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식민지의 번화가를 밝히던 영란등(鈴蘭燈), 금속물 공출로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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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아흔 번째

식민지의 번화가를 밝히던 영란등(鈴蘭燈), 금속물 공출로 사라지다
파고다공원의 철대문과 조선총독부 청사의 철책도 그 대열에 포함

이순우 책임연구원

별들~이 소근~대~는 홍콩의 밤~거~~리
나는야 꿈을 꾸며 꽃~파는 아가~~씨

이것은 가수 금사향(琴絲響; 1929~2018)의 빅히트곡인 「홍콩(香港) 아가씨」 노래의 첫 소절이다. 그렇다면 이 홍콩 아가씨가 파는 꽃의 이름은 무엇일까? 이 노래의 뒷부분을 조금만 더 흥얼거리면 그 정답이 “영란꽃”이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저절로 알 수 있다.

백합과(百合科)에 속하는 식물인 영란(鈴蘭, 스즈란)은 필시 그 꽃의 생김새가 글자 그대로 방울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테고, 그러한 탓인지 지금은 대개 ‘은방울꽃’으로 통용되고있다. 『동아일보』 1933년 4월 3일자에 수록된 「꽃도 보고 약으로도 쓰는 약초에 대한 상식 몇가지, 가정주부들의 유의할 일」 제하의 기사에는 경성약학전문학교(京城藥學專門學校)에서 열린 ‘약용식물전시회(藥用植物展示會)’와 관련한 내용을 소개하는 가운데 이 꽃의 특성과 별칭(別稱)이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1) 비비추 : 영란(鈴蘭), 군영초(群影草)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화초 좋아하는 이는 항용 ‘방울꽃’이라 하거나 혹은 일본말로 ‘스즈랑’이라면 더 잘 압니다. 이것은 북한산(北漢山)에 자연생이 많고 또 여학생의 책상 우에도 많습니다. 일반으로 이 꽃은 관상용(觀賞用)으로만 알지마는 달여 먹으면 지금 의학계에서 유일한 심장병 특효약으로 치는 ‘지기다리스’ 엽침제(葉浸劑)에 다음가는 강심제(强心劑)입니다.

더구나 이 꽃은 일찍이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淑明女子高等普通學校)의 교가(校歌)와 교표(校標)에 나란히 등장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 1935년 2월 14일자에 실린 「[교문(校門)을 나서는 재원(才媛)을 찾아서, 중등편 (1)] 숙명여고보(淑明女高普), 단아하고 향내 좋은 색시꽃을 만들 때 처녀들의 앞길은 한없이 빛난다」 제하의 탐방기사에는 ‘색 시꽃’이라는 명칭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 ‘숙명’이라고 하면 벌써 누구나 색시꽃(鈴蘭)을 연상하고 따라서 색시꽃 그대로 기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과연 색시처럼 얌전하고 색시꽃처럼 머리만 숙이고 있는 것이 색시꽃의 특색은 아닙니다. 담박하고도 고결하고 숨어 있으면서 어디서 나는지 알지 못하는 향내를 내는 것이 색시꽃의 특징이오, 사람들이 사랑하는 점입니다. 교기(校旗)에도 색시꽃, 교가에도 색시꽃, 여러 학생을 색시꽃대로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이 그 학교의 목적이랍니다.

