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고종황제 강제퇴위와 의병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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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글방 5]

고종황제 강제퇴위와 의병전쟁

심철기 연구실장

1. 고종황제 강제퇴위 반대운동

1907년 8월 1일 서울 주둔 시위대 군인들의 봉기가 의병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지만 그 시작은 헤이그특사사건의 처리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은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하여 식민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는 『통감부문서』 5권에 수록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1907년 7월 3일 하야시 외무대신에게 보낸 전보에 잘 나타나 있다.

과연 칙명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우리 정부도 이때 대한제국에 대해 국면을 일변케 하는 행동을 취할 수 있는 호기라고 믿는다. 이전 음모가 확실해지는 즉시 세권(稅權), 병권(兵權) 또는 재판권을 우리가 거두는 데 있어 좋은 기회를 주는 것으로 인식한다.

즉, 헤이그특사사건을 이용하여 대한제국의 조세권, 군권, 재판권마저 빼앗고자 하였다.

일본내각도 내각회의에서 「헤이그밀사사건처리방침」을 결정하여 1907년 7월 12일 이토 통감에게 타전하였다. 그 내용은 『고종시대사』 6권에 수록되어 있는데, “일본정부(日本政府)는 이번 헤이그밀사사건을 기회로 한국내정(韓國內政)에 관한 전권(全權)을 장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이의 실천방법으로서 첫째 한국황제(韓國皇帝)로 하여금 황태자(皇太子)에게 양위(讓位)하게 할 것, 둘째 한국정부의 행정은 통감(統監)의 동의를 얻어 실행하게 할 것, 셋째 대신(大臣)·차관(次官) 이하 중요 관리를 일본인으로 임명하거나 또는 통감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게 할 것 등”이었다.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통감 주도하에 일본인 관리를 임명하는 차관정치를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이토 통감은 고종황제의 양위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직접 나서 양위문제를 제기할 경우 여론의 비난을 피할 수 없기에 대한제국 내각에서 스스로 결정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이 문제를 대한제국 내각에서 논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임선준, 농공상부대신 송병준, 법부대신 조중응, 학부대신 이재곤, 탁지부대신 고영희, 군부대신 이병무 등은 비상내각회의를 개최하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박은식의 『한국통사』, 『고종시대사』 등에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송병준이 “폐하께옵서 두 가지 방침이 있으니 하나는 친히 일본에 건너가서 일황에게 사죄하고 황태자 교육시켜 주기를 요구하며, 둘은 하세가와에게 사죄하옵소서. 만일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전쟁을 일으킬 듯 하오니”라고 고종을 협박하였다. 또한 이완용 등은 이 상황을 수습할 방책으로

첫째, 광무 9년 11월 17일에 체결한 한일신조약(韓日新條約)에 어새(御璽)를 눌러 이를 추인할 것
둘째, 섭정(攝政)을 둘 것
셋째, 황제가 친히 일본으로 가서 일본황제(日本皇帝)에게 사과할 것

을 고종에게 요구하였다. 이들은 마치 이토 통감을 대신해서 추궁하는 모습이었고, 이 기회를 통해 을사늑약을 합법화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일본의 요구대로 황제를 퇴위시키고 나아가 일본에 사죄하게 만들어 그 권위를 떨어트리고자 하였다. 고종은 이들의 요구를 거부하였지만 계속된 협박에 결국 “군국(軍國)의 대사(大事)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代理)하게 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이는 정사만 황태자에게 대리한다는 것이었지만 일본은 이를 의도적으로 양위로 해석하였다. 더욱이 같은 날 일본에서 황태자의 황제 즉위 축하 전보가 오자 양위조칙을 내릴 것을 압박하였다. 이와 동시 서울주재영사단(駐在領事團)에 황제 즉위식에서 접견에 관한 통첩접수를 통보함으로써 양위를 기정사실화하였다. 결국 7월 21일 고종을 태황제(太皇帝)의 칭호(稱號)로 올리는 것을 재가(裁可)하고 이를 황태자(皇太子)가 조칙(詔勅)으로 발포(發布)하였다. 또 양위(讓位)를 명확히 하기 위해 연호(年號)도 고칠 것을 재가하였다. 이어 8월 27일 융희황제즉위식이 거행되면서 광무황제 강제퇴위는 마무리되었다.

