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금을 나라에 팔자”, 황금광 시대에도 금 모으기 운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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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91]

“금을 나라에 팔자”, 황금광 시대에도 금 모으기 운동이 있었다
일제는 왜 금헌납과 금매각 독려에 그렇게 열을 올렸나?

이순우 책임연구원

흔히 ‘금 모으기 운동’이라고 하면 1997년 외환위기와 관련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신청 때의 그 시절을 퍼뜩 떠올리는 이들이 당연히 많을 줄로 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일찍이 80여년 전쯤에도 이 땅에서 이러한 금 모으기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진 적이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9년 6월 13일자에 수록된 「전선 관공리(全鮮 官公吏)의 적성(赤誠), ‘금헌(金獻)’ 10만 원(萬圓) 돌파(突破), 민중(民衆)의 선두(先頭)에서 시범성적양호(示範成績良好)」 제하의 기사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금을 나라에 바치자!”고 한 헌금운동(獻金運動)은 시국의 장기화와 함께 전국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는데 조선서는 이 헌금운동의 시범(示範)을 하자고 하여 지난 3월 15일부 정무총감(政務總監)의 명의로 전조선 관공리들의 헌금운동을 통첩(通牒)하였다.
이 통첩에 대하여 총독부 각국 과장과 직원들은 물론 각 도청, 군청, 영림서(營林署), 각 지방법원, 복심법원, 보호관찰소, 각 학교 등 ‘관리’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은 전부 금을 바치는 적성을 표하였는데 이 헌금운동의 보고서가 요즈음에야 총독부 문서과로 모이기 시작하고 있다.
이 보고에 대하여 문서과에서는 숫자적으로 집계를 하는 중인데 의외에도 각 관공청에서 표한 헌금운동의 적성은 상당히 좋은 성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전라남도 같은 곳의 보고를 보면 금을 판 돈 만 팔천여 원의 다수에 달한 것 외에 웬만한 관청이면 3, 4천 원어치는 의례히 되어 전선 관공리들의 이렇듯 열렬한 헌금적성은 놀라운 숫자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숫자적으로 전부 계산이 끝난다면 적어도 10만 원 이상은 훨씬 초과할 것으로 일반민중이 가진 금제품은 과연 얼마나 많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다.
그리고 아직 보고가 들어오지 않은 곳에 대하여는 재차 독촉을 발하여 숫자적 집계를 빨리 할 터이며 이 결과에 대하여 다시 이재과(理財課)와 협의해서 일반 민중으로 하여금 “금은 나라에 팔아 국책에 협력”한다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킬 터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보듯이 일제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침략전쟁의 와중에 이른바 ‘시국(時局)의 장기화’에 따른 국가총동원체제(國家總動員體制)를 지속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1939년 3월 이후 해외지불(海外支拂)에 충당하기 위한 목적의 ‘제1차 금매각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다만, 이 당시에는 정무총감 통첩을 통해 조선 전역의 관공리(官公吏)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하여 금헌납의 방침을 하달하고 그 매각대금으로는 다시 솔선수범하여 저축채권(貯蓄債券)을 사도록 독려하였던 것이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관공리 이외의 일반인에게는 따로 금매각을 권장하지는 않지만 자진방매(自進放賣)는 크게 환영한다”는 방침을 함께 밝히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금을 나라에 팔자”는 표어 아래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하여 대대적으로 금붙이 수집 정책이 시도된 것은 해가 바뀌어 1940년 11월 1일부터 ‘금매각운동 강조주간(金賣却運動强調週間)’이 실시되던 때의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40년 11월 15일자에 수록된 「금매각(金賣却)의 적성 고조(赤誠 高潮), 하루 10만 원(萬圓)을 돌파(突破), 잊지 마라 신고(申告)를, 오늘 금(金)의 국세조사일(國勢調査日)」 제하의 기사에 당시의 상황이 채록되어 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신고합시다”라는 표어 아래 조선서 처음 되는 금의 국세조사는 드디어 오는 15일 오전 0시를 기하여 전조선 일제히 실시하기로 되었다. 전시 아래 있어 금은 장식품이 아니라 사변을 처리하는 데 중요한 국가적 재산이 되는 것이므로 모름지기 총후국민은 국책에 순응하는 의미에서 가지고 있는 금을 바르게 신고하는 동시에 나라에 팔고 바침으로서 총후봉공의 아름다운 성과를 거두는데 총력을 발휘하기로 되었다. 그런데 “금을 나라에 팔자”는 힘찬 외침은 마침내 금매각 강조주간(金賣却 强調週間)으로 되어 지난 1일부터 7일 까지 일주일 동안 실시되었던바 조선은행 지금계(朝鮮銀行 地金係)의 창구(窓口)에는 총후국민의 적성을 여실히 말하는 듯 금반지, 금비녀, 금‘컵’ 등 금제품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무엇이나 물결과 같이 휩쓸려 들어와 상당히 좋은 성적을 거두고 끝났다. (하략)