그런데 식민지의 수도 경성, 그것도 불야성(不夜城)을 이룬 번화가의 밤을 밝히는 존재 역시 영란꽃이었다. 1924년에 일본 교토 테라마치(京都 寺町)의 거리에 처음 등장했다는 ‘영란꽃’ 모양의 가로등(街路燈)인 이른바 ‘영란등(鈴蘭燈, 스즈란토)’이 조선에도 건너와 여러 지방의 밤거리에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서울의 거리에는 이러한 영란등이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가 궁금하여 관련자료를 뒤져보았더니, 『경성일보』 1928년 10월 9일자에 수록된 「본정 입구(本町 入口)에 스즈란등(スズラン燈, 어대전기념(御大典記念)으로 설치」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경성의 명물(名物) 혼부라(本ブラ)의 입구 본정(本町, 혼마치) 1정목, 정내(町內)에서는 어대례기념(御大禮記念)으로서 이 무렵부터 각헌별(各軒別) 10칸(間; 1칸=1.818미터) 간격으로 녹색(綠色)으로 칠한 미려(美麗)한 스즈란 촉광등(スズラン 燭光燈)을 건설하여, 10일 시등(試燈)을 시도, 드디어 11일부터 일제히 등화(燈火)하여 명물인 혼부라에 일색채(一色彩)를 더하게 되었다. 혼부라당(本ブラ黨)에게는 비상(非常)한 기쁨으로 환영받고 있는데, 누구라도 정내 각호(町內各戶)는 20원(圓)씩 출자하고 보조(補助)는 정내조합비(町內組合費)로써 약 7천 원의 거비(巨費)를 던져 43본(本)을 세우는 것 외에 본정 입구(本町 入口) 시노사키문구점(篠崎文具店)과 우편국(郵便局)에 걸쳐 미장(美裝)한 아치(ア-チ)를 세우기로 되어 있으며 …… 스즈란등은 백촉광(百燭光) 1개(個) 외에 20촉광 4개를 점등(點燈)하는 것으로 되었다.

여기에 거듭하여 나오는 ‘혼부라’라는 말은 그 시절의 유행어이기도 했던 ‘긴부라(銀ブラ)’에서 따온 것이다. 일본어에 ‘부라부라(ぶらぶら)’는 “어슬렁어슬렁”하거나 “빈둥빈둥”거리는 모습을 나타내므로 ‘긴부라’는 곧 “일본의 최대 번화가인 ‘은좌통(銀座通り, 긴자도리)’를 쏘다니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인 셈이다. 이러한 표현에 빗대어 ‘경성의 혼마치 거리를 쏘다니는 것’을 ‘혼부라’라고 하며, 이런 행위를 즐겨하는 이들을 일컬어 바로 ‘혼부라당(本ブラ黨)’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대전’ 또는 ‘어대례’라는 표현은 이른바 ‘소화천황(昭和天皇)’의 즉위예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행사는 1928년 11월 10일에 거행되었다. 그러니까 혼마치 입구에 줄지어 등장한 스즈란등은 이 당시 천황의 즉위식을 기념하는 뜻에서 세워진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여기에 더하여 ‘본정 2정목’ 쪽에도 추가로 스즈란등이 배치된 것이 1934년의 일이었는데, 『조선신문』 1934년 8월 2일자에 수록된 「영란등(鈴蘭燈)의 기념(記念)」 제하의 사진설명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다

본정 2정목 서부번영회(西部繁榮會)에서는 다년(多年)의 현안(懸案)이던 영란등이 준공되었으므로 1일부터 기념대매출(記念大賣出)을 개시하여 오후 5시부터 관계관민(關係官民)을 혼비루(本ビル; 빌딩) 누상(樓上)에 초대하여 성연(盛宴)을 베푼 것과 더불어 회원(會員)은 결속하여 ‘밝은 거리, 사기 좋은 가게’를 모토(モット-)로 득의양양하게 대봉사(大奉仕)를 하는 의기(意氣)가 넘친다고. (사진은 오늘)

그런데 이처럼 식민지 조선의 번화가를 화려하게 밝히던 영란등은 불과 15년에 세월을 넘기지 못하고 그 수명을 다하는 상태에 이르고 만다. 전시체제기의 끝자락을 향해가던 상황에서 부족해진 군수물자의 조달을 위해 1941년 10월 1일 이후 이른바 ‘금속류 회수령(金屬類回收令)’이 본격 적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42년 3월 20일자에 수록된 「서울 밤의 풍물시(風物詩), 영란등(鈴蘭燈)도 응소(應召), 철회수(鐵回收)의 국책(國策)에 따라 금일(今日)부터 철수(撤收)」 제하의 기사에 이렇게 채록되어 있다.