한편, 일본의 박해로 황제가 강제퇴위 당하고 일본에 유치(誘致)될 것이라든지, 황제의 소재를 알 수 없다는 등 고종에 대한 각종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 외무대신의 방한 소식이 전해지자 고종황제 강제퇴위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이 반대운동에는 동우회를 주축으로 대한자강회, 황성기독교청년회, 문우회(文友會), 개진교육회(開進敎育會) 등 정치세력과 서울의 일반 백성들이 참여하였다.

동우회는 7월 17일 밤 특별회의를 열어 퇴위를 종용하는 대신들을 국적(國賊)이라고 규정하고 강제퇴위 반대운동을 펼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면서 인근 상인 등에게도 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시위는 다음날에도 계속되었는데, 특히, 내각대신들이 황제에게 을사늑약에 어보를 날인할 것, 황태자에게 양위할 것, 일본에 가서 일왕에게 사죄할 것 등을 상주하였다는 내용의 『대한매일신보』 「호외」가 발행되면서 일본과 친일관료에 대한 분노가 한층 더 높아졌다. 그리하여 동우회 회장인 윤이병은 ➀ 통감 및 일본외무대신에게 대한제국 인민의 뜻을 전하고, ➁ 폐하께 정부대신을 주살할 것과 일본 행행(行幸)을 중지할 것을 간청하며, ➂ 종로에서 연설회를 개최하여 공중(公衆)의 인심을 격동케 하자는 안을 결의하였다. 그 결과 국민결사회(國民決死會)를 조직하고 국민결사회 이름 아래 상주문을 올리기로 하였다. 이어 밤 9시경 종로로 모여든 군
중들과 함께 대한문 앞으로 이동하여 시위를 전개하였으나 일본순사대의 제지에 밀려 포덕문(布德門) 앞까지 밀려났다.

7월 19일 새벽 3시경 황제가 양위한다는 비보가 전해지면서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19일 아침부터 시위대는 표훈원(表勳院)에 모여 돌을 던지며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오후에는 종로에 모여 노상 연설 등을 통해 시위를 독려하였다. 당시 일본군이 생산한 기밀문서인 「機統發 제40호」에 수록된 연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전에 국모(國母)를 잃고 지금 또 머지않아 국부(國父)를 잃을 지경에 있다. 국민이 이러한 경우에 처하여 어찌 편안함을 얻을 것인가. 특히 일본순사에 의해 우리들의 행동이 방해받는 것과 같은 일은 도저히 묵시할 수 없는 일이다. 마땅히 국가의 적인 대신을 죽여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 집을 불태워야 한다. 우리 동포는 이러한 결심으로 왕성(王城) 앞에 집합해야 한다.

이는 황제에 대한 강제퇴위가 명성황후시해사건에 버금가는 것으로 황제가 시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인식도 반영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완용 등 친일대신들을 처단하고 그들의 가산을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오후 4시를 지나면서 서울 주둔 대한제국 군인들이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오후 4시 50분경 종로에서 약 218미터 정도 떨어진 시위대(侍衛隊) 제3대대 소속 병사 약 40명이 부대를 둘로 나눠 한 부대는 종로순사파출소를 공격하였고, 다른 한 부대는 전망의 도로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경찰관을 사살하였다. 또 시위대 제2대대 소속 병사들도 병영을 나와 경무청을 공격하였다. 혼성여단사령부 소속 병사들도 함께 경무청을 공격하였으나 장교들의 제지로 영내로 돌아왔다. 이렇게 19일에만 대한제국 군인 100여 명이 참여하여 일본 경부 2명·순사 1명·한국 순검 2명 사살, 경부 1명·순사 9명(이 중 1명은 입원 후 사망) 부상, 일본인 1명 사살·2명 부상의 전과를 거두었다. 대한제국 군인들의 참여는 1907년 의병전쟁 당시 의병부대에 해산군인들이 참여한 것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19일 밤 11시경에는 미동에 위치한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신보사(國民新報社)를 파괴하고 사원을 구타하였으며, 일본인 가옥을 부수고 일본군과 투석전을 감행하였다. 이에 일본군 한국주차군사령부는 추가로 병력을 배치하여 19일 밤 11시 50분부터 새벽 2시 사이에 보병 1개 대대에 기관총 4문을 부여하여 덕수궁 부근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각 병영에 1개 소대만 남기고 보병과 기병은 한국주차군사령부에 집합하고, 포병은 남산 동북 기슭의 화성대(和城臺)에 배치하여 덕수궁 주변을 위협하였다. 이어 평양 주둔 제13사단 소속 보병 1개 대대를 서울로 이동시켰다. 평양에서 1개 대대가 도착한 후 출동했던 일본군은 한국주차군사령부에 1개 중대를, 화성대 부근에 포병 1개 중대를 남기고 숙영지로 귀대하였다.