더구나 이 당시의 ‘금매각 강조주간’은 1940년 11월 15일로 예정된 ‘금(金)의 국세조사(國勢調査)’와 맞물려 진행된 것이었다. 1940년 9월 30일에 조선총독부령 제204호로 제정된 「조선산금령(朝鮮産金令) 제13조의 규정에 의한 금보유상황 조사규칙(金保有狀況 調査規則)」에 따르면, 소화 15년(1940년) 11월 15일 오전 0시 현재로 금을 사용한 제품(금가락지, 비녀, 시곗줄, 안경테, 단추, 화병, 잔, 나이프, 기타 장신구 및 휴대품과 가구집기 등), 고금화폐(古金貨幣), 외국금화, 금지금(金地金) 또는 금화폐를 소유한 자는 그 소유고(所有高)를 11월 20일까지 그 주소지를 관할하는 부윤(府尹) 또는 읍면장(邑面長)을 거쳐 조선총독에게 신고토록 의무화하였다.

이렇게 소재가 파악된 이른바 ‘퇴장금(退藏金)’에 대해서는 — 비록 강제매상(强制買上)이라는 표현은 애써 피하긴 하였으나 — “가지고 있더라도 결국 끼지도 못하고 꽂지도 못할 것이니까 자진해서 나라에 팔기를 바랄 뿐이다”라는 이유를 들어 이를 헌납 또는 매각토록 노골적으로 채근하기 시작했다. 일제가 이토록 금의 확보에 광분했던 까닭은 『매일신보』 1940년 11월 1일에 수록된 「금매각운동 강조좌담회(金賣却運動 强調座談會) (1) 금(金)의 중요성(重要性)을 인식(認識), 군비강화(軍備强化)와 생산력 확충(生産力 擴充)의 초석(礎石)」 제하의 기사에 잘 드러나 있다. 이 당시 1937년 10월 30일 이후 총독부 재무국장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미즈타 나오마사(水田直昌, 1897~1985)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파하였다.

…… 그런데 이에 필요한 물자가 일본의 현재 세력권 내에서 전부 대일 수 있다면 별문제 없는 일이지만은 오늘의 형편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국방의 충실이나 생산력의 확충에 필요한 물건은 외국 즉 제3국으로부터 들여와야만 되는 것인데 일본에서 물건을 외국으로 수출하여 그 대금을 받거나 또는 일본배가 외국물품을 운반하는 등 외국에서 버는 수입 즉 무역관계와 무역의 수입으로 외국물건을 사들여오는 것은 보통 때이면 관계없지만은 현재 상태를 종합하여 볼 적에 소화 13년(1938년)과 14년(1939년)에는 상당한 수입초과(????入超過)로 되어 있어 ‘금’으로 결제하는 이외에 다른 도리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일본의 세력권 내가 아닌 제3국에서는 이쪽 물건을 내어팔고 그 돈으로 필요한 물건을 사든지 또는 ‘금’을 가지고 가서 물건을 사오는 외에 다른 길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에 있으므로 고도국방계획의 건설을 위하는 군비의 충실과 생산력 확충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절대 적으로 금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은 다행히 상당한 금의 생산이 있기는 하지만은 이것만 가지고는 도저히 완전하다고 할 수 없는 처지이므로 민간에서 가지고 있는 금을 정부로 집중시키어 가지고 외국으로부터 필요한 물건을 살 때에 그 값으로 치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즉 오늘의 금매상운동이요 민간으로서는 나라에 금을 팔자는 운동인 것입니다.

