 아인슈타인과 상대성이론에 관한 두 에세이를 동아일보에 기고했던 것이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이 무고한 조선인들을 대량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동양미술을 전공한 부르크하르트 박사가 『보시쉐 자이퉁(Vossiche Zeitung)』 1923년 10월 9일자에, 「한인에 대한 대량학살」이라는 제목으로 그가 관동대지진 현장에서 직접 목도한 바를 게재하였다. 이를 본 독일 유학생 황진남과 고일청은 10월 18일 부르크하르트 박사를 찾아가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의 조선인에 대한 학살문제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독일 유학 시절 황진남은 부모의 학자금 지원 없이 고학(苦學)으로 학업을 이어갔다. 신한민보에는 독일 유학생들의 고생담이 여러 차례 실렸는데 1924년 2월 21일자에 “(황진남 씨가) 벌써 수중에 돈 한 푼 없이 된 지가 오래되었는데 여지껏 이렁저렁 매일 검은 브레드 한 개와 찬물 한 그릇으로 겨우 연명이나 하여 왔으나 그것이나마 이제는 더 얻어먹을 수가 없다”고 그의 절박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독일에서 학업을 마친 황진남은 1925년경 다시 프랑스 파리로 가서 소르본대학에 입학하여 수리학(數理學)을 전공하였다. 파리에서 유학하던 시절 그는 ‘시몬흥’이라는 프랑스 여성과 결혼하였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1938년 9월 귀국하여 고향 함흥에서 프랑스인 부인과 함께 살았다. 1944 년에 신설된 함흥의학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부인 시몬흥과 관련하여 조선일보의 애잔한 단신 기사(1940년 6월 16일자)가 있다. 1940년 6월 13일 독일군이 프랑스에 맹공을 퍼부어 마침내 14일 수도 파리에 입성하였다. 이를 계기로 기자는 조선에 유일한 파리셴(파리 토박이 여성) 시몬흥을 방문해 그녀의 소회를 들어 보기로 했다. 시몬흥(당년 19세)은 “파리에서 나서 파리에서 양친을 모시고 소학교를 마치고 황진남 씨를 따라서 재작년 9월에 조선으로 나왔다.” 6월 14일 오후 2시 기자는 함흥부(咸興府) 황금정(黃金町) 4정목(丁目)에 위치한 황진남 씨 자택을 찾았다. 마침 황진남 씨는 외출중이어서 조선옷을 입고 있는 아리따운 프랑스 여성과 손짓 발짓을 해가며 단순한 대화를 나눴다. 조선에 대한 감상, 조선옷이 양장보다 맘에 드는지, 조선음식이 본인 입맛에 맞는지 등등이다. 3시 정각이 되자 황진남 씨가 돌아왔다. 기자는 “황씨를 통역으로 내세우고서 부인과 황씨의 파리 함락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보고 국제애(國際愛)에 사로잡혀 있는 이국의 젊은 여성으로 하여금 고국의 운명을 걱정하게 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그 집을 나왔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황진남은 서울로 이주하여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동맹에 가 입하고 여운형의 영문비서로서 항상 지근거리에서 여운형을 보좌하였다. 여운형과는 상해 임정 시절에 외교분야에서 함께 일하여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고,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임시정부’ 수립이란 여운형의 건국 방략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황진남은 해방 직후부터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의 비극적인 피살시까지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조선인민당, 근로인민당으로 이어지는 여운형의 정치적 행보를 뒤따랐다.
정치적으로 비중 있게 활동한 것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에서였다. 미군정의 지원하에 1946년 10월 민선의원 45명을 간접선거로 선출하고 관선의원 45명을 하지 중장이 임명했다. 1946년 12월 12일 한민당 출신 의원의 등원 거부로 인해 전체 57명의 의원이 개원하였다. 김규식이 의장에 당선되었고 외무국방위원장에 황진남(관선)이 선출되었다. 개원일부터 1948년 5월 해산 때까지 〈남조선과도입법의원법〉, 〈하곡수집법〉, 〈미성년자노동보호법〉,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 〈조선임시약헌(朝鮮臨時約憲)〉 등 11건의 중요 법률을 공포하였다.
황진남은 1948년 3월 9일 총선거실시 요청안 상정에 관련해 “단독정부 수립을 요청하는 의원이 원내에 과반수를 차지하는 이상 우리들의 정의를 수호할 수 없어 사퇴한다”는 이유로 20명의 의원과 함께 사임서를 제출하였고, 3월 18일 본회의에서 수리되자 입법의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입법의원 사직 후, 황진남은 그해 5·10 총선거 국회의원 입후보를 비롯한 어떠한 정치활동도 하지 않았으리라 추정된다.
황진남은 이상의 정치활동 외에도 1947년 8월 민영찬과 함께 조선과 프랑스의 국제친선을 꾀하여 문화 부문의 교류 발전을 도모하고자 조불문화협회(朝佛文化協會)를 발족하고, 첫 사업으로 서울 을지로에 프랑스어강습회를 개설하였다. 1948년에는 신기언과 함께 제임스 번즈가 쓴 <미소외교비사 : 포츠담 얄타 모스크바회의에 관한 솔직한 나의 고백>을 을유문화사에서 번역 출간했다.
이후 주한미국대사관에서 번역과 통역 일을 맡아보았고,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육군성 소속으로 일본 도쿄로 가서 유엔군총사령부방송(VUNC)에서 한국어 선전방송을 하였다. 1958년 VUNC가 오키나와로 이전하자 함께 따라가서 대북 선전방송을 계속했다. 1970년 5월 13일 사망하였다. 고인의 유해가 그해 6월 13일 김포공항에 도착했고 서울 용산 미8군 내에 보관했다가 6월 15일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위치한 기독교공원묘지에 묻혔다. 정부는 2019년에 고인께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원로 아나운서 위진록 씨의 회고록2에 따르면, 프랑스인 아내 시몬흥과 어린아들 황만생은 전쟁통에 북한군에 체포되어 북한과 시베리아로 끌려다니며 생이별하고 말았다. 부인은 천신만고 끝에 프랑스 정부의 보호를 받아 고국으로 돌아간 뒤 파리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재가했다. 아들 황만생은 고아원에 수용되기 직전에 구출되어 황진남 지사와 오키나와에서 같이 살다가 캐나다로 보내졌다고 한다.
[참고문헌]
김성연, 「1920년대 초 식민지 조선의 아인슈타인 전기와 상대성이론 수용 양상」, 『역사문제연구』 통권 27호, 2012
김재영, 「일제강점기 조선과 아인슈타인의 조우」, 『철학·사상·문화』 35, 2021
김영희, 「한국전쟁 기간 미국의 대한(對韓) 방송활동: VOA 한국어방송과 VUNC를 중심으로」,『한국언론학보』 53권 2호, 2009
위진록, 『고향이 어디십니까?』, 모노폴리, 2013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25권, 2020
조준희, 「파묘될 위기 처한 애국지사 황진남 선생 묘소」, 『통일뉴스』 2021.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