서울의 거리에 황혼이 찾아오면 별빛보다도 더 찬란히 피어나서 저녁의 산책꾼들에게 그지없는 도회의 정서를 엮어 아름다운 풍물시(風物詩)를 읊어주던 ‘스스란(鈴蘭燈)’의 등불이 밀려드는 시국의 물결을 타고 영예의 응소가 되어 출정하게 되었는데 봄 가을 여름 겨울 사시장철 변함없이 이 거리의 사람들에게 정들어오던 ‘스스란’ 등이 하직을 하고 응소되어 가는 날은 오늘 20일부터 30일까지 사이에 일제히 그림자를 감추기로 된 것이다. 회수일과 장소는 다음과 같은데 회수되는 시각은 매일 오후 열 시부터여서 갈림의 눈동자인양 마지막 불빛을 돋운 채 사라지게 되었다.
경성전기회사에서는 이 ‘스스란’등을 철거해 가기 전에 전선(電線), 전구(電球)를 미리 설비하여 거리를 변함없이 불야의 성으로 밝게 하기로 되었는데 당분간은 ‘스스란’등을 떼어버린 후에라도 그대로 두기로 되어 있다. 그리고 회수된 물건의 수량과 금액은 정연맹(町聯盟) 이사장이 명확히 해두고 대금요 관계 책임자가 저축에 두었다가 장래에 설치할 때 시설비로서 충당케 하기로 되어 있다.

이에 따라 각 가정에서는 “가정광산(家庭鑛山)을 파내자”라거나 “가정광맥(家庭鑛脈)을 발굴하자”라고 하여 유기(鍮器, 놋그릇)와 같은 생활도구는 물론이고 철제 광고판, 화로, 재떨이, 파손 농기구 따위의 쇠붙이를 포함한 각종 금속물을 공출(供出)하도록 독려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길거리와 공공장소에서는 동상(銅像)이라든가 우편통(郵便筒, 우체통)이 속속 사라지고, 전쟁무기를 만들 원재료가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이 대열에 포함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행(朝鮮銀行)의 간판(看板), 철문(鐵門), 철책(鐵柵), 철쇄(鐵鎖) 등 20톤(噸)에 달하는 금속물이 수거되었으며, 조선총독부 신청사의 쇠창살이 먼저 떼어지고 건물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던 철책도 일괄 철거되어 그 자리는 석원(石垣, 돌담장)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이밖에 대화정(大和町, 지금의 필동)에 자리한 정무총감관저(政務總監官邸)의 철대문도 금속물 공출로 인해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리고 3.1만세운동 당시에 독립의 함성과 만세군중의 행렬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탑골공원(塔洞公園, 파고다공원)의 철대문이 금속물회수의 제물이 되어 사라진 것 역시 이때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금속물 공출 또는 헌납에 관한 얘기를 꺼내놓고 보니, 다음의 몇 가지 신문기사에 드러낸 내용도 추가로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앞의 것은 『경성일보』 1943년 4월 2일자에 수록된 「철비(鐵扉, 쇠문짝)를 탄환(彈丸)으로, 진유(眞鍮)도 마차(馬車)에 실어서」 제하의 기사이고, 뒤의 것은 『매일신보』 1944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예복(禮服)과 칼 두 자루 헌납(獻納)」 제하의 기사이다.

(1) 보성전문학교장(普成專門學校長) 김성수 씨(金性洙氏)는 16년 전부터 계동정(桂洞町)의 자택을 지키고 있던 철대 문(120관) 3매(枚)를 탄환(彈丸)으로 만들어 나라를 지키게 해달라고 1일 오후 해군무관부(海軍武官府)에 헌납(獻納), 더욱이 마차(馬車) 1대(台)의 진유(眞鍮), 동제(銅製)의 식기류(⻝器類)도 개인(個人)으로서 동시에 헌납했다.

(2) 중추원 부의장 박중양(朴重陽) 씨는 대동아전쟁 이래 솔선하여 집에서 가지고 있는 유기를 모조리 헌납하였는데 전국의 긴박을 절실히 느낀 씨는 마지막으로 씨가 한국(韓國) 시대 때 착용하였던 대관의례복과 놋단추와 진유로 장식을 한 칼 두 자루를 12일 해군무관부에 헌납하였다. (사진은 박중양 씨의 예복)

이들이 헌납한 금속물이 향한 곳은 모두 동일하게 ‘해군무관부(海軍武官府)’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이곳은 병참기지로서 조선의 해안선 경비 또는 출사준비(出師準備), 해군사상의 보급, 해군을 위한 헌금(국방헌금, 비행기, 금속물 헌납 등)의 취급과 같은 업무를 수행하던 군사조직이었다. 여기에 나오듯이 김성수와 박중양의 사례를 보면 일제의 식민지배체제를 지탱하는 힘이 비단 그들의 무력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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