일찍이 일본제국은 이른바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 1929년 10월 24일)’로 일컬어지는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의 주가 대폭락으로 촉발된 세계적인 경제대공황(經濟大恐慌) 국면이 막 시작되려던 그 찰나에, 경기호황에 대한 기대와 함께 금수출 해금지(金輸出 解禁止) 및 긴축정책(緊縮政策)의 조치를 시행하면서 1930년 1월 11일을 기하여 금본위제(金本位制)로의 복귀를 선언했다. 하지만 당초의 기대와는 크게 어긋나는 경제상황이 전개되었고, 여기에 더하여 내각총리 대신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1870~1931)에 대한 테러사건(1930년 11월 14일)이 발생하는 등 여러 가지 국내외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빚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하마구치의 후임 총리인 와카츠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1866~1949)가 이끄는 내각이 총사퇴하고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 1855~1932)가 새로운 내각을 꾸리던 1931년 12월 13일 바로 그날에 ‘금수출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금본위제’에서 다시 이탈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특히 이 당시는 이미 통제불능상태로 치닫고 있던 관동군(關東軍)의 독단적인 군사행동으로 1931년 9월 18일에 이른바 ‘만주사변(滿洲事變)’이 불거진 상태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들로서는 금본위제의 복귀에 따른 금수출 허용으로 인해 금의 급속한 해외유출이 진행되고 있었고, 여기에다 전시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후속조치로서 가장 확실한 대외결제수단인 금의 확보가 무엇보다도 긴요한 상태였다는 것이 불과 2년 만에 금본위제를 폐기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이에 따라 1932년 3월 4일에는 일본 각의(閣議)에서 일본은행 본점과 오사카지점을 창구로 하는 금지금 시가 매상(金地金 時價 買上)이 결정되었고, 연쇄적으로 그해 4월 2일에 이르러서는 조선은행에 대해서도 산금시가매매(産金時價賣買)의 인가가 이뤄졌다.

산금장려(産金獎勵)에 초점을 둔 이러한 일련의 정책변화가 가져온 결과물이 곧 한때 식민지 조선 전역을 휩쓸고 간 ‘광산열(鑛山熱)’, ‘금광열(金鑛熱)’, ‘채금열(採金熱)’, ‘골드 러쉬(Gold Rush)’ 등으로 표현되는 ‘황금광 시대(黃金狂時代)’의 도래였다. 금을 캐내는 족족 조선은행의 창구에 안정적으로 팔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던 데다가 무엇보다도 금 시세가 계속 오름세를 타고 있었으므로 너나 할 것 없이 금맥 찾기와 광업권 등록에 앞뒤를 가리지 않고 뛰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7년 7월 7일에 개시된 이른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은 산금국책(産金國策)과 퇴장금 회수운동의 기조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7년 9월 7일에 공포된 「조선산금령(朝鮮産金令)」도 이처럼 전시체제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국면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곧이어 그해 10월 13일에는 ‘산금오개년계획(産金五個年計畫)’의 대강(大綱) 방침이 발표되고, 해를 바꿔 1938년 1월 4일에는 금품위(金品位) 1000분(分) 중 376을 초과, 즉 9금(九金) 이상의 것에 대한 ‘금사용 제한령’과 백금(白金)의 사용을 전면 금지한 ‘백금사용 제한령’이 동시에 발표되기도 했다. 이는 모두 총동원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금의 생산을 독려하는 동시에 이에 대한 통제를 한층 더 옥죄는 수단으로 고안된 것들이었다.

