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30년 만에 되살린 사도광산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한일시민의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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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광산 현지조사 보고]

30년 만에 되살린 사도광산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한일시민의 연대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한일관계를 둘러싼 핵심적인 의제로 떠오른 강제동원과 관련한 문제에는 2018년 대법원판결의 이행 문제 이외에도 야스쿠니신사 한국인 합사철폐 문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봉환 문제, 강제동원 관련 기록 확보 등의 문제와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시설에서 강제동원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문제가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5년 ‘군함도’로 잘 알려진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유산’의 등재 당시부터 일본의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와 함께 유네스코 산업유산에 강제동원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할 것을 일본 정부에 지속해서 요구해 왔다. 2015년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당시 일본 정부는 한국인, 중국인, 연합군 포로 등이 고통을 당한 강제동원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하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지만, 아직도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202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본 정부에 대해 강한 유감을 밝히고 개선을 촉구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강제동원의 역사를 숨기려는 일본 정부에 압박을 가해 강제동원의 진실을 밝히려는 한일 시민들의 연대는 날로 힘을 더해가고 있다.

2022년 일본 정부는 니가타현에 있는 ‘사도 섬의 금산’을 세계유산 후보로 추천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세계유산의 추천 시기를 에도시기의 금 생산으로 한정하여 사도 광산의 역사 전체를 제시하지 않고, 에도 시대의 일본 민중의 강제노동, 일본의 침략전쟁 당시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도 숨기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본의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와 함께 실시한 사도 현지 조사를 바탕으로 2022년 10월 『한일시민공동조사보고서: 사도광산과 조선인 강제노동』을 펴낸 바 있다. 이 보고서에는 사도광산 조선인 강제노동의 실태를 밝히는 일본의 사료와 한국인 피해자들의 구체적인 기록이 함께 실렸다(관련기사: <한겨레> 사도광산 근무 일본인 “강제동원은 사실”…한·일 시민이 밝혔다.)

보고서의 발간을 위해 연구소는 사도광산 피해 생존자와 유족을 찾아 증언을 들었으며 지난 4월 사도광산의 강제동원을 주제로 한 영상 제작을 위해 다시 사도섬을 방문했다. 1990년대 초반 사도 현지 주민들과 재일조선인들이 강제동원의 실태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해 온 진상규명 운동의 성과를 30여 년 만에 되살려 이어가기 위한 역사적인 첫 발걸음을 뗀 것이다.

사도 현지 조사를 위해 연구소는 3월과 4월 두 차례에 걸쳐 사전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충남 논산, 청양, 공주, 전북 익산 등 사도로 동원된 피해자들이 집중적으로 살던 지역에서 강제동원 피해자의 유족들을 찾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1990년대에 사도를 직접 찾았던 피해자들이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분들의 유족을 찾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30년 전의 기록을 손에 들고 마을회관으로 면사무소로 발로 뛰며 수소문 끝에 들판에서 땀 흘리며 일하고 있는 유족들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무엇보다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다.

2023년 4월 20일부터 23일까지 사도를 찾은 연구소 조사단과 영상제작팀은 구술조사 과정에서 만난 사도광산 강제동원 피해자의 유족 정운진 님 부부를 모시고 갔다. 정운진 님의 아버님 정쌍동 님은 사도박물관에 보관된 「연초배급대장」에 기록이 남아 있는 분인데, 아드님은 아버님의 증언 이외에는 어떠한 기록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사도박물관에서는 원본은 훼손될 우려가 있다며 처음에는 사본만을 보여주었는데, 유족의 강력한 요구를 받고 결국 원본을 공개했다. 아버님의 성함이 적혀 있는 당시의 기록을 처음으로 확인한 정운진 님의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복잡한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조사단은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의 다케우치 야스토 씨의 안내로 사도광산의 갱도, 무덤과 묘비, 취사장, 기숙사 터 등을 둘러보았다. 80년 전 아버지가 끌려와 강제노동에 시달렸을 그 길을 아버지의 사진을 품에 안고 함께 걸었다. 정운진 님은 아버지의 한과 고통, 그리움과 설움이 한꺼번에 느껴졌던 시간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4월 22일에는 사도 현지에서 “한국·강제동원 증언과 교류 모임”이 열렸다. 이 집회는 1990년대 초반에 활발히 이루어지다가 중단된 강제동원 진상규명의 노력을 오늘에 다시 되살리고자 연구소와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그리고 사도 주민들이 연대하여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다케우치 야스토 씨와 연구소의 김승은 학예실장이 사도광산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연구성과를 발표했고, 정운진 님께서 아버지의 강제동원 피해에 대해 증언했다. 70여 명의 주민이 함께한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사도광산에서 있었던 강제동원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는 것만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와 일치한다는 데에 뜻을 모았다. 사도광산의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한일 시민의 연대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함께보기 증언 – 사도광산에 강제동원된 아버지(정운진)