20일 오전 8시경 동우회 사무소 앞에 모인 약 300명의 회원들은 총리대신 이완용 등 친일대신들의 저택을 소각하기로 결의하였다. 원래는 적신(敵臣)들이라고 하여 처형하고자 하였으나 입궐해 있는 관계로 이들의 집을 소각하기로 한 것이다. 회원들과 일반 시민들은 서소문 밖 이완용의 집을 비롯하여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전 내부대신 이지용, 전 군부대신 이근택, 이근호, 일진회장 등의 집과 별장을 소각하고 일진회 사무소를 공격하였다. 또 황제의 행행을 막기 위해 남대문 및 서대문 두 정거장을 소각해 철도를 파괴하자고 결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일에 황태자대리식(皇太子代理式)이 거행되었다.

황태자대리식 이후 군인들의 시위참여를 우려했던 일본군은 용산에 있는 군기고(軍器庫), 군부(軍部) 내에 있는 탄약고 등을 점령하고, 위병 근무자의 탄약 휴대를 금지시켰다. 이는 실질적인 무장해제에 해당하는 것으로 황제강제퇴위 반대운동에 군인들이 참여한 의병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같은 조치로 함흥에 있던 일본군 13사단 소속의 공병 제13대대 제1중대를 서울로 파견하였다. 또 용산, 임진강, 청천강 등의 철도교에 일본군 감시병을 파견하여 경계근무를 강화하였다.

이와 함께 통감부의 요청으로 규슈(九州) 고쿠라(小倉)에 사령부를 둔 제12사단에서 제12여단을 편성하여 대한제국으로 파견하였다. 제12여단은 여단사령부, 보병 제14연대, 보병 제47연대로 편성되었다. 제12여단의 파견 목적은 “한국소요 때문에 파견하니 명예를 걸고”라고 한 제14연대 연대장의 훈시에서 알 수 있듯이 고종황제강제퇴위 반대운동에 대응하고 나아가 의병전쟁에 대비하고자 한 것이었다.

7월 25일 제12여단은 선발대로 여단사령부와 보병 제14연대의 2개 대대가 출발한 것을 시작으로 27일까지 파병되었다. 이들은 평양에서 서울로 파견된 제13사단 제51연대와 함께 이후 의병탄압 최일선에서 활동하였다.