일제패망기에 야단법석을 이루며 진행되었던 금헌납 및 금매각운동에 관한 얘기를 늘어놓고 보니,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윤덕영 자작(尹德榮 子爵)의 처 김복수(金福綏, 1872~1950)가 회장으로 있던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의 존재이다. 1937년 8월 20일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대강당에서 발회식이 거행된 애국금차회는 조선귀족부인, 고위관료의 처, 여류명사들로 조직되었으며, 원래 ‘황군원호(皇軍援護)’를 주된 목적으로 한 군사후원단체였다.

이들은 발회식 당일 총후(銃後)의 성의(誠意)를 피력한다는 이유로 즉석에서 금비녀 11개, 금가락지 3개, 금귀고리 2개, 은비녀 1개 등을 비롯하여 현금(現金) 889원 90전을 걷어서 즉시 이를 용산 주둔 제20사단장인 후카자와 토모히코 육군중장(深澤友彦 陸軍中將)에게 직접 헌납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이 장면은 김은호(金殷鎬, 1892~1979)에 의해 ‘금차헌납도(金釵獻納圖, 높이 6척 5촌, 폭 4척)’로 제작되어 그 해 11월 20일에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에게 증정되었으며, 조선총독부에서는 이를 그림엽서로 만들어 황군위문대(皇軍慰問袋)에 넣어 보내기로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활약 탓인지 총독부 재무국 이재과장이던 야마지 야스유키(山地靖之)와 같은 이는 “애국금차회의 활동 같은 것은 물론 금액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으나 내지(內地, 일본)에도 큰 충동을 주었는데 이러한 운동도 민간에 퇴장(退藏)되어 있는 금의 정부집중책(政府集中策)으로는 좋은 것이다”라는 평가를 내린 바가 있다. 또한 『매일신보』 1938년 1월 16일자, 「산금증산계획(産金增産計劃)과 상사(相俟) 민간사장 금매상(民間死藏 金買上), 국제수지(國際收支)의 조정(調整)을 위(爲)하여, 근근(近近) 법령(法令)으로 발포(發布)」 제하의 기사에는 애국금차회와 같은 조직의 필요성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 조선에 있어서는 금의 퇴장이라 하면 부인들의 금비녀, 금가락지, 귀걸이, 기타 장신구(裝身具) 등 종류도 많을 뿐 아니라 이것을 금의 수량으로 추산(推算)하여도 상당히 거량(巨量)에 달하는 모양이라는 바 이것을 정부에서 매상함에 있어서는 물론 일반 민중이 국책에 순응하는 국민적 도의적 자각에 의할 것이다. 정부에서는 이와 같은 순금제 장신구 등을 순금가격 외에 공전을 합산하여 상당한 금액으로 매상하게 되리라 한다. 일방 이와 같은 퇴장금의 정부집중책에 있어서는 종래에 퇴장되어 있는 금을 상당한 가격으로 사들이는 것은 물론이나 또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 같은 단체에 의한 특지가의 국방비 기부에 의할 것도 고려하고 있다는데 이것을 함에는 상당히 일반 부인들에게 대규모의 시국인식활동을 하여야 될 터라 하여 방금 본부 이재과(理財課)에서는 여러 가지 방책을 강구하고 있다 한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조선은행 지금계 창구를 통해 수집된 막대한 수량의 금붙이는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금광에서 캐낸 것이건 장롱에서 꺼내온 것이건 이곳에 끌어모은 금은 그때그때마다 일본 쪽으로 송출되어 일본은행의 금고 속으로 옮겨졌으므로 이 땅에는 이렇다 할 금괴더미 하나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집중된 금은 결국 ‘패망’으로 막을 내릴 그네들의 ‘성전완수(聖戰完遂)’를 위한 무기조달의 재원으로 허비되고 말았을 테니, 요컨대 여러 벼락부자들을 속출하게 만든 것을 제외하면 이른바 ‘황금광 시대’는 실상 ‘전쟁광 시대’에 장단을 맞춘 허울뿐인 놀음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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