저는 사도광산에 강제동원 된 정쌍동(鄭雙童) 씨의 셋째 아들 정운진이라고 합니다. 아버지 정쌍동 씨는 1905년 전라북도 익산군에서 태어났습니다. 5대 독자였던 아버지는 일가친척도 없이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일을 하던 집안의 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30대 후반에 연로한 부모님과 아내, 어린 딸과 갓 태어난 아들을 두고 사도광산에 끌려가야 했습니다. 마을에서 동원 대상으로 2명이 할당되었지만 다들 가기를 꺼려하자 제비뽑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같은 마을 이재화(李在花) 씨와 우리 아버지가 뽑혀 억지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때 하나뿐인 아들을 ‘사지’로 보내며 안타까워하던 조부모님의 모습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가슴 아파했다고 합니다. 큰 형님이 1941년 12월에 태어났는데, 돌 지나고 아버지가 가셔서 한 2년 정도 계셨다고 하니 1943년경에 끌려가신 것 같습니다.

집에 남겨진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남의 집 일을 하면서 시부모님을 모시는 데 정성을 다해서 동네에서는 효부로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어머니가 일을 하신 대가로 밥을 얻으면 자신은 끼니를 굶더라도 안드시고 그대로 가지고 와서 시부모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남겨진 가족들은 매일매일 끼니를 이어가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동네에서는 효부라고 칭송을 했다지만 남편도 없이 시부모님과 자식들을 길러내기 위해 고생했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저는 아버지가 귀국하신 뒤 1952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언제 어떻게 끌려가셨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다행히 아버지는 건강에 큰 문제없이 돌아오셨지만, 같이 끌려 가셨던 이재화 씨는 후유증으로 건강이 몹시 나빠 고생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늦둥이였던 저를 무척이나 귀여워하셨습니다. 다른 형제들 보다 아버지와 대화가 많았지만 그래도 사도광산에서 겪으셨던 고초에 대해서는 많이 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사도섬에 다녀왔다, 구리캐는 일을 했다, 동광(銅鑛)이었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은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자주 하셨던 이야기는 먹을 것과 배고픔에 관한 것입니다. 사도광산에서 한 고생 중에 배고픔이 가장 큰 고통이었기 때문에 먹을 것에 관한 기억이 가장 선명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중에 돈이라도 있으면 뭐라도 사먹었을 텐데 그럴 형편도 안 되었던 것 같습니다. 평소에도 늘 배가 고팠지만, 일을 쉬는 날에는 그나마 일손을 도와주고 먹을 것을 얻어먹을 계획으로 인근 농가를 찾아 갔더랍니다. 그랬더니 그 농가 주인이 먼저 밥부터 먹으라고 해서 정신없이 먹었는데 나중에 배가 불러 일도 못하고 돌아왔다고, 그 주인에게 미안했는지 그때 기억이 안 지워진다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염치없음을 부끄러워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기꺼이 식사를 베푼 일본인 농가 주인에게 허겁지겁 배만 채운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곳에 강제로 끌려가 제대로 대접을 받지도 못하는 강제노역을 했으면서도 아버지는 자신에게 보인 일본 농민의 호의에 보답하지 못했음을 오래 기억하셨던 겁니다.