2. 고종황제강제퇴위 반대운동의 지방 확산

고종황제강제퇴위 반대운동은 지방에서도 일어났다.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은 평양, 개성, 원산, 개항장 등 대도시나 상업중심도시였다. 특히, 평양은 평양 주둔 제13사단 소속의 보병 1개 대대가 7월 19일 밤 서울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는 상황에서 고종황제강제퇴위 반대운동의 분위기가 고양되었다. 이에 20일 주요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고 평양성 안에 있는 종로에 모여 시국에 관해서 분개하는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또 종로에 500여 명과 대동문 밖 100여 명이 일본 경찰을 상대로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지방의 중소도시에서도 황태자 대리조칙이 전해지면서 고종황제강제퇴위 반대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22일 공주에서는 상점이 전부 철시하고 민인들이 각처에 모여들었으며, 양주에서는 기독교 목사 홍태순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하였다. 24일에는 을미의병 당시 안승우 의병부대에 군량미를 제공하며 의병활동을 한 안성청년회장 강태영이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진회 안성사무소를 파괴하였다. 이어 평택에서 열차운행을 저지시키고자 준비하던 중 일본군에 체포되어 수원 서문 밖에서 총살당하였다. 25일에는 통영에서 민인들과 진위대가 연합하여 경무서를 공격하고 일본인 가옥을 파괴하였다. 또한 청주에서 청주진위대 참령 류기원이 자결을 시도하였으며, 민인들은 결사회를 조직하였다. 동래에서도 민인들이 결의하고 고을 무기창에 들어가 소총을 탈취하였다. 대구에서는 상민들이 저자문을 닫고 황제강제퇴위 반대운동에 대해 협의하였으며, 진주에서는 유생 2천여 명이 집회를 열었다. 26일에는 경기 이천군에서 사민(士民) 수백명이 집회를 열어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경남 진남군에서는 진위대와 일본군의 충돌이 있었으며, 진남군민이 진위대와 연합하여 일본인 시설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통영에서도 진위대와 일본군과의 충돌이 있었다. 강원도 원주에서는 7월말경 고종황제강제퇴위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원주의 상황에 대해 강원도관찰사는 내부에 보낸 전보에서 “원주군의 민정이 매우 소요(騷擾)하니 군부에 조회하여 금지케 하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도 첩보를 통해 원주에 황제의 강제퇴위 소식이 전해진 이후 인심이 흉흉하다고 하여 경계를 강화할 것을 주문하였다. 이처럼 각지에서 결사대를 조직하거나 민인들과 진위대가 연합하여 일본군을 공격하는 등 고종황제강제퇴위 반대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3. 서울 주둔 시위대의 봉기

고종황제강제퇴위 반대운동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정미7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그 부속각서로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추진하였다. 군대해산은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며, 대한제국군의 반발에 대비해 일본군을 재배치하였다. 서울은 용산 주둔 보병 3개 중대를 이동 배치하였고, 제13사단에서 파견했던 부산·대구수비대를 제12여단 제3대대 제10중대, 제11중대, 제12중대 병력과 교대하여 이동 배치하였다. 일본군 재배치와 함께 지휘관할권이 조정되었다. 제13사단장은 기존과 달리 서울, 영등포 주둔 부대만 지휘하여 서울 부근 경비만 임하도록 하고, 제12여단장이 남부수비관구 사령관으로 해당 지역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이는 제13사단이 서울의 시위대 해산 및 반발에 대비하고 제12여단은 지방의 진위대 해산과 반발에 대비토록 한 것이었다.

부대배치가 완료된 7월 31일 하세가와 한국주차군사령관은 이완용, 이병무 등과 함께 융희황제를 협박하여 대한제국군을 해산토록 협박하였다. 그리하여 8월 1일 은금(恩金)의 명목으로 80원을 하사하고, 1년 이상 된 병졸에게는 50원을, 1년 미만의 병졸에게는 25원을 주고 해산하는 군대해산 조칙이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군부(軍部), 시종무관부(侍從武官府), 배종무관부(陪從武官府), 영친왕부(英親王府) 무관(武官), 무관학교(武官學校), 근위보병대대를 제외한 대한제국 군대는 해산되었다.

군대해산은 8월 1일 오전 7시 군부대신 이병무가 한국주차군사령관 관저로 대한제국군 각 대대장을 소집하여 해산조칙을 낭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조칙 낭독 후 시위대 병력을 오전 10시까지 도수체조를 한다는 명목으로 훈련원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던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참령이 군대해산에 분개하여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중대장 보병 정위 오의선도 자결하였다. 이에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시위 제2연대 제1대대 병사들이 일제히 봉기하였다.

시위대 병사들이 봉기하자 한국주차군사령부는 일본군 제13사단 51연대 제3대대 병력을 주축으로 공병, 기관총 3문 등을 동원하였다. 시위대와 일본군의 전투는 오전 내내 치열하게 전개되다가 제1연대 제1대대의 탄약이 떨어지면서 점차 줄어들고 결국 시위대의 병영이 점령당하였다. 시위대는 준사관(準士官) 이상 12명, 하사 이하 병사 56명 총 68명이 전사하였고, 부상자는 장교 이하 90명(외국인 선교사 수용 32명 포함)에 이르렀다. 또한 560명이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시위대의 저항은 예상외로 강력한 것이었다. 일본군은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소총탄 7,773발, 기관총탄 1,138발, 황색탄약(메리나이트, 투척용 폭약에 사용한 것) 1,600그램을 소비하였다. 이처럼 시위대가 일본군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전투능력이 일본군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병 소총수 중심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기관총과 폭약 등을 동원한 일본군에 패하고 말았다.

4. 의병전쟁과 서울진공작전

서울 주둔 시위대의 봉기소식은 지방 주둔 진위대에 빠르게 전파되었는데, 강원도 원주 주둔 원주진위대의 봉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원주진위대는 8월 5일 원주 장날에 맞춰 봉기하였는데, 원주진위대의 봉기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이 확산되었다. 또한 원주진위대의 봉기는 진위대와 의병세력의 연합하여 전국 단위의 의병부대를 창설하는 시작점이 되었다. 원주진위대 보관 신식무기들이 그대로 의병부대에 전해지면서 의병부대의 전투력은 매우 강해졌으며, 해산군인과 의병세력의 대규모 연합부대의 창설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 결과 원주진위대 해산군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민긍호 의병부대가 관동창의대에 참여하였다. 또한 관동창의대 대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창의군 창설되었다. 13도창의군은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의병들이 중심이 되었지만 전국을 대표하는 의병부대로 창설되었으며, 서울진공작전을 추진하였다. 서울진공작전은 친일파를 제거하고 통감부를 공격하여 을사늑약 등 굴욕적인 조약을 파기하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11월 25일경 동대문 밖에 집결하여 일시에 공격해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각 의병부대의 집결이 늦어지면서 서울진공 시점이 1908년 정월경으로 늦춰졌다. 의병부대의 집결이 늦어진 것은 관동창의대의 경우와 같이 일본군과 교전하면서 서울로 진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관동창의대는 서울진공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부대를 나눠 양주로 이동하였다. 관동창의대의 각 부대는 원주군 부론면 정산, 횡성군 청일면 동평동으로 이동하였다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원주군 금물산면(현재의 원주시 흥업면), 원주군 강림 부근, 원주군 귀래면 당우동 및 황산동, 귀래면 부론곡, 사기점촌, 능애, 횡성군 고모곡면 원항리, 내둔내면 창촌리, 청일면 공근리, 원주군 부론면, 외정곡면 등지로 이동하였다. 민긍호도 원주군 소초면 일대에 주둔하다가 횡성군 갑천면, 인제군, 양구군, 회양군, 화천군 일대로 이동하였다. 즉 관동창의대 예하 각 부대는 12월까지 강원도 일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관동창의대를 비롯하여 양주 방면으로 진군하던 의병부대는 1월 중순을 지나면서 도성 주변에 속속 도착하였다. 가장 먼저 도착한 부대는 허위의 경기의병이었다. 경기의병은 관동창의대가 도착하기 전인 1월 25일경 약속 장소인 동대문밖 30리 지점에 도착하였으나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였다. 이후 1월 28일 관동창의대를 비롯한 주요 부대가 속속 도착하여 약 2,000명의 의병이 집결하였다. 그러나 서울진공작전을 감행하기 직전 13도창의군 총대장인 이인영 의병장이 부친의 부음을 접하고 모든 권한을 군사장인 허위에게 넘기고 귀향하였다. 결국 서울진공작전은 중단되었고, 아직 집결지에 도착하지 못했던 부대들은 기존 활동지역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경기의병을 중심으로 13도창의군과 서울진공작전이 다시 시도되었다.