또 한편 아버지가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들에게 겪은 지울 수 없는 기억도 얘기해 주셨습니다. 제 고향 익산은 호남의 곡창지대와 맞붙은 평야 지대입니다. 김제·만경 평야 일대에서 수확한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갔던 군산의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군산 일대에는 일본인 대지주의 농장들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품삯이라도 벌기 위해 일본인 농장에서 제방을 쌓는 일 등을 다녔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이 주관하는 공사에 투입된 조선인들은 함부로 취급받기 일쑤였고, 뺨을 맞는 일도 예사였답니다. 그런 굴욕을 참고 묵묵히 일을 해내야 일감을 얻고 품삯을 받을 수 있던 겁니다.

그렇게 우리 아버지와 같이 많은 식민지 조선인들은 일제 식민지배 아래서 고생을 하다가 강제동원 되어서 갖은 고초를 겪었지만 정작 이를 증명할 기록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다만 작업복을 입은 모습의 사진 한 장만 남아 있습니다. 그 사진은 집에서 걱정할 노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해 사도광산에서 보내오던 편지와 함께 부친 사진이 아닐까 저는 짐작만 할 뿐입니다.

2005년 한국 정부가 설립한 기구인 일제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 강제동원 피해신고를 할 때도 명부 하나 없이 강제동원 피해 사실을 입증하려니 막막했습니다. 아버지가 사도 섬에 다녀오신 것이 사실인데, 억울하게 일본에 끌려가서 고생하신 것이 사실인데도 이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큰 형님이 아버지의 강제동원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고향마을에 직접 찾아갔습니다. 고향 마을에 가서 아버지 보다는 1살 적지만 당시 가장 나이 많은 어르신을 찾아뵙고 아버지가 일본에 징용을 갔다 오신 것이 사실이라는 인우보증서를 작성해 제출했습니다. 저라도 아버지 생전에 조금 더 자세히 여쭙고 상세히 기록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고, 아버지가 겪으신 피해를 제대로 규명조차 못해 드린 것이 불효인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이 잘못한 행위는 용서할 수 있을지언정 결코 잊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과거사는 낱낱이 파헤쳐 그 진상을 사실대로 규명하여 다시는 이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2020년부터 시작한 증언 채록 사업에 참여하겠다고 회신을 했습니다. 게다가 일본이 아직까지도 잘못한 것을 사과하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유네스코에 사도광산을 등재한다는 것을 들으니 더욱더 잘못한 사실을 제대로 밝히고 기록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 졌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는데, 여기 여러 연구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또 일본에서 이런 활동을 하는 분들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반갑고 고마운 것은 그렇게 간절하게 바라던 아버지의 기록을 찾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다케우치 야스토 선생님이 「연초배급명부」에서 아버지 이름을 찾아 주신 것입니다. 명부라며 건네받은 문서 한 장에 아버지 이름이 쓰여 있었지만 처음 보는 창씨명에 아버지라는 실감이 잘 나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소망했던 아버지의 기록이 일본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우리 아버지와 같은 조선인들의 강제동원 피해를 밝히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 인연이 저를 이렇게 아버지가 강제노동 하셨던 사도섬까지 이끌게 되었습니다.

30여 년 전에도 사도와 니가타 시민들이 한국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찾아 방문하고, 그 증언을 기록하고 이를 입증할 진상조사를 펼쳤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듣게 되었습니다. 3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도의 「명부」와 한국의 피해 유족들은 만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다시 우리 아버지의 기록 찾기로 잇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제 아버지 뿐 아니라 사도광산에 동원된 모든 이들의 기록이 유족들에게 온전히 전달되어 제 부모의 아픈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모두가 한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시는 모습에 진심으로 감동했고, 감사드리며 그 힘든 노고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의 이런 만남과 인연이 후세에게는 반드시 마음에 새길 교훈이 되리라 믿습니다. 저 또한 오늘 만난 모든 분들의 마음을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추신 : 정운진 님은 사도방문 직후 지병 악화로 5월 16일 별세하셨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런 이별로 큰 마음의 상처를 입으셨을 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사도까지 방문한 그의 마지막 행로를 기리며 연구소는 그 마음을 이어 계속 실천해 나가겠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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