서울진공작전 실패 이후 의병전쟁의 방향은 근거지 중심의 소규모 연합의병을 형성하여 유격전을 전개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1908년 2월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했던 김수민 의병부대 등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경기 동북부 지역 연합의병도 그런 경우였다. 이들 연합의병은 연합작전을 수행한 후에는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즉 필요에 따라 주변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일본군을 상대하지만 기본적으로 유격전을 중심으로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의 탄압으로 의병활동이 크게 위축되면서 서울, 경기 일대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는 1908년 후반부터 의병부대의 재편과 의병운동의 새로운 시도가 나타났다. 특히, 서울에 잠입하여 총기, 군수품, 군자금 등을 구입하고자 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김수민 의병장의 활동이 있다. 김수민 의병장은 1909년 3월 20일 밤 서울 북문을 통해 잠입하여 경부(京部) 이화령 앞에 거주하면서 총기, 군수품 등을 구입하였다. 그런데 일본군도 지속적인 첩보활동을 통해 의병전술 변화를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군 헌병사령부는 김수민 의병장이 서울 서소문 밖 석교 등지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체포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일본군의 경계가 강화된 이후에도 김수민 의병장의 경우와 같이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 잠입 시도는 계속되었다. 김수민 의병장은 4월 15일 예하 의병장 정완식에게 황해도 금천군 대남면 기곡에서 하정동으로 통하는 산중에서 평산헌병토벌대와 교전을 지시하였다. 일본군의 감시망이 전투에 집중될 때 따로 서울로 잠입하여 단발총 60정을 비롯한 다수의 군수품을 구입한 뒤 서울을 빠져나왔다.

의병들이 서울 잠입 시도가 계속된 것은 서울진공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기반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울 잠입을 지속적으로 시도한 김수민 의병장도 서울에서 구입한 무기를 바탕으로 연기우 의병부대 등과 연합의병을 결성하였다. 연합의병 결성은 “지금 국세가 하루 다르고 매월 변화여 동포를 구하기 묘연하고 기약이 없어 인민에게 화가 미치고 있으니 지금 이후로는 양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서울을 공격할 것을 제안”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1909년 이후 국권회복의 길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판단하여 서울 공격을 통해 국제여론을 환기시키고, 일본군에 항일의지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울에서 무기를 구입하는 동시에 선전활동도 전개하였다. 이 무렵 서울에 연기우 의병장이 부하 수백 명을 영솔하고 불시에 서울로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연합의병은 서울진공작전을 시행함으로써 반전을 꾀했지만 일본군도 서울 곳곳에 밀정 등 비밀정탐객을 심어놓고 감시했을 뿐만 아니라 경시청과 헌병대사령부가 경쟁하듯 의병체포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결국 서울진공작전을 시행되지 못했고 서울에서 의병활동을 더 이상 전개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의병들의 항일의지는 더욱 강해졌고 독립군으로 확대되었다.

5. 의병을 기억하는 방식 – 의병의 날

의병은 외국의 침략에 맞서 민중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조직한 저항조직이다. 즉, 정규군이 아닌 민병대의 역할을 하지만 우리 역사 속에서 의병은 정규군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대표적인 시기가 일본의 침략에 저항해 일어난 임진왜란 의병, 청나라의 침략에 저항해 일어난 병자호란 의병과 대한제국기 일본의 침략에 저항해 일어난 한말의병이다. 이 시기는 의병이 가장 크게 일어난 시기이며, 일정한 성과를 거둔 시기였다. 즉, 의병의 자발적인 희생정신을 가장 잘 보여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병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의병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정부는 2010년 5월 25일 의병의 날을 제정하였다. 매년 6월 1일은 의병의 날로 전국에서 기념식과 공연 등 관련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참고문헌]
『대한매일신보』, 『판결문』, 『통감부문서』, 『일본외교문서』
『고종시대사???? 6집, 국사편찬위원회, 1972.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의병편 1-』 8, 국사편찬위원회, 1979.
『한말의병자료 Ⅳ』, 독립기념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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